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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저자/마르틴 루터

루터 저작선 (존 딜렌버거 편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펴냄)

by 서음인 2018. 5. 1.

존 딜렌버거가 편집한『루터 저작선』은「그리스도인의 자유」와「교회의 바벨론 포로」그리고「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호소함」등 종교개혁 3대 논문을 포함한 마르틴 루터의 대표적인 글들을 모은 책이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시원을 알리는 이 고전적인 저술들은 하나같이 종교개혁의 정신과 루터 신학의 정수를 잘 보여준다. 또한 에라스뮈스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담은「노예 의지론」같은 글에서는 열정의 아버지(pater exstasicus)라 불리는 ‘싸움꾼’ 루터의 면모를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이들 중 몇몇 흥미롭고 중요한 작품들을 뽑아 간략히 요약해 보기로 한다. 이해와 정리를 위해『루터 연구 입문』 (베른하르트 로제, 크리스챤 다이제스트),『마틴 루터의 신학』 (베른하르트 로제, 한국신학연구소),『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 (박흥식, 21세기 북스),『마르틴 루터 - 새 시대를 펼친 비전의 개혁가』 (스콧 핸드릭스, IVP) 같은 책들의 도움을 받았다.


루터의 라틴어 저작 전집 서문(1545)

생애의 말년인 1545년에 씌어진 이 서문에서 루터는 종교개혁의 발단과 전개 과정, 그리고 그를 종교개혁으로 이끈 유명한 통찰에 이르게 된 길에 대해 회고하고 있다. ‘자기증언’으로 알려진 유명한 단락에 따르면 처음에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의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를 하나님이 율법에 따라 죄인들을 벌하시는 의로 이해하였으며,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던 그는 이 무서운 하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문제로 번민하던 루터는 마침내 ‘하나님의 의’가 율법이 아니라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아무런 공로도 없는 우리를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하신다는 기쁜 소식인 복음 안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이 깨달음은 그에게 “완전히 새롭게 거듭나서 열린 문들을 통해 낙원으로 들어간”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몇몇 학자들은 루터가 비텐베르크에서 95개조 논제를 발표한 1517년이 아니라 이러한 깨달음을 얻었던 1514년을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독일어 성경의 신약서문(1524)

구약은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 그리고 그 계명을 지켰거나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담고 있는 책이며, 신약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음을 담고 있는 책으로서 그것을 믿거나 믿지 않았던 사람들의 기록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다윗의 자손이고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시며,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 및 그분을 믿는 모든 자를 위해 죄와 죽음과 음부를 정복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다.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진 신자는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지만, 선행과 사랑이라는 꽃을 피우지 않는다면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생애를 아는 것이 곧 복음을 아는 것과 동일하지는 않다. 왜냐 하면 그것은 당신이 그분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와 죽음과 마귀를 정복하였다는 것을 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책들(canon within canon)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이적보다 그리스도의 설교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죄와 죽음과 음부를 정복하며 생명과 의와 구원을 주는지에 관한 뛰어난 설명(즉 복음)이 담겨 있는 요한복음과 바울서신, 그리고 베드로전서이다. 그에 반해 이러한 복음을 전혀 담고 있지 않은 야고보서는 ‘지푸라기로 가득 찬’ 서신이라 할 만 하다.


야고보서 서문(1524)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법에 많은 강조점을 두고 있는 가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성경의 다른 책들과 달리 칭의를 행위에 의한 것으로 돌리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수난, 부활, 성령에 대한 가르침이나 회상을 주지 않고 있기에 사도적 저작으로 볼 수는 없다. 성경의 모든 책을 시험하는 참된 시금석은 그 책이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느냐의 여부이며, 그리스도를 가르치치 않는다면 어떤 저자의 어떤 책이라도 사도적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무엇에도 예속되지 않는 참된 자유를 얻고 모든 것을 다스리는 존재이자, 사랑으로 무엇에나 자발적으로 예속되는 종이 되어 모든 것을 섬기는 존재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억압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며, 행위를 통해 의에 이르려는 어떠한 시도도 반드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믿음을 파괴하게 된다. 그러나 “완전한 구원”을 가져오는 참된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자연스럽게 사랑의 행위로 나타나게 되며, 그리스도가 자신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도록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 즉 사랑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이다.

루터의 여러 저술 중에서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 글은 종교개혁의 핵심인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교리와 믿음과 사랑의 적절한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으며, 루터는 이 글을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그의 가르침의 핵심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 루터가 강조한 ‘자유’는 철저하게 내적 ‧ 종교적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었으며, 루터는 후에 이를 근거로 농민전쟁에서 '육적인' 혹은 '물리적인' 자유의 요구한 농민들을 비난한다. 또한 이 논문의 도입부에 붙어 있는「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은 교황과 화해하려는 루터의 마지막 시도 중 하나였으며, 이 서한에서 루터는 자기가 공격한 것이 교황 자신이 아니라 교황권을 둘러싼 불경건한 가르침들과 부패라고 강조하고 있다.


두 종류의 의(1519)

그리스도인의 義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사도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라고 부른 외래적인 의(justitia aliena)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의를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 이 의는 세례를 받을 때와 참으로 회개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주어지며, 우리 자신의 모든 실제적인 의(justitia propria)의 근거이며 원인이며 근원이다. 두 번째 종류의 의는 우리 자신의 고유한 의(justitia propria)로 우리가 홀로 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외래적인 첫 번째 의와 더불어 우리가 그것을 행하기 때문에 두 번째 의가 될 수 있으며, 육을 죽이고 자기와 관련된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가운데 하나님 경외와 이웃사랑과 같은 선한 행실을 하면서 유익하게 보내는 삶의 방식이다. 이 의는 첫 번째 의의 선물이며 열매이며 결과다. 자신의 원한에 대해서는 복수를 행하지 않는 것이 복음적인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길이지만, 공인들은 악한 자들을 처벌하고 판결하고 압제받는 자들을 옹호하고 보호해야 한다.


노예 의지론(1525)

이 글은 ‘자유의지’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는 모호하고 난해한 교리이며, 인간은 은혜 없이도 하나님을 추구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자연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에라스무스의「자유 의지론」에 대한 응답으로 씌어졌다. 단정적인 주장을 너무 싫어한 나머지 가능한 한 회의론자들과 한편이 되고 싶었다는 에라스무스의 말에 대해 루터는 성령은 회의주의자가 아니며(Spiritus sanctus non est Skepticus), 확고한 주장(assertio)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일갈한다. 또한 성경의 내용 중에는 자유의지와 관련된 부분과 같이 난해하고 불분명한 부분이 있다는 에라스무스의 견해에 대해서는 만약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누구도 성경을 이해할 수 없지만(내적 명백성), 기록된 성경 자체는 어떠한 모호함이나 애매함도 없이 명백하다고 주장한다(외적 명백성). 특별히 죄의 권세와 인간 의지의 속박과 하나님 은혜의 주도성과 같은 기초적이고 핵심인 주제에 대해서 성경의 가르침은 모호함 없이 절대적으로 명백하다(성경의 명백성 claritas scripturae).

만약 인간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면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의 공동 작업이 되어, 신자가 부분적으로나마 자신의 업적을 내세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루터는 하나님이 자신의 변치 않고 영원한 뜻에 따라 모든 것들을 미리 아시고 예정하시기에, 사람이나 천사나 어떤 종류의 피조물도 하나님 및 구원과 관련하여 어떠한 종류의 자유의지도 갖지 못한다고 말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유 의지를 가지시며,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굴레에서 풀려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과 감사로서 반응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루터는 인간이 하나님의 의지에 사로잡힌 노예이거나 사단의 의지에 사로잡힌 노예이거나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으며, 참되신 하나님의 포로가 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자유라고 강조한다. 루터가 이 글에서 구사하는 “회의론자와 학구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귐에서 떠나라”든지, “나는 이 책에서 당신이 내게 정확히 ‘자유 의지’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하는지를 말할 때가지 당신과 모든 궤변가들을 못살게 하겠다”같은 격렬한 독설은 꽤 충격적이다.


교회의 바벨론 포로(1520)

「교회의 바벨론 포로」는 성직자와 학자를 대상으로 라틴어로 씌어진 논쟁적이며 신학적인 글로, 외부적 개혁을 다룬「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고함」과 달리 신학 내부 특히 성례전 교리의 개혁을 다룬다. 이 글에서 루터는 교황청이 권력의 근거로서 성례전 교리를 창안하고 악용해 왔다고 비판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포로생활처럼 억압하고 있는 성찬의 세 가지 ‘포로상태’에 대해 언급한다. 그 첫 번째는 성찬시에 평신도에게 포도주를 금한 것이며, 루터는 이에 대해 교회가 그리스도가 정한 것을 임의로 바꾸고 있다고 비난한다. 두 번째는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형상은 그대로 있으면서 그 실체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이며, 이에 대해 루터는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그 안에 담긴다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주장하였다. 세 번째는 미사의 집례가 선행이며 제사라는 생각으로 루터는 이에 대해 미사의 핵심은 성례 자체가 아니라 약속의 말씀이고 미사의 효력은 미사 행위 자체(事效性 opus operatum)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다(人效性 opus operans)고 강조한다.

루터는 온전한 성례전은 언약인 하나님의 말씀과 표지인 성례가 다 존재해야 하며, 따라서 로마 교회의 일곱 성례 중 언약과 표지를 다 갖춘 세례와 성만찬만이 진정한 성례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표지인 성례보다는 언약인 하나님의 말씀에 더 큰 힘이 부여되기에 약속과 신앙을 떠나서 성례의 효력을 구하는 것은 헛수고에 불과하며, 심지어 우리는 말씀과 언약을 표지와 성례 없이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믿어라. 그렇다면 너는 이미 먹었다. Credo et manducasti). 고해는 기본적으로 세례로의 돌이킴이며, 세례의 효력이 상실되어 참회가 필요하다고 암시하는 ‘파선된 제 2의 널빤지’라는 중세에 자주 쓰였던 비유는 전혀 적당하지 않다. 이 글은 당대 가톨릭 신학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루터가 로마 교회와 확실하게 결별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속권세 : 어느 정도까지 복종하여야 하는가(1523)

모든 인류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그룹과 세상 나라에 속한 그룹으로 나뉜다. 전자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참된 신자들로 이들에게는 세속 정부나 법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항상 악을 행하기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세상 나라와 세속법을 주셔서 그 아래 살게 하셨다. 우리는 이 두 나라를 날카롭게 구분하되 둘 다 존속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하나는 경건을 만들어내고 다른 하나는 악을 막아 외적인 평화를 가져오며, 둘 중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가 없이는 이 세상에서 충분치 않다. 세속 정부만 있을 경우 경건이 없을 것이며 영적 정부만 있을 경우 악아 횡행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악과 불의를 감내하고 세속의 권세와 법을 스스로를 위해 사용하지 않아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복수 · 정의 · 보호 · 도움을 구하여야 하고 이런 목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행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세속적인 권세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정부를 침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자신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영혼에 대한 관여를 허용하지 않으신다. 루터는 신앙은 성령 안에서 행해지는 자유한 것이기에 어떤 경우에도 강요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많은 세속 영주들의 권력 남용을 비판한다. 영주는 가능한 한 무력이나 강제력이 아닌 이성과 신중함으로 통치해야 하며, 백성의 보호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 루터의 신약성경 번역의 모든 사본들을 회수하여 소각하라는 작센 공작 게오르그의 요구가 담긴 훈령서에 대한 반응으로 기록된 이 글은 그의 '두 왕국론'을 잘 보여준다.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호소함(1520)

로마 교회가 근본적으로 개혁이 불가능한 3가지 이유는 교황주의자들이 쌓아놓은 3개의 담 때문이다. 첫째는 영적 계급인 성직자들이 세속적 계급인 평신도들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이고, 둘째는 교황만이 최종적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이며, 셋째는 교황이 공의회보다 더 우월하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루터는 일반 성도 위에 영적 계급인 성직자가 자리한다는 가르침은 로마 교회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놓은 기만일 뿐, 실제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계급에 속하며 서로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주장한다(만인사제론).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동등하므로 어떤 그리스도인이라도 성경을 더 잘 이해하기만 하면 교황보다 우선권을 가지며, 좋은 해석을 공의회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한 루터는 만약 영적 권세의 명백한 오류로 인해 더 이상 교회의 개선을 기대하기가 어렵다면 귀족, 즉 사회적 권력을 가진 평신도들이 정치 사회적 책임을 다하여 교회와 사회의 개혁에 동참하거나 주도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생각에 따라 루터는 기독교 세계를 개혁하기 위해 성직자의 성직자들의 과도한 사치, 독신주의, 죽은 사람을 위한 미사, 미신적 유물숭배, 교황의 사죄권 등 기존의 종교적 신념과 실천을 쇄신해야 하며 이를 위해 로마교회와 반드시 결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학적이라기보다는 매우 실제적인 비판과 제언을 담고 있는 이 논문은, 만인사제론을 근거로 평신도들을 교회의 일방적인 통제로부터 해방시키고 교황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급진적이다. 또한 독일어로 씌어진 이 글은 당대 독일의 귀족 뿐 아니라 민중들에게까지 강력한 공감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목차

역자 서문 
독자들에게 
서론: 마르틴 루터 

제Ⅰ부 
루터의 라틴어 저작 전집 서문 
성경과 관련된 서문들 
- 서문 
- 로마서 서문 
- 야고보서와 유다서 서문 
- 시편 서문 
그리스도인의 자유 
두 종류의 의 

제Ⅱ부 
갈라디아서 주석 
노예 의지론 

제Ⅲ부 
요리문답에 관한 설교들, 1528 
라이프치히의 플라이센부르크 성에서의 설교, 1539 
교회의 바벨론 포로 

제Ⅳ부 
세속권세: 어느 정도까지 복종하여야 하는가 
기독교계의 상태 개선에 관하여 독일 민족의 귀족에게 호소함 

제Ⅴ부 
부록 
95개 조항 
하이델베르크 논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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