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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세계/평화전쟁인권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지음, 돌베게 펴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프리모 레비 지음, 돌베게 펴냄)

by 서음인 2016. 6. 1.

1. <이것이 인간인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해 돌아온 프리모 레비(Primo Lewvi, 1919~1987)가 자신의 수용소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처녀작인 <이것이 인간인가>(1947)가 귀환 직후 홀로코스트의 지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을 생생하게 기록한 20세기 증언문학의 고전이라면, 그의 유작이 된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1986)는 40년의 세월이 지난 후 아우슈비츠의 경험에서 우러난 사유를 집대성한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2. 프리모 레비는 이 두 권의 책에서 인류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의 현장 중 하나였던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통해 사악한 권력과 체제에 의해 인간이 얼마나 쉽게 인간 이하로 격하될 수 있는지, 그간 문명세계가 발전시켜 온 ‘인간성’이라는 가치가 얼마나 취약한 기반에 서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끔찍한 범죄가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던 진실을 애써 외면하거나 묵인했던 대다수 ‘일반인’들의 비겁함과 침묵 때문이었으며, 우리가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망각한 채 자유와 평등과 같은 ‘인간성’의 보편적 가치를 부정하기 시작한다면 그 마지막은 또 다른 수용소 체제로의 회귀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3.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국정화’의 요란한 레토릭이 넘쳐나고, 국가와 자본이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압도하며, 대다수 ‘우리' 가 타자의 고통에 철저한 침묵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오늘, 우리가 가는 길이 또 다른 아우슈비츠로 향해 있지 않다고 확실히 장담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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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의 언어로는 이런 모욕, 이와 같은 인간의 몰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거의 예언적인 직관과 함께 현실이 우리 앞에 고스란히 정체를 드러냈다. 우리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밑으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다. 이보다 더 비참한 인간의 조건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우리의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옷, 신발,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빼앗아갔다. 우리가 말을 해도 그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설사 들어준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이름마저 빼앗아갈 것이다. 우리가 만일 그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면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찾아내야만 할 터였다. (바닥에서, 『이것이 인간인가』)

회색지대 당시수용소 내부의 인간관계망도 단순하지 않았다. 그것은 희생자와 박해자의 두 덩어리로 축소될 수 없는 것이었다 ..... 그들 모두가 끔찍하지만 해독 가능한 세계, 곧 내부의 ‘우리’와 외부의 ‘적’이라는 선명한 지리적 경계로 나뉜 세계를 보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입소한 수용소에서 목격한 놀라운 광경은 그들에게 뜻밖의 충격을 던져주었다. 자신이 내던져진 세계는 물론 끔찍한 것이었지만 또한 해독 불가능한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세계는 어떤 모델에도 부합되지 않는 것이었고, 적은 주변에도 있었지만 내부에도 있었다 ...... 우리는 적어도 불행을 함께하는 동료들의 연대감을 기대하면서 수용소에 입소했지만 몇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바라던 동맹은 없었다. 반면에 수천 개의 봉인된 단자들만이 있을 뿐이었고, 이 단자들 사이에는 필사적이고 은밀하고 지속적인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 즉, 수용소에서의 현실에 맞딱뜨린 최초의 충격은 예견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었던 누군가의 공격이었는데, 관리자 포로라는 새롭고 이상한 적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회색지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수치 많은 사람들이 포로생활 중에 그리고 그 후에 수치심, 즉 죄의식을 느꼈다는 것은 수많은 증언들에 의해 확인되고 입증된 사실이다 ....... (1) 어둠에서 나왔을 때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일부를 박탈당했다는 의식을 되찾고 괴로워했다. 원해서도 무기력해서도 아니었고 죄가 있어서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수개월 혹은 수년을 동물적인 수준에서 살았다. 우리의 나날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배고픔과 피로와 추위, 두려움으로 채워져 있었고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기 위한 성찰의 자리는 없어졌다 ....... (2) 인간적 연대감의 측면에서 실패했다는 비난은 더욱 현실적이다. 동료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고 빼앗고 구타한 데 대해 자신이 유죄라고 느낀 생존자들은 소수이다. 그런 일을 한 사람들은 그 기억을 지운다. 그에 반해 거의 모든 사람들은 도움을 베풀지 않은 데 대해 자신이 유죄라고 느낀다. 연대감을 요구하거나 인간적인 말이나 충고 한마디를 구하거나 그저 들어주기라도 바라는 일은 매일 보편적으로 있는 일이었지만, 그런 요구가 충족되는 일은 드물었다. 시간도, 공간도, 개인적인 프라이버시도, 인내심도 기운도 없었다 ...... (3) 다른 사람 대신에 살아남았기 때문에 부끄러운가? 특히 나보다 더 관대하고, 더 섬세하고, 더 현명하고, 더 쓸모 있고, 더 자격 있는 사람 대신에?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각자가 자기 형제의 카인이라는 것, 우리 모두가 자기 옆 사람의 자리를 빼앗고 그 사람 대신에 산다는 것은 하나의 상상, 아니 의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상이 우리의 정신을 갉아먹는 것이다. (수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가라앉은 자들과 구조된 자들 라거(강제수용소)의 ‘구조된 자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메시지의 전달자들이 아니었다. 내가 본 것, 내가 겪은 것은 그와는 정반대임을 증명해 주었다. 오히려 최악의 사람들, 이기주의자들, 폭력자들, 무감각한 자들, ‘회색지대’의 협력자들, 스파이들이 살아남았다. 최악의 사람들, 즉 적자들이 생존했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 반복하지만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 우리 생존자들은 근소함을 넘어 이례적 소수이고, 권력 남용이나 수완이나 행운 덕분에 바닥을 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바닥을 친 사람들, 고르곤을 본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고, 아니면 벙어리로 돌아왔다. (수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존엄 슈티인라우프....의 말은 그런 뜻이었다.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 (입문, 『이것이 인간인가』)

거짓 우리는 압제자 측의 수많은 증언, 시인 등의 자료를 가지고 있다 ..... 그 답변들은 본질적으로 모두 똑같은 내용을 말한다. 즉,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다른 사람들(내 상관들)은 나보다 더 나쁜 일을 저질렀다, 내가 받아온 교육과 살아온 환경을 감안했을 때 나는 다르게 행동할 수 없었다, 내가 하지 않았더라면 내 대신 다른 사람이 더욱 엄하게 했을 것이다 등과 같은 답변이다 .... 그들은 자신이 했던 일이나 당했던 일들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고 다른 것들로 대체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대체는 완전히 의식하고 있는 가운데 지어내고 고친, 허위이지만 현실보다는 덜 고통스러운 어떤 장면으로 시작될 수 있다. 반복해서 그 장면에 대해 묘사하다보니 타인을 물론 자신에게조차 진실과 허구의 구별은 점차적으로 그 경계를 잃게 된다. 결국 인간은, 덜 믿음직스럽거나 서로 앞뒤가 맞지 않거나, 입수한 사건들의 큰 그림과 양립할 수 없는 세부 사항들을 여기저기 갈고 다듬으면서 자신이 거듭 반복해온 그 이야기를 완전히 믿고 만다 .......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데 익숙한 자는 결국 사적인 자리에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한테도 거짓말을 하게 된다. 자신을 평안하게 살도록 해주는 편리한 진실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상처의 기억,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유죄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양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입과 눈과 귀를 닫은 채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기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공범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 (독자들에게 말한다, 『이것이 인간인가』)

용서 그렇지만 노골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으려는 나의 이런 태도가 무분별한 용서로 받아들여지지 않길 바란다. 나는 범죄자들을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 누구도 용서할 생각이 없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리고 너무 늦지 않게) 이탈리아와 외국의 파시즘이 범죄였고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진심으로 비판하고, 그들과 다른 사람들의 의식으로부터 그것들을 뿌리째 뽑아내지 않는 한 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만 나는 용서할 수 있다. (독자들에게 말한다, 『이것이 인간인가』)

기억 수용소는 유럽에서 파시즘이 강세를 떨치고 가장 기괴한 모습을 보일 때 번성했다. 그러나 파시즘은 히틀러나 무솔리니 이전에도 존재했고, 분명한 형태로 혹은 가면을 쓰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 살아남아 있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는 것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결국은 수용소 체제를 향해 가게 된다. 이것은 막기 힘든 과정이다 ....... 불관용과 권력에 대한 욕망, 경제적 이유,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광신, 인종적 마찰 등이 발생시키는 폭력이 난무하는 조류 속에서 미래에 면역성이 있다고 보장할 수 있는 나라는 소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벼리고 있어야 하며 예언자들과 마법사들, 또한 타당한 이유들의 밑밭침이 없는 “아름다운 말들”을 말하고 쓰는 사람들을 믿지 말아야 한다. (독자들에게 말한다, 『이것이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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