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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저자/마르틴 루터

루터의 십자가 신학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컨콜디아사 펴냄)

by 서음인 2016. 5. 31.

근래 복음주의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저술가 중 한명이며 과거 몇 권의 책을 통해 만난 바 있는 저자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이 책에서 루터의 ‘하나님의 의’ 라는 개념의 발전과정을 추적한 결과, 이 개념이 ‘하나님은 진정으로 고통, 고난, 그리고 십자가의 자기포기를 통해 계시되고 알려진다’ 는 그의 유명한 십자가의 신학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처음에는 새 길 학파(via moderna)의 칭의 이론을 따르는 전형적인 중세 후기 신학자였던 루터는 당대 칭의론의 혼돈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찰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중세의 칭의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새롭고 놀라운 하나님의 의’ 개념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루터가 발견한 ‘하나님의 의’란 의로운 하나님이 인간에게 심판자로 드러나는 의가 아니고, 죄로 인해 진노와 심판 가운데 있는 인간을 의롭게 여기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며, 그것으로 사람을 옷입히는(전가된 imparted) 그런 의이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는 의롭게 되지만 내적으로는 여전히 죄인이며, 인간이 지닌 의는 자신에게 비본래적인 낮선 의(justia extra nos)로 남아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놀라운 방식으로 인간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은 과연 누구인가? 루터는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숨어계신 하나님’(Deus crucifixus et absconidus), 즉 십자가 신학의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고난과 유기라는 섬뜩한 광경의 약함, 어리석음, 불의 안에서 힘, 지혜, 정의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 반대되는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나며, 그 심판의 결과로 인간은 구원의 자격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심판 가운데 있는 죄인이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도적이고 절대적인 은혜(sola gratia) 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계시되어 있지만, 그것이 참된 계시임에도 불구하고 계시에 대한 인간의 모든 선입견과 상충되기에(하나님의 뒷모습 posteriora Dei), 그것은 역설 아래서 감추어져 있으며 오직 믿음의 눈에 의해서만 식별될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계시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자리는 그리스도의 수치와 고난의 십자가이며, 힘과 영광 그리고 권능으로 계시된 하나님을 기대하는 ‘영광의 신학’은 십자가상에서 유기된 하나님을 결코 발견할 수 없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시험한다’(Crux probat omnia).

 

‘십자가에 달리시고 숨어계신 하나님’은 단지 개인의 구원을 확증하는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원리가 아닌, 고난과 시험으로 인해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할 수 없고 그분에게 유기되었다는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고 계시다는 보증이자, 기독교회의 무력함과 어리석음에 절망한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근거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그의 세상에 개입하시며 활동하시는 유일한 방법이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

 

오늘날 한국교회는 표적과 지혜를 구하던 옛 유대인과 헬라인들처럼 (고전 1:22) 그리스도를 힘과 영광과 권능의 상징으로 만들고 숭배하면서 도처에서 추악한 바벨탑을 쌓아 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시고 숨어계신 하나님’을 전파하고 따르는 자들은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스캔들이요,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로 여겨지고 있는 것 같다 (고전 1:23). 만약 오늘날 한국에 루터가 살아온다면 맘몬과 권력과 섹스와 건물을 숭배하는 한국교회에 반대하여 다시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며(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 십자가는 모든 것을 시험한다(Crux probat omnia)’ 라고 외치며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어올리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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