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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교의 .변증

코넬리우스 반틸 - 개혁파 변증학의 선구자 (이승구 지음, 살림 펴냄)

by 서음인 2016. 6. 1.

2016년의 소개   저같이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보수적인 장로교회에서 오래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이라면 반틸이나 '전제주의'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않으셨더라도, "최고의 변증은 선포" 라는 이분의 정신에는 익숙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저는 대화가 아닌 선포를 강조하는 '전제주의'라는 변증적 접근이 타종교인이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비서구 세계나 수많은 종교와 이데올로기들이 서로 경쟁하는 다원화된 현대 세계에서는 더 이상 작동이 불가능한 근대 서구 기독교 세계(christendom)의 유물이자 서구 제국주의 정신의 기독교 버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제 생각은 비기독교 세계인 인도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사역했고, 귀환한 후에는 선교지보다 더 세속화되고 다원화된 사회가 되어버린 영국에서 어떻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위대한 선교사요 선교학자인 레슬리 뉴비긴의 책들을 접하면서 더욱 굳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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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출판사에서 나온 현대신학자 평전 시리즈의 하나인 이 책에서 저자인 합동신학교 이승구 교수는 “전제주의적 변증학(presuppositional apologetics)”으로 잘 알려진 개혁파 변증학의 거두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의 삶과 신학 그리고 그가 후대에 끼친 영향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한다. 화란의 개혁파 교회에서 자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평생 변증학 교수로 봉직했던 반틸은 ‘정통 개혁주의 신학’ 혹은 ‘성경 이야기의 진리성’을 변증적 논의의 확고한 전제 혹은 출발점으로 삼고(전제주의), “성경에서 자증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만이 세상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논증을 통해 입증하려는 소위 “전제주의적 변증학”을 세웠다. 그리고 그의 주저인『신현대주의』를 비롯한 여러 책에서 자신이 진리라고 확신했던 개혁주의 신학과 조금이라도 어긋난다고 여겨지는 모든 사상이나 신학사조에 대해 자신의 ‘전제’를 바탕으로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휘둘렀다. 


그가 믿었던 ‘정통 개혁주의 신학’ 과 그 신학을 바탕으로 세워진 ‘전제주의 변증학’의 세계는 논리적이고 질서로 충만하며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하지만, 과연 그 폐쇄적이고 완고한 체계가 나름대로의 심오한 철학적 ‧ 종교적 전통을 가진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는 선교의 현장에서 제대로 된 ‘변증’의 기능을 감당할 수 있을까? 비그리스도인과의 접촉점을 부정하고 자신의 전제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내 입장을 일방적으로 논증 혹은 선포하겠다는 태도가 과연 21세기의 세계화되고 다원화된 세상에서도 ‘변증’이라고 불릴 수는 있는 것일가? 내게는 대화가 아닌 선포, 경청이 아닌 비판에 주력하는 그의 ‘변증학’이 지극히 공격적이고 서구 중심적일 뿐 아니라 심지어 기독교 세계(christendom) 바깥에서는 작동 불가능한 제국주의 시대의 유물로 보인다. 금세기의 위대한 선교사 레슬리 뉴비긴『오픈 시크릿』이나 『변화하는 세상 변함없는 복음』에서 보여준 탁견이 새삼 귀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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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비긴의 말 1  우리는 먼저 힌두교도와 마르크스주의자, 무슬림 등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반기고 그들 가운데 나타나는 선함을 인하여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기에 그들 가운에 이미 선하신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도 우리에게 맡겨진 복음을 전해야 하며, 판단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면서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 가 아니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인가” 라는 질문에 집중해야 한다. (레슬리 뉴비긴, 변화하는 세상 변함없는 복음 중)


뉴비긴의 말 2  그리스도인은 다른 신앙을 가진 친구와 이웃을 만날 때 궁극적인 권위를 지닌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한 자로서 다른 권위에 헌신한 상대방을 이해하고 그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러 오시는 곳은 인간의 모든 종교적 윤리적 업적의 꼭대기가 아니고 밑바닥이기에 그리스도인들 역시 다른 종교를 믿는 신자를 만나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아야만 한다. 타종교와의 대화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은 그 결과 자신에게 심대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위험을 인식해야 하며, 동시에 성령께서 대화를 이용해서 상대방이 예수님을 믿도록 회심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믿고 또 기대할 수 있다. 우리가 이와 같이 나의 기독교를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길이며, 이런 위험부담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에만 비로소 교회는 세상을 향한 증인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 (레슬리 뉴비긴, 오픈 시크릿 중)


마지막으로  나는 이 책의 저자인 이 승구 교수를 잘 모르지만 그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젊은 시절 접했던 <기독교 문화관>이라는 책의 번역자였던 그가 후기에서 신학적 이유로 이 책의 한 장(변혁모델 중 "해방신학"을 다룬 10여 페이지)을 통째로 누락하고 번역했다고 고백한 것을 읽었기 때문이다. 만약 "해방신학"이 변혁모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양보할 수 없는 신학적 소신이었기에 그 부분을 누락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을 정도라면 역자는 애초부터 이 책의 번역을 고사했어야 했다. 그 누구도 다른 학자의 완결된 저작을 저자의 허락 없이 함부로 첨삭해(그것도 한 장 전체를 의도적으로 누락해가며!) 번역할 권리를 가질 수는 없다. 그것은 저자뿐 아니라 저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책을 산 모든 독자들을 심히 기만하고 우롱하는 행위다. 


<코넬리우스 반 틸>

내 인생에서 가장 잊혀지지 않는 "역자 후기" .... 저자의 견해대로 "해방신학"이 변혁 모델인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며, 번역자는 이 과정에 개입해 본문 내용을 임의로 첨삭할 어떠한 이유나 권리도 가질 수 없다. 독자는 번역자의 '꼰대질'에 따라 임의로 변개된 책을 읽기 위해 아까운 돈과 시간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대체 왜 저자의 책을 온전히 읽을 권리를 침해당한 독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조차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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