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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기사 영상

복음과상황 No 392 기고 “깨끗한 부자는 가능한가”

by 서음인 2023. 11. 30.

 

 

들어가며

 

이 원고를 써달라는 제안을 받고 많이 망설였습니다. ‘돈’은 제가 가장 자신 없어하는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평균적인 한국인들보다 돈을 많이 버는 중년 안과 개원의사입니다. 아직 갚아야 할 빚이 많지만 소유한 재산이 빚보다 더 많습니다. 제자도의 실천을 위해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거나 이웃사랑의 정신으로 경제정의를 위해 노력하시는 분들을 존경하지만 제 자신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지 않습니다. 여기저기 적지 않은 액수의 후원과 기부를 행하고 있지만 전부 합해봐야 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를 약간 넘어서는 수준입니다. 한 마디로 저는 돈에 관한 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상적인 메시지를 던질 만한 이야기거리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이 어렵고도 민감한 주제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을까요? 거창한 신학적 사회학적 거대담론이 아닌 제 일상의 영역에서 몇몇 스승들의 가르침에 따라 행하고 있는 평범하고도 소소한 실천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가 보려고 합니다.

 

세금

 

저 같은 개인사업자들에게 봄철은 작년 소득에 대한 소득세를 내는 달입니다. 저는 수입이 꽤 많은 편이지만 그에 비례해 부과되는 세율도 아주 높습니다. 매년 이 때가 되면 정당한 방법으로 한 푼이라도 절세하려고 세무 사무실에 열심히 자료를 챙겨주고 선고를 앞둔 죄인의 심정으로 세무사의 전화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언제나 예외 없이 많은 액수의 세금을 ‘선고’ 받곤 합니다. 세금을 다 내고 나면 1년간 열심히 아끼고 저축해 쌓아놓았던 은행 계좌의 잔고가 또 썰물 빠지듯이 확 비게 됩니다.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해 보지만 아직 아이들 셋을 교육하고 결혼까지 시켜야 하는 부모의 입장에서 아쉽고 허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저는 국가 · 사회 · 종교를 포함해 어떤 공동체의 권리나 이익도 그에 소속된 개인의 자유와 권리보다 앞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 하나, 돈과 소유에 관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만큼은 그가 속한 공동체가 누려야 할 경제적 평등을 외면한 채 무한히 허용되어서는 안된다고 믿습니다. 이는 개인의 경제적 권리와 자유가 공동체의 경제적 평등이라는 가치에 의해 어떤 형태로든 제한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제가 스승으로 삼고 있는 분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의 주창자인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입니다.

 

평생 정의와 평등의 문제에 깊이 천착했던 롤스는 한 사회가 정의롭기 위한 두 가지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첫 번째의 원칙인 “평등한 자유의 원칙”은 정치적 시민적 자유가 모든 시민에게 동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두 번째 원칙은 “차등의 원칙”입니다. 이는 모든 성원들에게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고(기회균등의 원칙), 사회 구성원 중 가장 약한 자에게 가장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조정되는 경우(최소 수혜자 우선성의 원칙)에만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용인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개인의 창의성을 바탕으로 하는 경제활동의 자유와 그에 따른 소득의 차이를 인정하되, 사회의 부가 가장 약한 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돌아갈 수 있도록 분배되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는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공정한 기회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개개인이 적법한 수단을 사용해 각자 열심히 돈을 벌되, 많이 벌면 벌수록 그 사회의 최약자도 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에 훨씬 많은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롤스가 말하는 “공정으로서의 정의”입니다.

 

저는 20세기 내내 지속된 인류사의 가장 거대하고 중요한 실험 중 하나였던 공산주의 체제의 실패는 인간의 욕망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채 완전한 경제적 평등이라는 최선의 의상을 현실 속에서 실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20세기 후반을 지배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류의 신자유주의는 통제되지 않는 인간의 경제적 욕망이 어떻게 인간 사회를 약육강식과 빈익빈 부익부의 정글로 만들 수 있는지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존 롤스의 “공정으로서의 정의” 또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야 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고아와 과부의 나그네의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이상인 정의와 평등을 불완전하게나마 실현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아닐까요?

 

 매년 봄 세무신고를 하는 시기가 돌아올 때마다 부당한 방법으로 세금을 줄여보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많은 액수가 찍힌 세금통지서가 도착하더라도 이웃사랑이라는 성경의 정신을 실천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납부하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낸 세금이 우리 사회가 더 정의롭고 공정하며 평등한 사회가 만들어지는 데 쓰이는지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하는 좋은 시민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급여

 

제 클리닉의 직원급여 및 복지 수준은 옆 병원들과 비교해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기본 급여 외에도 외래환자 수 및 수술 숫자에 따른 인센티브를 매달 지급하고, 직원들이 부담해야 할 보험료 및 세금까지 일부 보조하고 있으며, 외부에서 온 직원의 경우 20평대 아파트인 숙소의 임대료까지 납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직무를 떠나서는 원장과 직원, 고용인과 피고용인이라는 수직적 관계를 유지하기보다 가능하면 인간 대 인간으로서 인격적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주변의 많은 분들이 그렇게 해봐야 나중에 마음만 상한다며 인격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직원들과 명확하게 선을 긋고 지내라고 조언하지만 아직까지는 제 방식을 바꿀 의사가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제 스승은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관계를 이어 온 삶과 신앙의 스승 오스데반 선생님이십니다. 현재 아시아의 M국 선교사로 활동하시는 선생님이 어느날 제게 하나님께서 운영하는 병원을 통해 이루기 원하는 소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인술을 펼쳐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직업을 통해 주변에 복음을 전파하며, 번 돈으로 필요한 곳에 도움의 손길을 뻗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같은 멋지지만 상투적인 대답을 떠올리느라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그에 더해 그리스도인 직원들과 함께 작은 예배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면 더 좋겠다고 생각까지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오선생님은 제게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소명은 직업을 통해 가족들을 부양하고 내게 고용된 직원들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는 짧지만 간명한 대답을 주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에 무릎을 탁 치며 깊이 공감했습니다.

 

저는 꽤 오랫동안 개인병원을 운영해 오면서 수많은 직원들과 함께 일해 왔기에 사람에 대한 순진한 환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믿었던 직원에게 배신당하거나 상처받았던 경험도 꽤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월급을 받으며 일하는 직원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야말로 제 클리닉을 통해 이뤄야 할 가장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소명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만약 제가 이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는 데 실패한 사람이 타인들이 보기에 아무리 고상하고 거창한 업적들을 이뤘다 해도, 그것이 과연 하나님을 진심으로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 될까요? 과연 자신이 고용한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그들의 불행을 댓가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많은 헌금과 기부를 행하는 사람과, 눈에 띠는 성취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 중 누가 하나님 보시기에 더 신실한 제자일까요?

 

저는 바깥에 드러난 외형과 성취에 집중하는 인간과 달리, 하나님은 드러나지 않는 동기와 과정에까지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저와 함께 일했던 직원들이 저를 인색한 사람으로 평가하거나 저와 함께 일했던 시간이 불행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작은 위안과 자부심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병원을 유지하는 동안 맘몬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직원들의 노력에 정당함을 넘어 후한 대가를 지불하기를 아까워하지 않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좋은 인간으로 남아있게 되길 소망해 봅니다.

 

기부

 

저 같은 개인사업자들은 매월 소득이 일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세무신고를 할 때가 되어서야 작년의 정확한 소득과 순익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십일조’처럼 정확하게 소득 대비 비율을 맞추는 방식으로 기부하는 행위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확인해보면 제가 교회헌금을 포함해 기부에 사용하는 돈은 1년 순수입의 10%를 약간 상회하는 정도가 됩니다. 액수로만 보자면 보통사람들보다 꽤 많겠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다지 내세울만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사람과 다른 저만의 특별한 기부 원칙이 있다면 어떤 형태로든 혐오나 폭력을 조장하거나 정당화하는 단체에는 절대 기부하는 않는다는 것 정도입니다. (사실 이 원칙을 유지하는 데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교회입니다)

 

제가 이 주제에 대해 스승으로 삼고 있는 사람은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입니다. 그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미래의 고통을 피하려는 동기와 다른 사람이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행동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에 근거해 “한 행위로 인해 발생하는 내 이익의 양보다 그것이 야기하는 타자의 고통의 양이 더 크다면 그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는 공리주의적 명제를 윤리의 대원칙으로 내세웁니다. 이는 윤리가 단순히 개인이 지켜야할 규범을 제시하는 것에 국한되는 것을 넘어,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에서 불행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일까지로 확장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싱어는 사치를 누릴 여유가 있으면서도 소득의 일부를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않는 부자에게는 기부를 통해 막을 수 있는 죽음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정당한’ 윤리적 원칙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지나친 부담으로 작용하면서 오히려 기부를 주저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경제적 여력이 있는 사람의 경우 수입의 5%를 기부하고 부유할수록 기부의 비율을 더 늘리는 것을 현실적인 윤리적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수입이 총수입인지 순수입인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만약 후자라면 저는 싱어의 기준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또한 싱어는 대부분의 기부가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한 의도가 아닌 감추어진 개인의 이기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대해, 어떤 돈이 ‘순수한’ 의도로 쓰였는지보다 결과적으로 ‘좋은’ 곳에 쓰였다는 사실이 훨씬 중요하며 그들이 누군가를 돕고 있다고 ‘나팔을 불고’ 있다면 오히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기부행위에 동참하도록 권유하는 좋은 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기부를 통해 자신의 삶에 의미와 활력을 부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일체의 윤리적, 문화적, 종교적 전제를 배제한 채 철저히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과 ‘합리적 이성’에만 근거하여 일관되게 공리주의의 원칙을 적용하는 피터 싱어의 결론은 때로 당황스러울 정도로 파격적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장에 거부감을 보이며, 저 역시 그의 윤리적 주장 모두를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 번 질문해보고 싶습니다. “동성애자, 우상숭배자, 가나안 족속은 반드시 죽이라”는 성경의 ‘문자’와 “종교의 자유는 인간(이나 동물)의 고통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멈춘다”라는 싱어의 말 중 과연 어느 쪽이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성경과 예수의 정신을 담고 있을까요?

 

깨끗한 부자는 가능한가?

 

지금까지 나눠 온 제 생각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부가 그 자체로 악은 아니지만 ‘부자의 DNA’가 그리스도인 개인과 교회 공동체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갈수록 점점 더 느끼게 되는 것은 개인이든 공동체든 부자이면서도 부자의 DNA에 지배받지 않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입니다. 돈은 일견 가치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돈과 가까워져 보면 곧 돈의 ‘인격성’을 깨닫게 됩니다. 돈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며, 자신을 소홀히 여기는 자에게는 절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좀 더 친해지려고 시도하면, 맘몬은 돈을 사랑하는 열망과 돈을 벌수 있는 태도로 무장한 자신의 제자가 되기를 요구하며, 결국은 자신과 다른 가치 - 가족, 윤리, 하나님 - 사이에서 무엇을 추구할지 선택할 것을 강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엘륄은 철저하게 세상의 질서(필연의 질서)에 속해 있는 돈은 우리에게 경배를 요구하는 우상이며, 철저하게 악마적이기에 결코 완전히 기독교화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부자이되 맘몬에게 무릎 꿇지 않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깨끗한 부자”라는 불가능한 이상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앞으로도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지극히 소소한 실천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의 삶과 정신을 지배하는 맘몬에 저항하는 작은 실험을 지속해볼 생각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나라에 저 같은 사람의 자리는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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