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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사회/여성소수자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 (연구모임 사회비판과대안 엮음, 사월의 책 펴냄)

by 서음인 2017. 4. 3.

1.『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은 시몬 드 보부아르에서 깁슨-그레이엄까지 20세기의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저자들과 그들의 이론을 소개하는 국내 학자들의 글 여덟 편을 모은 책이다. 이들은 철학, 문학, 사회학, 경제학,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졌고, 자유주의자이거나 마르크스주의자이거나 급진적 페미니스트이기도 했으며,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거나 여성의 차이를 강조하거나 여성이라는 성차별적 용어 자체를 극복하려고 시도하는 등 다양하고 때로는 이질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그들을 페미니즘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이유는 여성에 대한 차별에 저항하면서 ‘여성 해방’을 추구하려는 ‘인식 주도적 관심’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2. 글쓴이들은 각 학자당 약 40여 페이지 정도의 지면을 할애하여 생애와 이력, 주요 사상과 의의, 그리고 한계와 과제를 이 분야에 대한 사전 지식이 많지 않은 독자도 읽기에 크게 어렵지 않을 정도로 친절하고 깔끔하게 서술한다. ‘가부장제’라는 강고한 관념의 틀을 시원하게 깨뜨리는 풍성한 사고의 향연을 만끽할 수 있는 이 분아의 좋은 입문서이며, 모든 좋은 책이 그렇듯 더 많은 공부에의 욕구를 자극해 ‘또 다른 책을 향해 지갑을 열도록 유혹하는’ 책이기도 하다. 물론 연약한 일개 인간에 불과한 내가 그 압도적인 유혹에 굴복하지 않을 길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가며 이 저자들의 책들을 최소 한권 이상 사고야 말았다. 세상에, 사진에 나오는 저 책더미들을 보라.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2.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여덟 명의 페미니스트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1) 시몬 드 보부아르 (Simone de Beauvoir, 1908~1986) 현대 페미니즘 철학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제2의 성』을 쓴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규정되는 ‘절대 타자’라는 여성의 종속적 지위는 자연적 본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 하에서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며(“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성해방은 실존적 결단과 초월을 통해 타자성을 극복하고 남성과 동일한 상호주체가 되는 ‘자유로운 실존’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함으로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성차별을 금지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 뿐 아니라 여성의 경제적 자립이나 낙태나 피임의 합법화를 통한 ‘자유로운 모성’의 사회적 인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2) 뤼스 이리가레 (Luce Irigaray, 1930~ ) 벨기에 태생으로 문제작인『검경』을 포함한 많은 책을 저술하며 현재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는 남성이라는 하나의 주체와 하나의 성만 허용해 온 남성중심적 서구사회를 비판하면서 여성들이 ‘남성을 위한 타자’라는 지위에서 벗어나 ‘여성적 주체로서의 타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를 위해서는 여성을 정의하는 남성적 담론의 질서에서 벗어나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방식으로 여성의 신체와 섹슈얼리티를 상징화하는 새로운 상징체계를 발견하고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환원불가능한 성차’를 가진 남성과 여성은 한 성이 다른 성으로 환원되거나 예속됨이 없이 각자가 주체이면서도 각자에게 타자가 되어 서로 마주해야 하며, 이를 통해 ‘차이를 통한 주체적 되기’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3) 샌드라 하딩 (Sandra Harding, 1935~ ) 『페미니즘과 과학』『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의 저자인 미국의 과학철학자 샌드라 하딩은 과학이 세상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를 생산하지만 동시에 인종, 계급, 성별에 따른 배제를 제도화하기도 한다고 주장함으로서 페미니스트 입장론(feminist standpoint theory)의 관점에서 과학의 가치중립성과 서구 백인 엘리트 남성 중심의 과학을 비판하며, 여성들의 삶의 관점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지배계급/문화/인종/남성들의 삶에 근거한 지식을 비판하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기술에 베어있는 편파성과 왜곡을 줄이게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페미니스트적 입장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담론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기에 여성 뿐 아니라 남성이나 백인과 같은 다른 인식주체들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포스트모던 입장론).


(4) 캐롤 길리건 (Carol Gilligan, 1936~ ) 미국의 도덕심리학자 캐롤 길리건은 현대 여성주의의 고전으로 손꼽히는『다른 목소리로 : 심리 이론과 여성의 발달』에서 인권의 상호성과 평등성, 인간 존엄성의 원리인 ‘정의(justice)의 원리’를 도덕발달의 최종 단계로 상정하는 로렌스 콜버그의 도덕발달론이 여아들의 도덕발달에 부합하지 않는 남성중심적 이론이라고 비판하며, 이러한 ‘정의의 윤리’는 돌봄과 관계와 책임이라는 보편적 인간성에 기초한 여성주의적 윤리(feminist ethic)인 ‘돌봄(care)의 윤리’와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아무리 제도적인 민주주의가 확립된 사회라 할지라도 자신과의 단절(dissociation)과 분리(disconnection)를 강요하는 가부장체제가 삶과 의식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진정한 민주주의가 성취될 수 없다고 경고한다.


(5) 엘렌 식수 (Helene Cixous, 1937~ ) ‘여성적 글쓰기’의 대표적 이론가로 문제작『메두사의 웃음』과『새로운 여성의 탄생』의 저자인 엘렌 식수는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부과하는 가장 큰 억압은 메두사의 신화에서 잘 나타나듯 여성의 몸 특히 여성의 性에 대한 억압이며, 여성적 글쓰기는 이항대립에 기반한 말중심주의(logocentrisme)와 남근중심주의(phallocentrisme)를 타파함으로서 여성의 몸과 여성성을 해방하기 위한 도구라고 주장한다. 저자에 의하면 이러한 여성적 글쓰기는 ① 여성의 성적 특질이나 ② 타자에 대한 수용성 ③ 법에 대한 거부와 같은 여성적인 자질들을 글쓰기 속에 도입하는 과정이며, 이것은 구체적으로 ① 체계화를 거부하며 중심과 주변이 따로 없는 글쓰기나 ② 기존의 질서에 구멍을 내는 전복적인 글쓰기라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6) 아이리스 매리언 영 (Iris Marion Young, 1949~2006) 시카고 대학 정치학과 교수이자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주의 철학자였으며『정의와 차이의 정치』『정치적 책임에 관하여』의 저자인 아이리스 매리언 영은 기존의 정의론이 지나치게 ‘분배 패러다임’에 치우치면서(‘분배 중심의 정의론’) 많은 사회적 부정의들을 축소하거나 간과하고 다양한 정치적 요구들을 제기하는 사회운동들과의 실천적 연관성을 상실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정치의 과제는 모든 사회적 삶의 영역에 존재하는 부정의인 ‘지배’와 ‘억압’을 극복함으로서 모든 사회 성원들의 자기 개발과 자기 지배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대안적 정의론의 실현을 위해서는 사회적 집단 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차이의 정치(politics of difference)’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7) 주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 1956~ )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비교문학 수사학과 교수이자 포스트모던 여성주의자로 대표작인『젠더 트러블』을 통해 학계의 팝스타로 떠오른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뿐 아니라 섹스(몸) 역시 다양한 담론의 효과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적 구성물’라고 주장함으로서 섹스를 젠더로 해체해 탈자연화하며, 여성과 남성의 구분 및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조차도 권력 담론의 일부라고 규정함으로서 성 정체성이라는 범주 자체의 해체를 시도한다(급진적 구성주의). 여기서 문화적 구성물이자 정치적 다툼의 산물인 ‘젠더’의 의미는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실천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지속적으로 새롭게 구성되며(“젠더는 원본 없는 모방이다”), 결국 문화적 헤게모니 담론으로까지 도약하게 된다.


(8) 깁슨-그레이엄 (J.K. Gibson-Graham) 『그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 『포스트자본주의 정치학』과 같은 책을 공동으로 저술한 페미니스트 경제지리학자인 줄리 그레이엄과 케서린 깁슨은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이 자본주의를 유일하고 통일적이며 총체적인 소위 ‘대문자 자본주의(Capitalism)’로 담론화함으로서 이 체제를 벗어나는 자본주의의 외부를 상상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차이의 논리’라는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대안적 시장 및 비시장 거래, 대안적 지급 및 미지급 노동, 대안적 자본주의 기업 및 비자본주의적 기업과 같이 ‘대문자 자본주의’의 외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비자본주의의 유령들’, 혹은 ‘소문자 자본주의들’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들 중 공정 우리사주조합, 소액주주운동,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운동과 같이 공동체 경제의 지향성을 가지는 운동을 비자본주의적이고 대안적인 여성주의 정치경제학의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이 책을 읽은 내 결론은 이렇다.


(1) 세상에는 단 하나의 페미니즘이 아닌 수많은 페미니즘‘들’이 존재한다.

(2) 차이와 다양성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이다.

(3) 단 하나의 페미니즘만을 알고 있는 사람과는 논쟁하지 말자.

(4) 마찬가지로 단 하나의 기독교만 알고 있는 사람과도 부딪히지 말자.

(5) 세상은 넓고 해야 할 공부는 많으며, 읽어야 할 책은 끝이 없다.

(6) 굳어진 머리를 망치로 내리쳐주는 책이야말로 최고의 친구다. 



지갑을 열게 하는 아주 나쁜(?!) 책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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