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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저서/읽다 살다

『읽다 살다』 리뷰글 - 이재현 장로님

by 서음인 2023. 3. 12.

존경하는 이재현 장로님의 『읽다 살다』 리뷰를 옮깁니다. (2023년 1월 30일)
 
<20230130> 2023읽기일기02 - [읽다 살다]를 읽다
 
● 교회를 오래오래 다녔다. 그것도 한 교회(신용산교회)를 어머니 뱃속부터 다녀 60년 넘도록... 그런데도 미안한 말이지만 교역자와 성도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단지 같은 부서, 같은 구역(셀)에 속했던 분들, 주일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들만 겨우 겉껍질 정도나 안다고 할까? 겉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깊은 속이야 어찌 알까. 적잖은 시간을 만나왔다 하더라도 교역자와 성도 분들 또한 속내를 다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예배당 안팎에서 보이는 모습, 나누는 기도 제목과 대화로 믿음의 정도를 가늠할 뿐이다. 아마도 나 또한 그들에게 그렇게 보이고 판단받고 재단되리라.
 
● 그가 고등학생 시절부터였던가 가물가물한데 오랫동안 봐 온 사람이 있다. 성지회 - 우리교회는 대학생 또래의 젊은이 부서를 이렇게 부른다. - 때부터는 꽤나 열심히 활동을 했던 친구라 눈에 많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나와는 약간의 나이차도 있고 해서 젊은 시절 깊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어본 기억은 없다. 열심히 성경공부도 하고 성지회 모임에도 열심인 모습을 멀찍이서 보면서 좀 부정적인 시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참 열심이군?! 근데 나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뛰고 달리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 그 때로부터 해가 많이 흘렀다. 교회에서보다 얼책장에서 그를 더 많이 보게 되었다. 성경 공부 차원을 넘어서는 성경 연구의 진지함과 그의 엄청난 독서의 결과물들을 읽으며, 일년에 두세 차례 병원을 일주일 이상 비우고 안과 의료 봉사를 위해 아시아로 아프리카로 다니는 그의 모습을 보며 젊은 시절 다소 부정적이었던 그에 대한 시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스스로 성경에 개안하는 일에 골몰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훌륭한 창조물이지만 어두운 눈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열어 주는 일에 헌신적이다. 이제는 그를, 나보다 훌륭한 이에게서 느끼는 경외와 질투의 묘한 뒤섞임으로 바라본다.
 
● 교회 오래 다녔으면 뭐하나, 말글 가르치는 선생 오래 했으면 뭐하나, 나는 성경을 읽고 쓰고 묵상하는 것은 꾸준히 한다지만 자발적이 아닌 기회가 만들어질 때 성경 공부 몇 번 하는 것이 고작인 '평'균 이하 교인인 것을... 학생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강조하고 강조하지만 정작 나는 1 년에 30권도 채 안 되는, 그것도 책모임에 코뚜레 끼인 채로 겨우 읽어내는 창피한 수준의 독서량을 가진 어쩌면 ‘독서 파렴치한’인 것을...
 
● 주일이었던 지난 설날, 호산나 찬양대원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칭 ‘시골의사’ 정한욱 원장이 2부 예배를 마치고 넌지시 책 한 권을 건네 주었다. <읽다 살다-우리 시대 평신도 5인의 분투하는 성경 읽기>(권일한∙남기업∙송인수∙정병오∙정한욱, 잉클리즈, 2023)! 파렴치한이자 욕심쟁이인 나의 경외와 질투가 한 겹 더해졌다.
 
● 딸이 선물한 <한 번에 한 사람> 읽기를 마친 설날 밤 <읽다 살다>의 맨 마지막 장(章)을 읽었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 나머지 네 장(章)을 마저 읽고 5장을 다시 읽었다. 다들 대단한 분들이다. 개신교 목회자들이여 분발하시라. ‘평’신도들이 진군하고 있다. 근데 또 한편으로 목회자들이 너무 걱정 안하셔도 될 듯도 하다. 오랜 예수쟁이, 교회쟁이 ‘못해’ 신앙인은 이러한 ‘평신도’에 끼이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 “이재현 장로님, 언제나 존경합니다! 정한욱 집사 드림”
- 인사로 쓰신 건 줄은 알지만 말도 안되는 말이기 다음의 두 단어를 얹어 되돌려 드립니다. 경외합니다. 그리고 질투납니다!^^
 
● 다는 아니고 맨 마지막 다섯 번째 장('환대의 해석학과 포용의 실천으로 - 정한욱)의 밑줄 그은 부분 중 일부를 기록 보관의 차원에서 여기에 남긴다. 이 책은 성경 해설서도 주석서도 신앙논집도 아니고 대화를 엮은 책이니 여기 적는 글귀들은 금과옥조가 아니라 눈에 들어온 것임을 밝힌다.
 
▶ 책에 관해 제가 좋아하는 격언 중 하나는 “망치로 머리를 내리치지 않는 책을 왜 읽는가?”입니다.161쪽
▶ 결국 참된 독서, 참된 공부는 타자와의 대면을 통해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에 생길 수 있는 심각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용기를 가진 이의 몫이라는 것입니다.161쪽
▶ 저희 병원 1층은 투명 유리로 돼 있어서 바깥에서 다 보여요. 그래서 불을 켜 놓으면 일종의 공부 감옥이 되는 거죠. 바깥에서 다 보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딴짓을 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 감옥에 스스로 갇혀서 새벽 2시, 늦으면 3시까지 공부도 하고 책도 읽습니다.162쪽
▶ 저는 신앙이란 개인의 결단이라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에 가족이나 직원들에게나 자신들의 일에 충실할 것을 요구할 뿐 종교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요구나 간섭도 하지 않습니다. 딱 하나, 저는 수술할 때 반드시 기도하고 수술하거든요. 164쪽
▶ 개신교 예배의 핵심인 말씀 선포는 온라인으로 대체가 가능하더라고요. ... 그런데 성도의 교제는 온라인으로 대체가 불가능하더라고요.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기간 동안 가장 그리웠던 시간은 예배와 성가대 연습 사이에 한 시간 남짓 가졌던 휴식 시간이었습니다.167쪽
▶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나오게 됐어요. 교회에 나온 순간부트 제 신앙은 성경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였는데, 초창기에 만난 스승의 역할이 대단히 컸습니다. 지금 몽골에 가 계시는 오스데반(Hyeong Keun Oh) 당시 저희 고등부 교사이셨어요.168쪽.
▶ 오스데반 선교사님이 가르치는 방식이 대단히 독특했어요. 이분은 성경을 공부하면서,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왜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는지 항상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하기보다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셨고, 어떤 대답이 나와도 '일리가 있다'고 일단 격려하고 그 대답을 바탕으로 결론으로 이끌어 주셨어요. 그래서 '성경이라는 것은 하나의 해답만 있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면서 다양한 해답을 찾아갈 수 있구나. 계속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그때부터 들었습니다.169쪽.
▶ 성경은 편안하게 걸으며 지표면에 널린 보석을 줍는 보물찾기 놀이터가 아니라 치열하게 심층으로 탐사할수록 더 많은 광맥을 보여 주는 광산과 같다고 생각하게 됐죠.170쪽
▶ 우리는 현재 한 권으로 편집된 성경을 공시적 관점에서 읽지만, 성경은 적어도 몇 백 년, 길면 천 년 이상의 세월을 거쳐 집적되어 온 역사적이고 통시적인 문서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시공간의 제약 속에서 형성된 역사적 문서에 당신의계시를 담아 놓으셨다는 것, 이것이 제 첫 번째 결론입니다.173쪽
▶ 칼 바르트 같은 신학자는 성경의 문자를 그렇게 중시하는 태도를 “성경을 종이 교황으로 숭배하는 일”이라고 말했지요.174쪽
▶ 저는 이 책(박혜란 지음 <목사의 딸>)을 읽으며 한국 보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성경주의’가 수천 년 전 고대 근동이라는 사회 문화적 맥락에 주어진 성경에서 자신들의 독특한 하부 문화에 잘 맞는 부분만을 골라내는 일종의 선택적 문자주의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고대 근동 문화라는 목욕물을 버리다 보면 복음이라는 아기까지 버릴 위험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기를 수호하기 위해 수천 년 묵은 더러운 목욕물까지 복음의 본질이라고 강변하는 데는 문제가 있어요.175쪽
▶ 저는 성경을 공부하는 일이 다른 모든 통찰과 대답을 폭력적으로 배제하는 하나의 최종적 진리에 도달하려는 분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저는 꼭 선택해야 한다면 ‘죽이는’ 진리보다 ‘살리는’ 놀이 쪽을 단호히 택하겠습니다.177쪽
▶ 레티 러셀은 <<공정한 환대>>에서 “환대란 세상을 치유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차이를 넘어 낯선 자들과 연대함으로써 하나님의 환영을 실천하는 일이며 이야말로 성경 메시지의 근본이자 기독교 영성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177쪽
▶ 사실 삼위 하나님 중 한 분이신 예수님이 죄로 오염된 피조물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이 되신 것 자체가 창조주와 피조물, 거룩과 오염의 경계를 뛰어넘은 절대적 환대를 보여 주는 사건이지요.181쪽
▶ 현제 전 인구의 2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다수의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그냥 낯선 종교를 믿는 소수자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이유가 있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절대적 환대 원리에 근거해 모든 사람의 인권을 보장하는 세속국가이기 때문입니다. 갈수록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이 증가하고 교인 수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앞으로 더욱 소수자로 전락할 그리스도인들을 지켜 줄 보루는, 그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인권’이나 ‘차별금지법’이 될 것입니다.182쪽
▶ 선교의 전 과정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도하신다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소수자와 약자를 섬기거나 부정의와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도 그 자체로 훌륭한 선교 행위가 됩니다.188쪽
▶ 정통과 보수를 자랑으로 삼는 그리스도인일수록 성경 연구에 다른 학문의 도움을 받는 것이 탐탁지 않은 것 같아요. 성경을 읽거나 공부하는 데는 성경 자체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어떤 성경 해석이나 신학도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기독교 신학은 동시대의 최신 학문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들어지고 발전되어 왔거든요.192쪽
▶ 과연 오늘날 신학이 타 학문 분야를 압도하는 엄밀성과 세상을 바꾸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속화라는 말을 부정적 뉘앙스로만 사용하지만, 사실 세상이 세속화된 이유는 ‘세속’이 그만한 능력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193쪽
▶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죄’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해 폭로하고 극복한 희생양 메커니즘의 망령을 다시 불러들여 무고한 소수자나 약자를 희생양 삼아 자신들의 폭력성을 은폐하려는 행위를 가리킵니다.194쪽
▶ 타자에 대한 비공감과 비사고야말로 ‘죄’의 본질이라는 인식이야말로 정죄와 혐오의 영에 사로잡힌 오늘날의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가 기울여야 할 가장 적실한 죄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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