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훈련/성경연구단상

『특강 이사야』11장. 여호와의 종 요약

서음인 2021. 8. 1. 09:49

서론적 이해

 

‘여호와의 종’ 본문

 

‘여호와의 종 본문’ - 베른하르트 둠 (Bernhardt Duhm) 이 꼽은 네 개의 본문

오늘날의 합의 - 각각의 본문이 속한 문맥 안에서 이 종을 판단해야 한다

 

‘여호와의 종’은 누구인가

 

(1) 집단으로서의 이스라엘

     - 49:6에서 종의 사명은 이스라엘을 향한다

     - 반역적인 이스라엘과 순종하는 종을 동일시하기 어렵다

(2) 모세, 히스기야, 웃시야, 예레미야, 스룹바벨과, 예언자 자신 같은 특정한 개인

(3) 제2 성전기를 거치며 오실 메시아에 대한 해석으로 확장됨

(4) 신약의 교회는 이 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함

    - 구약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예언하는 책으로 읽음

    - 구약이 동시대가 아닌 다가올 미래만을 위한 책이 될 가능성

(5) 개인이지만 자신 안에 온 이스라엘이 담겨 있는 개인 (참 이스라엘)

 

익명의 종 - ‘누구’가 아니라 ‘무엇’이 중요하다

 

'누구'가 아닌 '무엇'   이사야서 본문 자체가 개인이든 집단이든 이 종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익명으로 두었다면, 종의 정체보다 그의 직무와 사역에 집중하는 것이 본문을 대하는 타당한 태도다. 메시아는 정체만으로가 아니라 그가 가져오는 시대를 통해 드러난다.

 

'참 이스라엘', 하나님의 종    제2 이사야 시대의 누군가를 비롯하여, 이 땅에 보내진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 나아가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역시 이 종에게서 발견될 수 있다. 종의 노래는 부름받은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으로 해석되어야 하고, 그렇기에 참 이스라엘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수 있다.

 

 

첫 번째 종의 노래(42:1-4) - 마침내 정의를 세우리라

 

미슈파트     종의 사역은 열방을 향해 정의(미슈파트)를 베푸는 것이다. 미슈파트를 가져오는 종의 사역은 통치 구조의 변혁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베풀고 세우는 사역이다. 이 사역은 힘으로 열국을 짓밟는 고레스의 사역과 달리 요란하게 진행되지 않으며, 힘을 앞세우거나 세력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포로 귀환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이야말로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미슈파트가 드러나는 사건이다. 초라하고 볼품 없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열방들에게 하나님의 정의를 무엇인지를 알려 준다. 포로의 회복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회복에 그치지 않고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로 상징되는 미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의 회복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확장된다.

 

세상에 임하는 정의     여호와의 영을 받은 종의 사역은 이렇게 연약한 존재를 포기하지 않고 회복시키고 세우는 것이다. 열방이 교회와 토라를 앙망하는 것은 종교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히브리 노예들과 바벨론 포로들의 회복을 통해 꺼져 가는 등불을 회복시키는 하나님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보편성은 종교적 메시지에 있지 않고 작은 자를 회복시키는 ‘정의’의 사역에 있다.

 

여호와의 종 예수 그리스도    마태복음 12장의 안식일 논쟁에서 잘 나타나듯 이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다. 예수께서 보이신 행동의 핵심은 약자에 대한 관심과 그를 통한 미슈파트의 실행이었으며, 이를 통해 열방이 하나님의 토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오고 그 결과 평화의 세상이 이루어진다. 가르침과 사역을 통해 구체화되지 못한 예수의 ‘이름’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두 번째 종의 노래(49:1-6) - 이방의 빛

 

감추인 종    여호와는 그가 복중에서부터 부르신 여호와의 종을 언제라도 쓸 수 있는 날카로운 무기로 준비시켰지만, 그는 세상이 잘 알아보지 못하도록 여호와의 손 그늘과 화살통 안에 감추어져 있다. 여호와의 종이라는 특별하고 강력한 이름과, 그에 어울리지 않는 현실의 힘겨움과 고초는 여호와의 종을 노래한 네 본문에 일관되게 제시된다.

 

종의 ‘헛수고와’ 하나님의 인정    이 종의 기대와 소망의 근거는 사역의 성공 여부가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비롯되며, 종은 헛수고와 같은 자신의 사역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그의 ‘미슈파트’를 알아 주시기를 구한다. 헛수고하는 것 같은 종의 존재와 사역이야말로 세상에 임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단적으로 보여 주며, 여호와의 종이 추구하는 세상은 바로 그와 같은 이들이 정당한 이해와 대우를 받으며 회복되는 세상이다.

 

이방의 빛     여호와의 종은 야곱 지파를 일으키고 보전된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방의 빛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땅끝까지 이르게 한다. 종의 사역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겠지만 이는 이스라엘에만 국한되는 민족적 사건이 아니라 땅끝 백성들에게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내는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사건이다.

 

여호와의 종 교회    이러한 여호와의 종의 모습은 이 땅에 오신 여호와의 종 예수 그리스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신약 교회는 본래 여호와의 종을 가리키던 말씀을 그리스도뿐 아니라 바울과 같은 한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적용했다. 이사야서에 담긴 여호와의 종 본문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현이자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의 종이 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말씀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실패하고 헛수고하는 집단으로 보이는 교회를 교회를 통해 열방을 하나님께 이끄실 것이다.

 

세 번째 종의 노래(50:4-9) - 학자의 혀와 귀

 

학자의 혀와 귀     여호와의 종은 학자처럼 귀로 곤고한 세상의 소리를 알아듣고, 말로 곤고한 자들을 돕는 자다. 그에게 공부란 현상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상황의 근본적 원인과 회복에 대한 모색과 관련되며, 학자가 된다는 것은 올바르게 알아서 곤고한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종의 사역은 세상에 공의를 세우는 것이며 이는 곤고한 자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궁극적 회복과 변화를 지향한다.

 

종의 고난     이렇게 여호와의 말을 알아듣고 곤고한 이를 돕는 여호와의 종은 고난을 겪는다. 첫 번째 노래에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사역을 행하고, 두 번째 노래에서 그의 사역이 마치 헛수고 같아 보였던 여호와의 종은 세 번째 노래에서 마침내 대적하고 모욕하는 자들에게 둘러싸이기에 이른다. 여호와의 종은 곤고한 자의 소리를 듣고 돕는 자이자 그 자신 역시 동일한 고난을 받는 자다.

 

칭의와 정의    그가 곤고한 자를 도왔듯이 하나님도 그를 도우실 것이다. 여기서 여호와의 도움이란 고난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이겨 내고 견뎌 내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재판정에서 자신의 종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종이 받는 ‘칭의’는 그가 추구해 온 ‘정의’ 및 그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구분되지 않는다. 칭의란 하나님의 정의를 위한 고난이라는 맥락 안에 있으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은 정의를 세우는 고난과 그 가운데서 건지시며 지키시는 하나님을 향한 확신이다.

 

네 번째 종의 노래(52:13-53:12) - 고난받는 종

 

고난을 통한 영광    네 번째 노래는 종의 승리와 존귀를 알리는 하나님의 선포에서 시작해 다시 한번 종을 존귀케 하시리라는 선포로 마무리된다. (수미쌍관, inclusio) 종이 영화롭게 되리라는 결론이야말로 네 번째 종의 노래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이다. 그러나 이 종의 승리와 영화로움은 극심한 고난 가운데 이루어진다.

 

대신 고난받는 종    이 종은 간고를 많이 겪고 질고를 아는 자였다. 백성들은 그들을 무시하고 멸시했지만, 실상 그들은 자신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백성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는 이유로 고난을 받았다. 그들의 고통은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백성 때문이었으며,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과 심판을 대신 짊어진 것이었다.

 

고난받는 종의 패러다임     종의 고초와 괴로움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받았던 모든 고난을 반영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백성들에게 보내져서 끝없는 고통을 당하면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고 마침내 그 백성의 회복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놓았던 모세와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종의 고난은 모든 시대에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의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다.

 

대속이 아닌 배상     종의 고난과 그로 인해 임하는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은 에수 그리스도에게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났으며, 기독교 교회는 53장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본문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본문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멸시한 고난 받는 종의 삶을 하나님께서 귀히 여긴다는 것이다. 종은 백성이 하나님께 행한 잘못을 배상하기 위해 자신을 배상제사(속건제)로 드렸으며, 반역하는 백성과 달리 삶을 산 제물로 드린 종의 순종은 하나님을 만족시켰다.

 

본보기로서의 종    따라서 이 본문은 ‘형벌 대속’보다 ‘고난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주제를 강하게 부각시키며, 그 핵심은 종의 죽음이 아니라 죽음에 직면한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듯에 순종해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리는 삶이다. 그들은 죽었으되 죽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살아 후손들에게 말한다. 종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이 그 백성을 회복시켜준다는 것에서 이 종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동시에, 수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그의 순종과 헌신을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는 본보기로 제시한다. 우리가 걷는 길은 종의 길인가, 고레스의 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