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한 교민의 귀국과 강도 만난 사람의 비유
1. 우한에 거주하던 우리 국민들의 귀국을 둘러싼 소란을 보면서, 누가복음 10:29-37에 나오는 강도 만난 사람의 비유가 생각났습니다.
2. 이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강도 만난 사람을 피했던 이유는 제의적으로 부정할 가능성이 있었던 ("거의 죽게 된") 그 사람으로부터 혹시나 부정이 "전염" 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이 가련한 강도 만난 사람은 우한에 거주했던 우리 국민들이나 중국인들처럼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타인에게 “전염”시킬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종교가 오늘날의 과학이 누리는 권위와 역할을 가졌던 그 시대에, 거룩한 종교인들이 느꼈을 "부정의 전염"에 대한 혐오와 공포가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바이러스 감염"의 공포보다 덜했을까요? 저는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3. 이 이야기는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강도 만난 사람이 처한 곤경을 불쌍히 여긴 한 사마리아 사람의 등장과 함께 극적인 반전을 맞이합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들로 말할 것 같으면 당대의 신실한 유대 종교인들에게 오늘날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혐오의 타겟인 빨갱이, 성소수자, 이슬람, 진화론자, 무신론자를 합한 것보다 더 부정하고 사악한 죄인 취급을 받던 천하의 개쌍놈 무리였습니다. 평소 이런 증오와 혐오에 끊임없이 노출되었을 그 사마리아 사람은 “부정의 전염”보다 “혐오의 전염”이 훨씬 무섭고 끔찍한 전염병이라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향한 긍휼"의 마음으로 "부정의 전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실천이야말로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4. 저는 우한 교민들의 귀국에 대한 우려와 거부의 움직임을 보면서 전국에 가득한 시설 좋은 기도원들과 웅장한 교회 수련원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이라 할 수 있는 주요 교단의 책임자들과 중대형 교회의 목회자들이 앞장서 그들을 "자기 짐승에 태워 데려가 돌보아 주며 이 모든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선언하고, 친히 그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사랑을 실천한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물론 어렵고 힘든 일이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럴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너희도 가서 그렇게 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참된 제자가 되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긍휼을 베푸는 진실한 이웃으로 인정받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