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단상 기독교

<마르틴 루터와 그의 시대> 그리고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장이

서음인 2018. 5. 21. 15:48

<마르틴 루터와 그의 시대>를 포함한 여러 루터 관련서들을 읽어가면서 루터라는 인물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랑만이 아니라 증오에 있어서도 위대했으며, 날카롭고 논리정연한 사상가였을 뿐 아니라 맹목적으로 분노하는 선동가이기도 했던” 이 문제적 인물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교회의 후견과 전통으로부터 해방시켜 ‘고독한 양심의 종교’로 바꿈으로서 근대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최초의 근대인’이기도 했지만, “마르틴 루터만 아니었다면 종교개혁사는 독일이 근대로 출발하는 역사로 기록되었을 것이다”라는 교회사가 하이코 오버만의 지적대로 중세적이고 봉건적인 삶과 신앙의 틀을 끝내 벗어나지 못한 ‘마지막 중세인’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루터의 중세적 특성은 세속정부를 중세적이고 봉건적인 신분질서와 동일시한 끝에 봉기를 일으킨 농민들을 “은총과 자비를 베풀지 말고 미친개를 대하듯 살육하라”고 촉구하는 글이나(사진 1), 묵시적이고 폭력적인 세계상에 사로잡혀 자신과 다른 생각과 신앙을 사람들을 악마로 간주한 나머지 “아이들에게 마법을 걸거나 사악한 일을 많이 하는 마녀는 .... 죽임을 당해도 마땅하다”고 주장한다던지(사진 2,3) “유대인의 회당에 불을 지르고 .... 그들의 집을 파괴하고 박살내며 ..... 온갖 종류의 기도서와 탈무드를 빼앗아야 한다”는 끔찍한 선동을 일삼고 있는 후기의 저술들(사진 3,4)에서 두드러집니다. 그리고 저자는 개혁을 지지하는 대다수의 동료들마저도 반대했던 루터의 이런 극단적인 주장이 “루터가 인문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두었던 것” 때문일 수도 있다고 추론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루터의 한계가 곧 그가 살았던 시대의 한계이며, “그의 실수는 수천 명의 미덕보다 훨씬 이롭고 ..... 에라스무스의 고상함과 멜란히톤의 부드러움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형제 마르틴의 지독한 가혹함이 이루어냈다”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생각에 동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사진 5).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루터가 가졌던 “고귀한 감정,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는 거인의 심장”을 가지지 못한 난장이에 불과하지만, 루터나 다른 위대한 거인들 위에 올라타 그보다 훨씬 더 멀리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때 21세기 한국교회에는 ‘거인의 등에 올라탄 난장이들’보다, ‘심장이 거세된 거인의 분신들’이 훨씬 자주 눈에 띠는 것 같습니다. 제 착각일까요?

사진 1

사진 2

사진 3

사진 4

사진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