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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구훈련/성경연구단상

김구원 교수님과의 <에스더서로 고찰하는 하나님과 정치 > 줌모임 후기 (2025년 6월 14일)

by 서음인 2025. 6. 16.

어제 번역자인 김구원 교수님과 함께하는 요람 하조니의 <에스더서로 고찰하는 하나님과 정치> 묻고 답하기 모임을 잘 마쳤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인간의 철저한 정치적 노력위에 ‘창발’한다는 것과, 유대적 정신의 근본은 보편적 정의를 지키기 위해 불의한 전체주의 권력에 불복종과 투쟁으로 맞서는 것이라는 하조니의 주장이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유대적 정신’이 현재의 이스라엘과는 거의 상관없어 보인다는 사실에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동의했습니다. 총 열 다섯 분이 참여했고 날카로운 질문과 진지한 답변이 어우러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에스더 묻고 답하기/ 김구원 교수님>

[개관 및 책 질문]

1. 에스더서를 읽다보면 아하수에로왕 통치3년(1:3),7년(2:16),12년(3:7). 즉 시간적 배경을 잘 알 수 있는듯합니다.  에스더서는 언제 기록되었으며 어떤 시대적 배경속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읽혀진 책으로 보시는지요? 저자의 관점 및  교수님의 관점을 듣고 싶습니다.

2.무엇보다도 저자 요람하조니는 에스더 3장을 가장 길게 해석하면서 결국 아하수에로 왕에게는 복종했던 모르드개가 왜 하만에게는 저항했는지 1,2장 내용과 비교하면서 시민 불복종의 개념으로 잘 설명하는 듯 보이는데요. 종교적,정치적인 이유로 하만에게 저항하는 모르드개에 대한 해석이 탁월한 듯 보이네요?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3. 책을 보면 랍비들이 해석한 에스더서를 꽤 많이 인용하는 하조니의 입장을 보는데요. 먼저 보편적인 유대인 성서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에스더서에 대한 이해는 어떠하였는지요? 그리고 계시의 성경에서 언급되지 않는 내용들을 너무 지나치게 신학적 상상력(이성)을 가지고 해석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도 드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4.저자는 왜 이토록 요셉에 대해 부정적으로 해석하는지요? 지동설을 믿던 시대에 천동설이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것처럼, 왕정시대에 아하수에로가 없는 정치체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할지라도, 모르드개가 결국 근무하고 있는 것은 아하수에로 왕정체제의 공고함이 아닌지요? 그렇다면, 파라오의 체제를 공고하게 만들었던 요셉을 그토록이나 매정하게 비판할 수 있는지요? 요셉 또한 이집트를 구원하고 자신의 가족을 살려냄으로 히브리 민족의 토대를 만들지 않았는지요? 그 뿐만 아니라, 고센지방에 거주하여 민족으로 성장하기까지 430년의 기간이 필요했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고센 지방에서 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만약 기근이 끝난 후 야곱의 76명의 가족들이 바로 가나안으로 돌아갔을 때, 과연 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모르드개가 철저하게 페르시아화 한 것이나, 총독의 권한을 행사하여 세금을 걷음으로 페르시아 제국을 위해 일한 것은 요셉이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고 철저하게 이집트인이 되어 파라오를 위해 일한 것과 동일한 것으로 봐야하지 않겠는지요? 아무튼 요셉에 대해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하조니의 입장에 대한 변을 듣고 싶습니다.

5. 아브라함에 대한 해석에 대한 질문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먼저 부르시고, 아브라함은 그 부르심에 따라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이 먼저라는 것이고,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순종의 측면이 강조되었던 것 같습니다. 요람하조니는 아브라함이 주도적으로 문명 세계에서는 자신과 후손들의 삶에 소망을 발견할 수 없기에 정치적 사상적 자유를 찾아서 메소포타미아를 떠났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사실과 이 부분을 연결해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원래 우상숭배나 문명의 이기보다는 유일하신 하나님과 진리를 갈망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의 순종은 아브라함의 갈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든지 하는 상상 말입니다. 아니면 이 부분은 요람하조니의 아예 새로운 해석으로 봐야 할까요?

6.에스더 9장과 10장에서 언급된 유다인의 승리와 부림절, 아말렉의 진멸과 아말렉의 재산을 탈취하지 않은 장면들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요? 또한 1차로 이미 고향으로 돌아와서 에스더 사건과 무관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에스더서는 어떤 의미가 있을런지요?

[책에 대한 열린 나눔]

1.대부분의 구약 학자들은 에스더서 장르를  팩션(역사소설) 또는 풍자로 보는 듯 한데요. 이런 면에서 이 책의 저자 요람 하조니는 에스더서를 지나치게  정치철학적 측면에서 해석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즉 글의 의도는 편하게 축제처럼 웃고 떠들며 말하는 것을 너무 지나치게 정치철학적 측면에서 논리를 따져가며 해석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하조니의 해석에 대해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고, 또 교수님께서 에스더서 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키워드(세계관 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2.에스더서의 전통적 해석은 모든 사건 뒤에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와 기적적 개입을 전제로 신적 주권과 구원 드라마의 맥락으로 읽습니다. 반면, 요람 하조니의 접근은 본문을 페르시아 제국의 권력 구조와 외교 전략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하며, 인간의 지혜와 전략적 선택에 주목합니다. 그렇다면 이 두 관점이 전혀 양립할 수 없는 걸까요? 기존의 해석도 놓치기 싫고, 하조니의 해석도 매우 신선합니다. 그렇다면 신학적, 역사적 메시지가 다르더라도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기도와 행동의 관계’라는 영역에서 두 해석이 만날 수 있는 지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3.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은 ‘우연을 가장한 기적’이 아니라 철저하게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수산의 정치계에서 들인 노력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이러한 인간의 노력위에 ‘창발’한다는 하조니의 해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이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상황을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요?  잘못하면 주류와 기득권의 현상유지 논리로 빠질 위험이 있어 보이는데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콘텍스트]

1. 유대적 정신의 근본은 보편적 정의를 지키기 위해 불의한 전체주의 권력에 불복종과 투쟁으로 맞서는 것이라는 하조니의 설명은 오늘날의 이스라엘이 자행하는 억압과 폭력에 비추어 볼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 이스라엘을 옹호하고 미화하기 위한 논리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조니의 견해에 대한 교수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2. 요람 하조니는 ‘반유대주의’를 단지 혈통적 유대인을 제거하고자 했던 역사적 사건이나 흐름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지배 욕망에 도덕적 한계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런 절대적 지배 욕망을 수용하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들로 인한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저지르는 악행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반유대주의’를 보편적인 악의 본성으로 정의할 경우, ‘반유대주의’에 맞서는 유대인들의 행위는 인류의 보편적인 악과 싸우는 보편적인 선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반유대주의’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유대인들이 주변 대적들에게 행하는 폭력들이 선으로 포장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요람 하조니의 인식은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하만의 악한 계략을 무력화시킨 후 이제는 반대로 유대인들을 위협하던 주변 대적들을 진멸하는 행위를 ‘종교적 정결’의 차원에서 볼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정의’ 차원에서 봐야 하는 문제로 정당화하는듯 보입니다. 물론 이러한 접근은 현실 정치에서 수긍할 수 있는 면이 있지만, 그래도 성경이 말하는 또 다른 축인 평화주의 관점에서는 많은 의문을 낳는데요? 나아가 이러한 요람 하조니와 같은 생각이 지금 이스라엘 국가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향해 저지르고 있는 무자비한 불법적인 전쟁을 지지하고 합리화하는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그리고 요람 하조니의 정의에 따르면 현재 팔래스타인을 향한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폭력이야말로 ‘반유대주의’의 전형으로 봐야 하지 않을런지요?

3.탈교회화 되어가는 대한민국 교회 현실속에서, 즉 세상과 다르게  디아스포라 떠돌이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에스더서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신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기타]

1. 거의 10년전 번역하실 때의 에스더서에 대한 생각과 지금 읽는 에스더서에 대해 달라진 생각은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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