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음인 2018. 2. 28. 23:43

이 세상이 창조되던 그 아침에 나는 아버지와 함께 춤을 추었다.

내가 베들레헴에 태어났을 때도 하늘의 춤을 추었다.

춤춰라 어디서든지 힘차게 멋있게 춤춰라.

나는 춤의 왕, 너 어디 있든지 춤속에 너 인도 하련다.


제 또래의 그리스도인들이 젊을 때 부르던 복음성가 중에 <춤의 왕>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당시 젊은이들이 주로 부르던 “십자가를 질 수 있나” 류의 ‘경건한’ 노래들과도, “금관의 예수” 같은 민중 복음송(?)과도 약간씩 결이 다른 독특한 노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춤을 추다니! 예수님이 우리를 춤으로 인도하다니! 당시에 나름 ‘경건파’에 속했던 저는 뭔가 불경스러운 일을 저지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 한 번도 이 노래를 편안한 마음으로 시원하게 부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여러 책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이러저러한 진술들을 접하게 되면서 어느 순간 이 노래가 삼위일체적 삶의 본질을 설명하는 그리스어 단어인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은 서로 안에 “내주하고”, 서로에게 침투하며, 서로를 “둘러싸고” 참으로 아름다운 신적인 춤(divine dance) 속에서 하나를 이룬다 - 의 뜻을 기가 막히게 담아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조와 구속과 완성의 신적인 춤을 추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팀 켈러는 <왕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춤 속으로 초대하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였으며 ...... 우리는 삼위일체와 함께 춤을 추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구미정은 <두 글자로 신학하기>에서 “신학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추고 계시는 우주적인 춤의 리듬을 타고 유연한 곡선의 스텝을 밟는 것” 이라고 표현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춤추는, 하나님의 형상 인간!


켈러는 하나님과 함께 추는 춤의 의미가 “나를 찬양해라.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라. 나의 아름다움을 깨달아라 ...... 너는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창조된 존재다. 매사에 나를 생각해야 한다. 나를 무조건적으로 섬겨야 한다. 거기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다”여아 한다고 주장합니다. 구미정은 그 춤의 의미가 “특정한 교리 혹은 교조주의적 개념을 암기하며 하나님을 명사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 함께 놀자고 자꾸만 유혹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린아이처럼 달려가 신나게 뛰어노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과연 누구의 장단에 발맞춰 스텝을 밟아야 하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