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의사!

기생충과 인권, 그리고 의료윤리 - 북한 귀순 병사의 기생충 논란을 보며

서음인 2017. 11. 23. 03:15


기본적으로 의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환자가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개인정보를 본인의 동의 없이 다른 사람에게 유출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합니다. 직무상 알게 된 환자의 개인정보를 타인에게 유출하지 않는 것은 의료법에 적시된 강제 규정일 뿐 아니라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도 나오는 의사의 가장 중요한 윤리적 의무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덴만에서 총상을 입은 석 선장님을 수술하다가 이번처럼 많은 기생충이 발견됐다면 그때도 별 주저 없이 그 사실을 기자들 앞에서 브리핑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사람들이 이번 경우처럼 그 뉴스를 아무 거북함 없이 자신들의 관음증을 만족시키며 편안하게 소비할 수 있었을까요? 혹시 대통령을 수술하다가 그런 일이 벌어졌더라도 의료진이 편안하게 '기생충'을 입에 담을 수 있었을까요혹시 내 부모나 자식이 그런 일을 겪었더라도 브리핑에서 '기생충'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이 흥미로운 가십거리로 여겨졌을까요? 

의료인을 양성하는 수련병원에서조차 전공의 선생님들이나 의과대학생들이 자신의 의료정보와 치료과정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시던 분들이, 왜 타인의 뱃속에 들어있는 기생충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도 관대해진 것일까요? 내 몸이 아니라서? 그 '타인'이 대한민국 국민이거나 잘 살고 인권의식이 높은 나라에서 온 서양인이 아닌 뱃속에 기생충이나 득시글거리는 가난하고 힘 없는 탈북 병사라서? 아니면 죽을 사람을 살려 놓은 의사에게는 그 정도 문제를 가볍게 무시할 권리가 주어지기 때문에?  

동료 의사들을 대상으로 한 학술적인 프레젠테이션이 아닌 대중을 상대로 한 기자회견이라면 더더욱 환자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수치심을 유발할 소지가 있는 의료정보는 내 자식이든 대통령이든 북한 귀순병사든 소말리아 해적이든 누구의 것이라도 공개하는 데 신중을 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자인 저는 모든 인간이 국적과 인종과 성별과 나이와 빈부와 정치 종교적 신념에 관계없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천부적 권리 - 수치스러운 개인정보를 타인에게 알리지 않을 권리를 포함하여 - 를 가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헌신적인 의료인이라도 환자의 개인정보와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법적 윤리적 의무에서 면제될 수는 없으며, 한 나라의 대통령이든 힘없는 외국인 근로자든 가벼운 감기로 동네병원에 방문했든 총상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든 그 어떤 환자의 몸과 건강에 대한 소중한 정보도 본인의 동의가 없는 한 대중들에게 흥미로운 가십거리로나 소비될 포르노그라피의 소재로 제공되서는 안된다고 믿습니다. 만약 수많은 실명환자에게 광명을 선사하거나 죽을 생명을 여럿 살려 준 "헌신되고 유능한" 의사라고 해서 이 의무에서 면제될 수 있다고 여긴다면, 엄청난 성공을 거둔 "헌신되고 유능한" 독재자나 재벌, 초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저지른 독재, 축재, 탈세, 비자금 조성, 학력위조, 세습과 같은 법적 윤리적 일탈에 대해서도 모두 면죄부를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2017. 11. 23)


한마디 더, 개인적으로 저는 이번 "기생충 사태"의 각본과 감독은 아마도 이국종 교수님이 언론 브리핑을 하기 전 함께 상의했다는 소위 "관계기관"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교수님이 이 퍼포먼스의 수동적 배우였는지 아니면 각본을 만드는 단계에서부터 깊숙히 관여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세계에서 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교역국이자 선진국들의 모임이라는 OECD 가입국에다 가난한 나라에 원조를 제공하는 세계 23개국 중의 하나라는 대한민국에는, 아직도 어떤 분야에서든 하다못해 귀순자 뱃속의 기생충을 들춰서라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불량국가라는 북한보다 우리가 월등히 우월하다는 소리를 꼭 들어야만 밥맛이 돌고 잠도 잘 오는 분들이 제법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니 이 관객들의 우월감을 북돋우고 관음증까지 만족시킬 "기생충"이 조연으로 한자리 차지하는 순간, 안 그래도 드라마틱한 이 퍼포먼스의 흥행에는 날개가 달릴 것이고, 이 퍼포먼스를 기획한 "관계기관"의 존재감과 주가 역시 덩달아 치솟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이런 관객들을 볼때마다 자신과 심하게 사이가 나쁜 바닥에서 10등짜리 학생을 이기는 것만을 인생의 유일한 목표로 삼아 어떤 과목이든 그 친구보다만 잘하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 날뛰는 전교 10등짜리 학생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심하게 자존감이 낮아 보이는 이런 분들에게 이제는 스스로에 대해 자신을 가지고 그 학생과의 병적인 비교의식에서 벗어나 좀 더 높은 목표를 바라봐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2017. 11. 25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