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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구훈련/성경연구단상

박영호 목사님과의 성경 묻고 답하기 줌미팅 영상 및 후기 (2024년 1월 14일)

by 서음인 2024. 1. 15.

어제 저녁 '성경 묻고 답하기' 그룹에서 박영호 목사님을 모시고 <우리가 몰랐던 1세기 교회>와 <빌립보서> 두 권의 책에 대해 온라인으로 질문하고 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총 열 일곱 분이 참여했고 두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습니다!

학계의 공인된 합의와 개인적 견해/목회적 적용을 신중하게 구분하시고, 질문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해 군더더기없는 언어로 명료하게 대답하시는 모습에서 탁월한 학자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어떤 이야기를 할때에도 일관되게 부드러운 태도를 유지하시고, 그간 쌓아온 학문적 자산을 한국교회의 갱신을 위한 고민과 실천으로 연결시키는 모습에서는 큰 목회자의 풍모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바울서신을 그레코-로만 사회의 맥락과 동시대 수사학의 눈으로 읽게 되면 훨씬 풍성한 이해가 가능할 뿐 아니라 기독교에 익숙지 않은 분들에게도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흥미진진하고 유익한 시간이었네요!

https://youtu.be/IHvZAeV6rj4?si=PnZNFkDeOyQmg7uP



[우리가 몰랐던 1세기 교회 책에 대한 질문]

1. 이 책을 통해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교회의 여러 모습은 그 당시 시대 상황 가운데 교회가 주어진 여러 상황들에 반응하면서 교회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으로 설명하시면서  초대교회를 모든 시대 교회가 지향해야 할 이상으로 규정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시대를 초월하여 교회가 갖추어야 할 교회의 모습을 신약성경에서 찾는 노력은 의미가 없는 작업일까요?

신약 성경에서는 초대 교회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상황에 반응해가는 원리만 추출해서 우리 시대 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풀어가는 원리로 적용하는 일만 가능한 것일런지요? (정병오 선생님)

2.고린도 전서(고전 14:23)와 로마서(16:23)의 ”온 교회“라는 표현을 통해 1세기 교회가 가정모임과 전체 교회의 이중 모임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지만, 사도행전 2:46의 경우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에서 ”성전“은 교회 건물에서의 전체 모임이라기 보다는 성전 예식의 참여(3:1)와 공적 공간에서의 복음 전파(5:20, 오늘날 광장에서의 노방전도와 유사함)의 기능을 했다고 설명 하셨는데 조금 더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사도행전의 성전에서의 복음전파는 오늘날 교회 예배에 어떻게 적용 가능할까요? 불신자들을 위해 드려지는 ’열린 예배‘가 이런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일까요?(윤덕희 선생님)

3.[교회와 회당] 교회를 세울때 회당옆에 세우는 이유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도 회당과 경쟁에서 이기고자 한다고 느껴졌는데요.심지어 종교개혁이 떠오를 정도였습니다.

종교개혁과 유사성이 있는지 궁금하고, 있거나 없거나의 그 이유가 궁금해집니다.또한 단순히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고 교회가 회당보다 좀더 신앙적 우위에 있다고 해도, 현재의 저희에게는 이해하기 쉽지 않는데요. 보통은 회당 옆이 아니라 좀더 떨어진곳에 교회를 지어낼수 있었을텐데요.그렇게(회당근처에 교회위치를) 정한 그들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1) 경제적으로 - 회당근처가 공동소유나 관리이기에 저렴해서였을까요?
(2) 사회문화적으로- 그들이 지니는 지역공동체에서 인정받기위해서 혹은 자연스런 문화관습적 모임장소였기에 다른대안은 없었던가요?
(3) 정치적으로- 준사법권이 있던 유대회당과 근접한이유도 그들의 정치적 인지도를 높이기 위함이었을까요? (서경원 선생님)

[빌립보서 책 질문]

1. 그레코-로만 배경에서 빌립보서를 살펴보니 주로 유대적 관점에서만 바라보던 것보다 훨씬 흥미로웠습니다. 목사님 책에서 여러 곳에서 밝히시기는 했지만 빌립보서의 수신자들이 과연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어떤 사람들’이었을지 정리해볼 수 있을까요?
또,과연 그들은 어떤 상징적 체계 안에서 어떤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갔을지, 그들이 동시대의 신화나 철학의 세계에 얼마나 익숙했을지, 70인역 성경의 세계는 그들에게 얼마나 친근했을지 궁금합니다.(정한욱 선생님)

2. 빌립보서에 나오는 대적자에 대한 질문 [투기와 분쟁으로(1:11),개들,행악하는 자들,몸을 상해하는 일을 하는 자들,할례를 주장하는 이들(3:3),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3:18)]

1)목사님께서는 책에서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도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서 율법준수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나타내 주는 표식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3장 1-3절의 ‘행악자’들은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로서 할례를 받으라고 주장하는 이들이며 바울은 육체를 신뢰(스스로 온전하다고)하는 그들의 태도를 비판 한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p196) 그런데 3장에서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며 바울이 그들을 ‘개’라고 할 정도로 심하게 비판한 이유는 그들의 주장이 빌립보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기 때문인가요?

빌립보서는 전반적으로 승리주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의 대립으로 보인다고 하셨는데, 1장 17절의 ‘다툼으로 전하는 자들’과 1장 28절의 ‘대적자’들은 승리주의자들의 유형으로 보이는 반면 3장의 ‘행악자’들은 이들과는 다른 유형으로 보여서 빌립보서 전반의 흐름으로 보았을 때 다소 생뚱맞아 보입니다.  그러나 어찌보면 이들의 주장 역시 십자가 신학과 대척점에 있기 때문에 계연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까요?목사님께서 대적자들을 승리주의 신학으로 규정하시는 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윤덕희 선생님 외)

2)또한 목사님의 소논문 "빌립보서의 집필동기"에서
대적자들의 정체와 에바브로디도를 연결하시면서  

"바울이 대적들과의 구체적인 투쟁,정확하게는 빌립보 교인들의 지지를 놓고 벌이는 경쟁에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의 모범을 전략적으로 활용했다"라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부탁드립니다.(온상원 선생님)

3.빌립보서1장27절 "오직 너희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개역개정) 말씀을  "오로지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걸맞게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가십시오" 라고 사역하셨습니다.(p111) 즉 "생활하라" 는 단어(폴리튜오마이)를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가라"로. 그리고 3장20절 "우리의 시민권(citizenship)은 하늘에 있다"를 "우리의 정부는 하늘에 있다"로 해석하셨습니다. 즉 "시민권" 단어(폴리튜마)를 "정부"로 사역하셨습니다.(p237)
이렇게 "시민답게"와 "정부"로 보시는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지요? 그리고 덧붙여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를 통해 말하려는 교회 공동체성(에클레시아)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런지요?(온상원 선생님)

4.착한 일(1:6)을 우주적 승리의 결과인 ‘새창조’로 정의하신 것이 깊이 공감하면서 이 부분이 소위 ‘새관점 학파’의 생각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새관점 학파’이라 불리는 일련의 학자들의 바울 이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정한욱 선생님)

5. 빌립보서 2장 5-11절에 나타난 예수님에 대한 묘사는 찬송의 내용이기 때문에 여기서 그리스도와 인성과 신성의 원리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p 사실 삼위일체를 비롯한 성경의 많은 교리와 조직신학의 내용들이 그 근거 구절을 찾아보면 시편의 찬양이나 예언서의 묵시나 역사서의 특별한 정황과 관련된 것들이 많습니다. 사실 성경이 명제의 형태로 하나님을 규정해놓지 않고 이야기나 찬양, 묵시를 통해 하나님의 여러 측면을 드러내주고 있는데, 이를 교리화하고 조직신학으로 정리할 때 어떤 주의가 필요할까요?(정병오 선생님)

또 보통 삼위일체는 조직신학자들이 전개하는 신학(교부, 역사, 철학)의 관점으로 전개가 됩니다. 저는 성서학자가 성서를 통해서 해석되는 삼위일체(더 나아가 교회에서 실천적으로 나눌 법한)에 대한 이해가 박영호 목사님께어느정도 set up 이 되셨는지요?(임희영 선생님)

6. 유오디아 순두게에 대한 질문(4:2절)
빌립보서에 나오는 유오디아와 순두게에 대해 책에서는 두 여성 모두 지도자급으로 보고 부정적 평가 언저리를 오간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윤소정은 ‘빌립보서의 유오디아와 순두게에 대한 여성신학적 해석’(2023)이라는 글에서 피오렌자나 D’Anglo 같은 학자들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해서 두 여성이 다툰 것이 아니라 바울이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여성 사이에서 견해차가 있었기 때문에 논쟁을 벌이는 것으로 봅니다.

이승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한 바울의 리더십 승계 전략’(2021)이라는 글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리더십이 교회 내부에서 갈등의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에 더 안정적인 직무적 교회로의 전환을 꾀한다고 말합니다.

타일러 알레드는 ‘An Alternative View of the Euodia-Syntyche Debate’(2019)라는 글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다투는 관계가 아니라 교회 외부의 반대와 문제에 직면해서 둘이 합심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게 하려고 연합할 것을 촉구하는 견해라고 봅니다. 두 여인에 대해 호의적이라는 입장입니다.

비슷한 입장으로 Richard G. Fellows and Alistair C. Stewart의 ‘Euodia, Syntyche and the Role of Syzygos:Phil 4:2–3’(2018)에서도 두 사람의 갈등이 아닌 교인들과 연합해 그들을 지지하라는 입장인데요. 문제는 교인들이 두 지도자들을 지지하지 않은 것이 문제여서 이것을 시정한다는 겁니다.
저는 어느 한쪽으로 마음이 기운건 아닌데요. 어쨌든 두 여인 모두 지도자라는데 모두가 동의한다고 보구요. 두 여성 모두 이 그룹의 중요한 지도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두 여성에 대한 생각들에 대한 목사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전현철 선생님)

7.빌립보서 책 에필로그에 성도들이 바울 생전과 사후에 바울의 메세지를 받아드리는 이해가 달랐을 수 있다는 독자비평적 관점이 상당히 신선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독자비평과 내러티브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목회자로서 바울 서신을 접할 때마다 신학적 논쟁에 무게가 실려 있어 바울 저작을 다른 관점에서 보는 시도를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혹시 빌립보서나 그 외 바울 서신을 독자비평이 그 외 다른 관점에서 보는 이해들이 있다면 좀 더 소개 부탁드립니다.  (신경수 선생님)

8. [디도서의 대적자와 비교]
빌립보서의 대적자들을 승리주의자들로 보시는데, 디도서의 대적자와 연결점은 없을까요? 디도서에서도 적대자들이 더러운 이득과 연결되는데 이들과 빌립보서의 대적자들이 유사한 면이 있어 보입니다. (딛 1:11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1:12-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1:15절 –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16절 –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3장의 예수 믿기 전의 모습도 일종의 완곡어법으로 적대자에 대한 비판으로도 보여질 수 있어 보이는데, 디도서의 적대자와의 연결점이  있을까요?(전현철 선생님)

9. 에베소 교회의 모습은 어땠을까?
성경에 에베소와 관련된 성경이 많은데요. 거기에 비해 에베소 교회에 대한 사회사적 접근들은 거의 없는데요.  에베소 교회의 사회사적 모습은 어떠했는지요?(전현철 선생님)

[1세기 교회 책과 빌립보서 읽으며. 콘텍스트 속에서 드리는 질문]

1.1장 간구의 기도(3~11절)를 해설하시는 부분을 읽으며 들었던 질문입니다. '성경공부를 많이 하거나, 종교적 지식을 많이 쌓은 사람들이 교만해지고 공동체에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을 본다' 라는 언급에서, 현실적으로 부닥치게 되는 상황을 떠올려 보았습니다.성경과 교회에 대한 지식은 많이 있으나, 공동체 내에서 정말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될때, 말씀에 대한 해석조차도 나뉘어 질 정도의 다름이 깊을때, 생각이 다른 상대의 말을 전혀 듣고자 하지 않을때, 변화가 참으로 더디거나 아예 보여지지 않아 (이런표현이 부끄럽지만) 떄로는 공동체의 짐처럼 느껴지게 하는 이 혹은 이들이 있을때, 그로 인해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상처를 받아 고통이 깊어질때... 등과 같은 공동체 상황이 있다면, 바울을 어떻게 권면했을까요? 목회자로서의 박영호 목사님은 그런 상황이 있다고 할때 어떻게 대처하시게 될까요? (박영미 선생님)

2. 빌립보 편지를 바울의 유고편지로 인식하고 읽으니 새롭습니다. 이 편지를 다시 읽을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권면 속에 바울의 진심어린 사랑을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빌립보 편지에서와 같이 마음을 같이 하지 못하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목사님께서는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 개인의 마음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곧 너희들의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태도를 따라 살라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세계의 변화에 대한 인식 없이 마음의 태도만 바꾸라는 말이 아니다(고후5:17)”라고 했습니다.(p151 그리스도 찬가의 신학) 동시에 명예의 사다리 시스템을 가진 당시 그레코로만 사회에서 무엇이 진정 명예로운 것이고,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이고 무엇을 목표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최근 교회안에 있는 정치적 신념(극보수,또는 진보)으로 인해 교인들의 마음이 나누어지는 사례를 많이 보는 듯 합니다.어떤 이들은 자신이 가진 신념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생각이 강단 설교에도 선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듯 합니다.

그래서 정치적 신념으로 인해 교회를 떠나는 분들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목사님께서 마음을 같이하려면 위와 같이 우선 세계의 변화에 대한 인식이 필요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런 현실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고 나아가야 할가요? (박종하 선생님)

3. 교회 건축을 앞둔 공동체에게 1세기 교회를 통해 배우거나 지향해야할점을 말씀해주세요.
(서경원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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