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진 목사님 서평 (2023년 5월 1일)
미쿡에서 수요일에 주문한 한국 책이 금요일에 도착했다. 이틀만이다. 아무리 빨리 빨리 나라의 퀵배송 세상이라도 이건 좀 느므한 듯. 이 먼거리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땀흘렸을 노동의 수고를 생각하니 괜시리 미안해 진다. 좀 쉬엄 쉬엄 일하면 안되나. 어차피 아무 때나 꽂으면 되는 서가 장식품인 것을.
페북의 화제작 <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를 먼저 집어 들었다. 재미있다. 깊이도 있다. 신학과 인문학에 선 이해가 없으면 초큼 어려울 수도 있겠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세계 기독교’로 관심이 변해갔던 저자의 신앙 여정에서 나의 모습이 겹쳐 보여 정겨운 느낌도 든다. ‘기독교 세계관’ 장에서, 무려 삼십년 전에 읽었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제목을 보고는 잠시 '창-타-구'의 추억에 잠겼다.
제임스 사이어, 프란시스 쉐퍼, 아브라함 카이퍼, 리처드 마우. 추억의 이름들이다. ’기세‘를 열심히 공부하고 (관심도 없던) 청년들에게 가르치던 무모함, <혁명만이 변화인가>를 물으며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변혁을 꿈꾸던 순진함, ‘복상’을 열독하며 싸이월드 ‘복음주의’ 클럽에서 논쟁하던 어리석은 열정. 나도 한 때는 개혁주의에 발을 담갔었구나.
이제 더 이상, ‘기독교 세계관’이란 오만한 용어를 사용하는 하나의 관점에 관심이 없다. 여전히 그 관점을 가진 이들이, 겸손히 세계 기독교의 한 지류임을 인정하고 ’개혁주의‘라는 적절한 용어를 사용하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저자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내가 과거에 심취했던 기독교 세계관은 이제 과감하게 용도 폐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점점 강해지고 있단다’ 아마도 이 대목이, (이 책을 ‘비추’함으로) 바이럴 마케팅을 해 주었던 목사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다. ‘비추’는 그렇다 쳐도, ’창조-타락-구속’의 ‘구속사’적 관점으로 기독교를 이해하지 않는, (당신들의 눈에) ‘자유주의 신학‘에 빠진 듯 보이는 그리스도인도 성서와 기독교 전통을 존중하고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아 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