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저서/믿묻딸 - 서평

SunGYol Kim 님의 서평 (2023년 4월 17일)

서음인 2023. 7. 12. 01:19

성인이 된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없이살아가는 어른의 태도를 집약한, 이 문답집은 기독교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의심과 질문의 책이고, 언제나 이미 새로운 기독교를 향한 모험이다.

 

이 책에 서려 있는, 1의 정서는 폐쇄된 자아 내지 독선에 대한 강한 혐오로서의 환대.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우리가 가꾸어야 할 세상은 과연 어떤 곳이어야 할까. 지식과 덕을 갖춘 철인 왕이 다스리는 플라톤의 이상국가? 종교개혁자 칼뱅이 설교자로 봉사하며 철저한 기독교적 이상에 따라 통치되던 기독교 도시 제네바? 나는 일단 지도자가 누구든 그가 내세운 이상이 얼마나 훌륭하든 단 하나의 진리만이 모든 사람에게 강요되는 나라에는 단 1초도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어. 다소 혼란스럽고 가끔 잘못된 길로 갈지라도 요란하고 유쾌한 차이로 가득 차 있고, 그 차이가 삶의 당연한 조건으로 즐겁게 받아들여지는 세계”, 물리적 힘과 폭력 혹은 종교나 이데올로기의 도그마가 아닌 말과 토론과 상식과 교양이 지배하는 세상,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은 채 내가 내 자신만을 대표할 수 있는 키케로와 에라스뮈스의 시민 공동체야말로 내가 살고 싶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세상이라고 확신한단다.”(130)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 란 무엇인가.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기에, 다시 말해 존재의 토대가 불가결하기에 [자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어떤 질서에 순응함으로써 거기서 파생되는 자유를 얻는다. 자유와 도덕법칙이 동전의 양면처럼 얽물려 서로에게 존재근거(ratio essendi)이자 인식근거(ratio cognoscendi)인 까닭이 여기에 있고, "그리스도인들의 표지는 예수의 권위에 대한 인격적 순종이지만, 그 순종의 다른 얼굴은 예수 외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라는 사실"도 여기서 나온다(157).

 

이러한 자유의 정신은 두 가지 태도를 전제한다. [1] 칼 바르트의 육성 성서의 문자를 절대시하려는 시도는 성서를 종이 교황으로 숭배하는 것이다에 의지하여 자기 생각을 확인하기 위한 표상이자 언제나 자신의 기존 관념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서를 독해하는 문자주의와 결별하고, [2] 저 내면의 중심에 있던 기독교 세계관세계기독교로 물구나무 세워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태양과 지구의 자리가 바뀐 것처럼 선()과 법()의 자리를 전도시켜야 한다.

 

이 책을 읽는 줄곧 칸트가 떠올랐다. 자신이 믿는 도그마를 선으로 여겨 그것의 실현을 추종하는 법의 종용을 완전히 뒤집어, 태양의 자리에 법을 두고 선이 그 주위를 회전하도록 한 칸트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고 믿는 신앙의 세계는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내지 복수적 타자가 나에게 설치한 프로그램일수도 있는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와 대결한다. 그래서 정한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환대란 끊임없이 경계를 넘는 사람, 성숙을 향한 모험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 '나 혹은 우리 공동체의 환대'라는 자신의 껍질을 계속 탈피해가는 사람의 것이야.“(192)

 

1960년대에 정초되어, 2000년대에 본격적으로 수입된 포스트모던은 독자가 읽고 싶은 대로 텍스트를 느닷없이 엮거나 오려 붙이는 저자의 죽음으로 몰이해되었다. 포스트모던은 저마다의 일리가 상대적 진리로 올라선 초점 없는 혼합주의 내지 무질서가 결코 아니라 현상학적 환원처럼 상징을 벗겨내어 근거들의 근거 없음을 드러내며 궁극적 실재를 향해 부단히 육박해 들어가는 해체(Déconstruction)의 지향인데, 해체의 전형 또는 이름이 바로 환대다.

왜 환대일까.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에서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을 인용하며 “'사람됨'이란 일상에서의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수행적 개념'이라고 주장해. 이는 한 개인은 오직 공동체의 다른 성원들이 그를 사람으로 '인정'하고, 그래서 특정 사회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가지게 된 개인이 안정적으로 사람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때만 진정으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의미야. 우리가 사람이 된 것은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들이 나에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인정하고 자리를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라는 거지.“(194)

 

이 대목에서 나는 주디스 버틀러를 기억했고, 읽고 보고 듣는 것이 어우러져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믿음을 묻는 딸과 아빠의 문답은, 또 다른 소통을 부른다.

 

# 대화 1.

 

SungYol Kim _ 내년 4, 총선 관련 30대의 변심에 관한 글을 아침에 읽었다. 장황한 분석, 진부한 결론. 진보와 보수란 프레임으로 첫 단추를 꿰니 일상이 보이지 않는 듯. 성서 문자주의처럼 보고 싶은 것만 맹신하며 신승(辛勝) 전략을 수립하는 유기적 지식인들에게 데틀레프 포이케르트의 <나치 시대의 일상사>를 권할 순 없겠다. 반사이익 구도니까.

 

데틀레프 포이케르트는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던 유대인 대량 학살에 대해 알고 있었거나 적어도 조금만 노력하면 금방 알아낼 수 있었지만, 자신들의 평온한 일상이 유지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끔찍한 홀로코스트를 외면하거나 방조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고 말해.”(정한욱, <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 236)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은 증오로 건설되었지만 그 길은 무관심으로 포장되었다. 오늘은 세월호 참사 9주기이다. “The road to Auschwitz was built by hate but paved with indifference.”(Ian Kershaw, <Hitler, the Germans and the Final Solution> p.5)

 

이순석 선생님 _ 그 포장를 뜯어내는 예술의 정치화는 어떻게 가능할지 여쭙습니다.

SungYol Kim _ 무람 없이 말씀드려 다소 염려되나 예술의 정치화란 자기 생각의 순환 속에서 굳어지는 공부의 지옥으로부터의 개종 혹은 전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도 통과형 수재들”(후지타 쇼조)을 위시해 능력주의에 동조하는 소위 성공한 이들은 타인들이 얼마나 자신의 존재에 깊이 관여하는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약자의 고통자리 없음을 정당한 몫으로 간주하는 듯합니다.

 

김현경 선생님이 <사람, 장소, 환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환대를 통해 약자 이를테면, Z세대와 이주 노동자와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 에게 사회적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필요하나 저는 환대가 호의 즉, 강자의 기분에 따라 이루어지는 시혜라면 공부의 지옥은 더 견고해지고 니체가 말한 약자의 원한의식만 더 완강해질 것이라 여겨 [보완을 염두에 둔] 비판적 견해도 갖고 있습니다.

 

제가 동의하고 지지하는 환대란 이것은 데리다, 더 나아가 칸트의 입장에 토대합니다 해체의 전형 또는 이름입니다. 해체는 궁극적 실재를 향해 부단히 육박해 들어가 근거들의 근거 없음을 드러내는 일이고, 각자의 자리를 만들어낸 상징적 체계들을 벗겨내는 일이며, 일종의 현재진행형으로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그리고 능동과 피동이 중첩되어 언제나 이미 구조적으로 각인된 전략적 선택성 속에 우리를 위치시키는 수행성(performativity)을 변혁할 수 있도록 추동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참된 공부 저는 참된 공부가, 예술의 정치화라고 믿습니다. 물론 이 또한 조만간 지양될 잠간의 입장인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해 김영민 선생님의 <공부론>처럼 타자와의 대면을 통해 내가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것으로 귀결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존재가 된 내가 움직이는 곳마다 주변이 바뀌는 것을 통해 완성되는 성화(sanctification)를 통해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을 가장 잘 체현한 인물이 저는 사도 바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을 정한욱 선생님은 <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에서 말할 수 없이 정확히, 그래서 누구보다 아름답게 포착하였습니다.

 

기독교인을 박해하기 위해 기세등등하게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바울은 하나님이라는 타자가 자신의 삶에 폭력적으로 개입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돼. 그리고 그 결과 지금까지 자신이 가졌던 하나님과 기독교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럽거나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이렇게 공부의 길에 접어든 그는 하나님과 여러 사람과 만남을 통해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숙해갔고, 점차 생활과 신앙, 삶과 앎,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발 닿는 곳마다 주변을 바꾸는 위험한 사람 즉 그리스도를 닮은(Immitatio Christi) 사람이 되어갔지. 신약성서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대적들은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자"라는 죄목으로 바울을 고소한단다. 나는 이러한 바울의 삶이야말로 모든 시대와 장소의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공부하는 삶의 모범이라고 생각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절대타자인 하나님과의 대면을 통해 총체적인 존재의 변화를 경험하고,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끊임없이 신앙의 지평을 넓히며, 변화된 자신의 존재 자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지.“(244~245)

 

# 대화 2.

 

아내 _ 사랑의 법과 환대의 해석학을 통한 자유와 다양성의 옹호 그리고 사회통합을 향한 열린 지평은 알겠어. 그럼 성소수자 페스티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은 무엇이어야 할까.

_ 이를테면 동성애 옹호와 동성애자 포용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 내가 정작 의아하고 궁금했던 바는, 보수 혹은 기성 기독교단이 여러 다른 사회 의제엔 소극적이거나 무심하면서 왜 유독 성소수자 이슈엔 극명한 반감과 우려를 표명하는가였어.

 

사회 갈등은 계급, 인종, 세대, 남북, 젠더 등의 5개 범주로 분리되어 표출되는데 앞의 네 가지에 침묵하거나 방관하는 기독교가 왜 하필 젠더의 문제만큼은 이렇게 날카로울까. 나는 기득권과의 이해관계 충돌이 가장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 성이고, 위기 혹은 말세란 프레임으로 몰아가 내부 세력을 결집시키기 제일 좋은 이슈도 성이야. 그래서 성 문제에 이렇게 골몰하는 거라고 생각해. 나머지는 다 기득권과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데 기득권과 이해관계가 없으면서 타인을 적으로 만들고 세를 결집시킬 수 있는 유일한 축이 젠더라고. 그래서 젠더에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 아이러니지. 종교개혁의 핵심 계기가 면죄부, 즉 세속의 힘에 대한 탐욕이었는데 지난 수십년간 교회는 돈과 권력이 몰려있는 곳에 입지를 선정하고 건물을 세운 다음 교회성장을 부흥이라 외치며 [다분히 선별적으로] 사람을 모으려고 혈안이잖아. 아이러니지. 이중의 아이러니.

 

정한욱 선생님은 이점을 이렇게 말했어. ”사람됨이 인간 공동체가 누적된 행위를 통해 만들어가는 '수행적 가치'라고 강조하는 비종교인들은 '절대적 환대'를 주장하는데, 사람됨이 하나님이 천부적으로 부여한 '본질적 가치'라고 주장하는 종교인들이 '조건부 환대'의 권리를 요구하다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지?“(196)

 

수행성,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현재 진행형으로 중첩되어 있으면서 능동인 동시에 피동이 된다고 그랬잖아. 어빙 고프만 얘기도 했고,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성 개념도 마찬가지야. 구조적으로 각인된 전략적 선택성까지도. 움직이는 거야, 계속해서. 구조적으로 각인되었지만 전략적 선택성을 통해 다시 구조를 만들어가는 현재진행형. 이전에 했던 그 선택에 대해서 자기가 어느 정도는 안고 가야겠지. 이게 수행성 개념이거든. 그런데 이 상황 속에서 아까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모두 결국은 어떤 자리에서 말하게 된단 말이야.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도 기본적인 것들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는 게 환대인데, 이 환대는 호의에 의거해서는 안 돼. 기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처지나 맥락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처지와 맥락에 관계없이 늘 일관되게 인간됨을 지켜주는 기본권이 그래서 중요해. 기본권을 확보하는 것과 관련해서 정작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비크리스천 같은 경우에는 인격에 호소하면서 존엄성에 호소하면서 그 자리를 내주자고 말하는 반면 크리스천들은 천부 인권, 하나님의 형상(이마고 데이)을 강조하면서도 배제와 포용의 갈림길에선 배제를 택하여 자신들의 세를 결집시키려는 형태로 계속 쪼그라들고 있다고. 기실 교회는 늘 돈과 권력의 중심지에만 있길 원했잖아. 종교개혁의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 —— 앞서 면죄부 얘기했지만 —— 결국 돈과 권력의 문제였거든. 돈과 권력의 중심부에 그렇게 들러붙어 있는 상태에선 기득권에 대해 전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거야. 돈과 권력에 기대어 있기 때문에 기득권과 연결된 계급이라든가 인종, 세대, 남북 문제에 관해선 다시 말해 소위 정치경제적 사안에 관한 발언은 삼가는 것이지. 그래서 교회에선 정치 이야기 안 하잖아.

 

*

 

두 번의 대화를 마치고, 나는 환대야말로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십자가의 정신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문장을 소리내어 읽었다.

 

데리다는 이 '해체'의 목적이 파괴 자체가 아니라 정의에 대한 관심이며, 따라서 최후까지 해체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정의'라고 강조하고 있단다. 이는 데리다가 말하는 '환대'의 궁극적 지향이 결국 정의를 향하고 있다는 놀라운 결론으로 이어지지. 바꿔 말하자면 정의는 오직 절대적 환대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거야. 나는 이러한 데리다의 '절대적 환대'가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명확하게 설명한 개념 중 하나라고 생각해.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한 분으로 고백하는 예수가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 사건 자체가, 신과 인간, 유한과 무한의 경계까지도 뛰어넘는 하나님의 절대적 환대를 보여주는 극적인 예라고 할 수 있어. 그리고 이렇게 성육신하신 예수는 동시대인들이 그어놓은 정결과 부정, 포용과 배제의 경계선을 철저히 무너뜨리며, 가는 곳마다 소외되고 배제된 자들에게 절대적 환대를 베푸는 파격적 행보를 보였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삶이 보여주는 이 절대적 환대야말로 하나님이 먼저 인간에게 베풀었고 다시 인간에게 요구하는 사랑과 정의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있단다.“(193)

 

올해의 책이다. 인생의 책이고. 이 책은 저자의 인생을 모두 쏟아부어 만든 환대의 육성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