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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성서학

단숨에 읽는 바울 (존 M.G. 바클레이 지음, 김도헌 옮김, 새물결플러스 펴냄)

by 서음인 2019. 7. 16.

단숨에 읽는 바울 - 바울의 역사와 유산에 대한 소고는 최근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바울과 선물의 저자이기도 한 더럼대학교 석좌교수 존 바클레이가 쓴 150여 페이지 남짓 되는 작은 바울 개론서다. 저자는 1부인 역사에서 1세기에 살았던 문제적 인물인 역사적 바울과 그의 이름으로 기록된 서신들을 당대의 역사적 사회적 정황 안에서 입체적으로 조명하며, 2부인 유산에서는 초대교회 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학자들이 바울을 어떻게 이해했고 그 이해가 서구의 신학과 문명에 어떤 영향을 끼쳐 왔는지 살핀다. “무성한 잔가지를 제하여 밑둥만 남겨놓고 이것이 원 바울(the original Paul)이라고 주장하기보다, 2000년 동안 쌓인 바울 해석이라는 웅장한 나무 전체를 소묘하는 책이라는 (전) 한일장신대 박영호 교수의 소개가 이 책에 대한 가장 정확한 평가가 될 것 같다


저자에 따르면 바울은 단 하나의 그림에 담거나 한 가지 방식으로 해석하기에는 너무나 다면적인 인물이며, 다의적이고 모호한 바울의 서신들은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창의적인 번역과 새로운 해석들을 생성해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유연하다. 따라서 저자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 앞으로도 다양한 시대적 문화적 문맥에 처한 해석자들이 바울의 서신에서 사람들을 구원과 해방으로 이끌며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새로운 방식으로 끌어낼 수 있으리라고 결론내린다.  대가의 품격이 느껴지는 좋은 책이지만 광범위한 주제를 작은 분량 안에 압축해 담고 있어 저자의 논지를 제대로 따라가려면 어느 정도의 선이해와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하다. “초심자도 한 권으로 마스터하는 바울류의 책이라기보다는, 개론에서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진지한 탐구자가 한 번쯤 거쳐가야 할 만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내용을 요약해 앞으로의 바울 연구에 길잡이로 삼기로 한다



1부 역사



1.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 안에서의 바울

 

바울은 유대인 지성인이자 순회 수공업자였으며 나사렛 예수에 대해 새롭고 파격적인 주장을 펼치는 선전가였다. 그는 처음에 예수 운동을 격렬히 반대했지만, 그의 그가 믿었던 전통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바뀌어 예수를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경륜의 중심이자 성취로 간주하게 되는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통한 급진적인 회심을 겪은 후 비유대인들에게 이 운동을 널리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 그는 지중해 북부의 여러 도시들을 순회하며 교회들의 관계망을 구축하고 활성화했으며, 그들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써 보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세운 몇몇 교회에서 버림받았고, 유대교 성향의 예수 운동가들의 분노를 일으켰으며, 자신의 동족들로부터 반대를 받았고, 결국에는 로마 당국에 의해 죄수의 몸이 된 끝에 로마에서 처형됨으로서 삶을 마감했다그러나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확정된 비유대인 신자들이 유대교의 주요 관습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바울의 주장은 이 운동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다양한 문화에 적응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또한 그는 사상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그의 편지들을 통해 기독교 사상과 서구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2장 바울의 편지들과 그 역사적 정황들

 

바울에 관련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그의 편지뿐이다. 이 편지들을 통해 바울의 생각과 성품에 대해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으며, 1세대 그리스도교가 직면했던 도전들을 파약할 수 있다. 또한 이 편지들은 초기 그리스도교 안에서 가장 창의적인 사상을 반영하며, 후대 그리스도교 사상의 주된 기초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바울의 편지들을 선교 및 그 네트워크가 남긴 잔여물이며, 바울의 사상들을 체계적으로 담고 있지 않다. 이는 바울이 상황 대응적(situational) 사상가이며, 조직신학자라기보다는 실천신학자에 가깝다는 의미다


바울의 편지들이 수집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죽은 후에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그의 편지들에  권위가 주어졌음을 의미하며, 사람들은 새로운 위기 상황에서 그의 편지들을 인용하거나 그의 이름으로 새로운 편지를 작성하는 방식으로 바울의 편지들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고 발전시켰다. 바울의 저작권을 판단하는 기준은 세 가지 근거, 즉 ① 스타일과 문체  역사적 정황  신학적 내용이며, 이에 따라 '바울의 편지들'은 (1) "역사적 바울의 편지"와 (2) "역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바울의 편지"(2 바울 서신)으로 나뉜다. 오늘날 대부분의 비평적 역사학자들은 데살로니가전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로마서만 그의 '진짜' 편지로 간주한다


3장 바울과 유대 전통

 

바울은 유대 전통 안에 속해 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도래했다는 확신을 가진 이후부터는 그의 독특한 해석을 전개해 나갔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경전을 놀랄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했지만① 오직 한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우상을 만들지 않으며 ② 특별한 음식규정과 안식일을 지키고  남성에게 할례를 행하는 관습에 의해 다른 민족들과 구분되었다. 바울은 우상숭배에 관해서는 다른 유대인들처럼 비타협적이었으나, 음식법이나 안식일 준수, 할례와 같은 '정체성 표지'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신앙과 관계없는 부분이라고 선언했다무엇보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그의 가치체계와 유대전통에 대한 해석 방향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1)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기점으로 전적으로 바뀌었으며,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비추어보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결코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2) 바을은 그리스도 사건을 경험한 이후 이스라엘 역사와 세계 역사를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구약에서 복음의 메아리들을 발견했고, 현재를 마지막 시대의 시작으로 이해하게 되었으며, 역사의 종말에 대한 이미지들이 재림할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될 것으로 기대했다. (3) 바울은 인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조건 없이 주시는 은혜를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자격 없는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는 하나님의 은혜가 온 천하에 만연해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바울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과 유대 전통의 재편성 및 경계를 뛰어넘는 이방인 선교 경험은 동시대의 유대인들에게 깊은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신앙과 실천이 유대 유산과 일관성이 있다고 보았지만 한편으로 동시대의 유대 관습을 상대화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바울의 애매모호함은 당대에도 많은 비판과 혼란을 초래했을뿐 아니라 그 이후 수세기 동안 상반된 해석과 다양한 논쟁을 낳았다.

 

4장. 로마 세계에 위치한 바울의 교회들

 

자신의 좋은 소식에 반응하여 개종자들이 생겨날 때마다 바울은 신자들로 구성된 작은 공동체들을 세웠는데 그는 이 공동체를 '에클레시아이'라고 불렀다. 이 모임은 주로 가정에서 모였고 그 숫자가 30명을 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그 구성원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안정적인 수입 없이 최저 생활을 유지하며 살았다. 이 작은 모임들은 가정과 도시와 제국이라는 당대의 환경에 그리 잘 적응하지 못했다그러나 이렇게 당대 세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저항하고 박해받았던 '에클레시아이'는 궁극적으로 로마 문명이라는 거대한 체계를 완전히 전복시키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1) 바울은 가정생활과 관련해 미혼을 옹호하는 신학적 실천적 주장을 다양하게 전개했지만, 결혼 자체를 반대하거나 결혼한 사람에게 이혼을 부추기지 않았다. 또한 가정규범은 주인과 남편과 부모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하지만, 모든 인간의 권위를 그리스도의 통제 우월한 통제 아래 둔다. 이는 당대 그리스도인 가정에 당장 급진적 변화를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속한 더 넓은 사회가 추구하던 중요한 가치와 기대를 무너뜨릴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2) 바울이 세운 교회의 구성원은 대부분 비유대인들이었고 그들이 유대인들과 대립할수록 로마 세계에서 점점 더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유대교처럼 전통적이고 민족적인 명분이나 제국의 공식적 허락이 없는 상태에서 시민 종교 제의에 대한 참여를 거부하는 것은 사회생활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했고, 심지어 정치적인 반역행위로 의심받을 소지도 다분했다. (3)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어떤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다른 형태의 우상숭배와 마찬가지로 로마 종교와도 타협할 수 없었으며, 이는 바울의 처형과 그리스도인에 대한 지속적인 박해의 계기가 되었다


5. 바울의 초기 이미지들

 

바울은 강한 의견의 소유자이자 그의 적대자들과 적나라한 비판과 언쟁을 벌일 수 있는 대단한 논쟁가였으며,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 시초부터 극단적으로 평가가 갈렸던 인물이었다. 바울 자신도 이에 대해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여러 편지에서 자신을 많은 상처를 안고 자유와 진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투사이자, 고난받는 사도요 순교자로 묘사했다. 이러한 이미지는 박해받는 것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졌던 초기 그리스도교의 열렬한 분위기 속에서 그를 영웅처럼 보이게 만들었으며, 이렇게 영웅화된 바울의 모습은 그를 복음의 메시지를 탁월하게 전하는 담대한 설교자요, 놀랄 만한 기적을 일으키는 자요, 복음의 진리를 위해 고난과 죽음을 무릅쓰는 순교자로 그리는 사도행전에서 가장 잘 구현되었다.

 

또한 편지 쓰는 자로서의 바울의 이미지는 다른 이들이 그의 이름으로 새로운 편지를 작성함으로서 새롭게 발전되어 나갔다. 바울의 이름을 빌린 위명의 편지들은 ① 기존의 편지들의 메시지를 발전시키거나(데살로니가후서), ② 그의 메시지를 지역적인 위기 상황에 한정되지 않는 형태로 일반화하거나(에베소서), ③ 바울의 권위에 의지하기 위해 특정 공동체를 지도하는 인물로 의인화했다(디도서와 디모데서). 그리고 이는 바울에 관한 기존의 이미지를 강화하거나, 급진성을 희석(가정규례)하거나 더 급진적 인물로 묘사(테클라 행전)하는 등의 방식으로 바울에 대한 새롭고 다양한 이미지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바울을 2세기 버전의 그리스도교 영웅으로 묘사한 마르키온의 급진적인 순수 바울주의에 당황했던 이레니우스나 테르툴리아누스같은 교부들은 바울을 신뢰할 만한 사도이긴 하지만, 여러 사도들 중의 하나에 불과한 인물로 그림으로서 거대한 성경적 모체로부터 그의 신학을 분리하려는 시도를 차단했다. 단 하나의 그림에 담거나 한 가지 방식으로 해석에기에 너무나 모호한 인물이었던 바울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거의 모든 사람이 원하는 인물이 되었으며, 이로서 장차 오랜 세월에 걸쳐 그리스도교 신학과 역사를 통해 꾸준히 나타나게 될 각양각색의 바울들을 전시하게 될 무대가 세워지게 되었다.      



2부. 유산



6. 경전으로서의 바울

 

바울의 편지들은 모호한 표현들과 상황적(situational) 성격으로 인해 초기부터 해석상 논란의 여지가 많았으며 이미 2세기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편지가 점차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에서 성경의 지위를 가진 권위 있는 글이 되면서, 사람들은 바울의 편지들 사이에서와 정경의 다른 부분과의 관계에서 내적 일관성을 기대했고 그의 편지를 해석하는 사람들의 현 상황에도 발언해 주기를 요구하게 되었다


(1) 바울이 그의 편지들을 통해 남긴 가장 큰 족적은 구원의 내러티브를 서술한 범위와 개인적 사회적인 수준에서 그 의미를 해석하는 깊이에 있다. 바울의 구원 시간표는 태초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에까지 이르며, 구원의 영역은 우주 전체의 해방에 이르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성경 전반에 걸쳐 구원의 교훈을 찾아내 이방인 개종자에게까지 적용한 그의 탁월한 능력은 후대 독자들에게 결정적인 해석학적 실마리를 제공한다(2) 이러한 비전의 크기에 상응하는 것은 인간이 처한 곤경을 파악하는 그의 분석력의 깊이다. 그는 라는 용어를 상황에 따라 특정한 위법행위들이나 인류를 사로잡는 어떤 세력을 가리키는 데 사용했으며,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다양하게 해석되어 온 죄 이해의 뿌리에는 로마서에 압축된 바울의 담론이 자리잡고 있다.  


(3) 바울은 구원과 관련된 수많은 핵심적인 은유를 제공했다. 칭의(사법), 속량과 해방(노예제), 속죄(제사), 축복, 생명, 입양, “그리스도에게로의 참여 등 바울의 은유는 구원의 의미를 탐구할 수 있는 커다란 보고를 제공했다. 서구 그리스도교 전통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제의적이고 사법적인 은유에 크게 의존해 왔으며, 동방교회 전통에서는 변화와 갱생의 은유가 지배적이었다. 구원 및 이에 따른 인간의 자아실현에 대한 바울의 용어는 스토아학파에서 실존주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철학적 관점과 잘 조화를 이룰 정도로 적응력이 뛰어나다(4) 그의 편지들의 목회적 측면 도덕적이고 실천적인 교훈들 은 수세기에 걸쳐 설교자들과 교회 개척자들에게 끊임없는 자원을 제공해줄 만큼 심오하고 광범위하다

 

7. 아우구스티누스와 서구 교회

 

아우구스티누스는 서구의 바울 해석 전통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중세 및 종교 개혁이 제시한 바울 해석은 거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우리가 처한 보편적 곤경은 외부의 세력에 의해 부과된 것이 아니라 아담 이후 출산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유전되어 내려오는 원죄의 결과다. 그리고 이 죄의 본질은 불순종이며 그 기원은 인간 내면에 깊이 뿌리박힌 교만과 자기 의존성의 욕구, 즉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바램과 하나님 대신 자신에게 공로를 부여하려는 욕구다. 이에 따르면 바울이 정죄한 율법의 행위역시 유대인의 문화적 관습 자체가 아니라 그 관습을 이행하는 데 수반되는 교만한 태도를 의미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바울의 복음의 핵심은, 단순히 선물이나 호의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나 의지 안으로 깊이 파고든 하나의 세력인 '은혜'다. 인간은 죄로 인해 비뚤어진 의지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심어주지 않는 한 절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급진적인 '은혜' 이해를 바탕으로 점차 선택예정에 대한 사상을 발전시켰다. 비록 이와 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바울 이해가 성경의 다른 본문들과 상당한 긴장을 초래했고 후대의 여러 신학자들도 일부 극단적인 견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지만, 그가 바울에 근거해서 은혜가 그리스도교 교리와 삶의 중심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 도전장을 내민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 하에 바울은 서구 신학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으며, 지성과 체계적인 일관성을 두루 갖춘 신학자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바울을 조직신학자로 보는 것에 반대하는 최근 일부 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바울 해석이 바울 자신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먼 자아와 의지 그리고 양심에 관한 질문을 그에게 강요하는 시도착오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유산에 동의할지 여부와 상관없이, 그가 바울과 함께 깊이 나눈 대화가 풍요롭고 심오했을 뿐 아니라 서구 신학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8. 개신교 전통 안에서의 바울

 

루터는 바울에게서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이분법적 대비를 발견했다. 율법은 우리의 깊은 죄성을 드러내면서도 우리를 그 곤란한 처지로부터 구할 수 없는 정당한 하나님의 요구를 나타내는 반면, 복음은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셨으며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만 하면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는 기쁜 소식이다. 또한 루터는 바울의 극도로 개인적인 언어를 따라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죽으셨다(2:20)는 사실을 개신교 영성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성직이나 선행을 통해 하나님의 호의를 얻으려 안간힘을 쓰기보다, '은혜'를 통해 얻은 자유를 활용해 보상을 바라지 않으면서 자발적으로 이웃을 섬기고, 모든 소명(직업)을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봉사의 장으로 여겨야 한다고 믿었다.

 

장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바울의 렌즈를 통해 성경의 여러 신학을 종합하는 작업을 완수했다. 칼뱅은 바울의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대비를 역사의 총체적인 윤곽을 보여주는 데 활용하였으며, 그 윤곽 안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계시될 것으로 고대했다고 이해했다. 또한 칼뱅은 신자들에게 강한 확신을 주려는 의도로 고안된 강력한 선택교리를 발전시켰다. 그는 루터가 강조한 칭의의 은혜 뒤에 성화의 은혜를 추가했는데, 이는 영적 훈련과 성장을 추구하는 신자의 삶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영국과 미국 개신교 영성의 핵심 요소였던 청교도적인 자아성찰, 일상의 영성 훈련, 영적 성장에 대한 관심 등은 칼뱅의 바울 해석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바울에게 핵심적인 역할을 부여한 이후 복음서를 포함한 성경 전체와 그리스도교 신학 전체를 바울의 관점에 세우려는 시도는 개신교 신학의 특징이 되었다. “진리를 위해 외롭게 싸우는 투사라는 바울의 이미지는 개신교 안에 자리 잡게 된 논쟁과 분열의 정신을 확산시켰으며,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루터와 칼뱅의 생각은 두 왕국’(분리)경건한 사회’(통합) 이라는 상반된 태도로 나타났다. 바울서신에 담긴 다양한 내용은 서로 다른 유형의 교회가 탄생하는 데 영감을 주었으며, 은사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 계통의 개신교 전통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바울의 은혜신학에 대한 개혁자들의 강조는 죄인들에게 값없이 주어진 구원에 대한 감사라는 개신교 영성의 핵심을 직조했고, 복음주의의 확장과 세계선교 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9. 유대교-그리스도교 관계 안에서의 바울

 

바울이 그의 동족 유대인들과 맺었던 관계는 지속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깊고 심각한 문화적 정치적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다. 바울의 편지 안에는 유대교그리스도교간의 구별을 예시하는 듯 보이는 본문이 있는가 하면, 바울이 유대인들에 대한 염려를 열정적으로 표현하면서 그들을 자기 동족으로 여기는 본문들도 있다. 유대교-그리스도교의 관계와 관련된 그의 유산은 엄청나게 다양한 해석을 모두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모호하며, 이 문제와 관련해 현재 벌어지는 여러 논쟁은 단지 바울 해석의 다양성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전통의 핵심이 무엇인지에 대한 다른 신학적 담론을 대변한다.

 

바울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1) 초기 교회에서는 이를 새 언약에 의해 대체된 제사, 음식법, 할례 등 옛 언약의 규정들인 유대인들의 의식 행위(ritual practice)로 해석했으며, 바울은 유대 전통과 결별을 선언한 인물로 그려졌다. (2)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행위에 수반되는 자랑”, 즉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교만을 겨냥한 것으로 이해했다. (3) 루터는 율법의 행위를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데 필요한 것으로 오해한 선한 행위로 해석했으며, 유대교를 행위에 의한 의와 자기 구원을 추구하는 종교로 규정했다. (4) 19세기의 자유주의 개신교인들은 바울을 유대교의 족쇄로부터 그리스도교를 해방시킨 중심인물로 치켜세웠으며, 영적이고 보편적인 성향인 그리스도교가 혈통과 예전이라는 육적 속박에 얽매여 유럽 문명의 영적 진보를 가로막는 유대교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 1960년대에 들어서 1세기 바울의 관심사와 16세기 종교개혁의 문제의식을 구별하는 해석이 등장했다. 바울은 한 번도 유대교를 떠난 적이 없었으며, 그가 소명이라고 묘사한 것은 개종이 아니라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라는 위임이었다는 것이다("유대적 바울"). (6) E.P. 샌더스는 유대교가 율법 준수에 관심을 둔 것은 행위에 의한 의를 통해 언약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getting in)가 아니라, 은혜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미리 주어진 언약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staying in)였다고 주장했다(“언약적 율법주의”). (7) 제임스 던과 톰 라이트로 대표되는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은 이 논쟁이 1세기 당시 바울의 이방인 선교라는 구체적 역사적 문맥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울이 반대한 것은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개인적 율법주의가 아니라, 할례나 안식일 규정 같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해 주는 율법의 행위(경계 표지”)를 충실히 지켜 언약적 지위를 유지해야만 의로워질 수 있다는 유대인들의 민족적 배타주의였다는 것이다.

 

10. 사회-문화적 비평가로서의 바울

 

바울의 신학은 극단적인 양극성으로 가득 차 있으며, 상반된 개념들을 놀라우리만큼 역설적인 방식으로 다룬다. 이러한 역설들은 단순히 언어유희가 아니라 이미 정해진 용어의 의미를 뒤엎고 가치의 정상적인 순위를 뒤집으며 현실을 이례적인 각도에서 봄으로서 새로운 의미 구조를 드러내는 바울의 특별한 능력을 보여 준다. 바을 신학의 이러한 급진적 성향은 지난 몇 세기 동안 니체나 바르트를 포함해 자신들의 문화적 유산을 재상상하고 재구성하려는 이들을 매료시켰으며, 야콥 타우베스 · 슬라보예 지젝 ·조르조 아감벤 · 알랭 바디우 같은 현대 유럽 철학자들은 바울이 현대 사회의 정치적 문화적 난관을 뚫고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게 해줄 사상가라는 사실을 재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이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것만큼 급진적인 사회를 추구하는 이들을 실망시킬 수도 있으며, 이런 실망은 전형적으로 바울이 현대적이며 자유주의적인 입장을 대변하리라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에서 비롯된다. 노예제도 문제나 성(sex), 또는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와 관련된 논쟁에서 알 수 있듯 바울의 주장은 기존 질서에 대해 급진적인 변혁을 주장하지는 않으며, 따라서 전통적 관습과 대의명분을 대변하는 데 가장 자주 활용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의 사고 안에 동시대 대다수의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기존 질서나 전통적 개념들을 뒤엎을 힘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바울 서신들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말하지않는다. 오히려 그 본문들은 인간 해석자들에 의해 목소리와 영향력이 주어지며, 이들은 불가피하게 자신의 문화적 정치적 의제에 따라 본문들을 선별하고 우선순위를 메기며 담론화한다바울 서신의 다의성과 유연성과 모호함은 우리에게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다의적이고 모호한 바울의 본문들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창의적인 번역들과 새로운 해석들을 생성해낼 만큼 충분히 열려 있기에, 다양한 시대와 문화적 문맥에 처한 해석자들은 그 메시지 안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사람들을 해방시키며 구원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새로운 방식으로 끄집어낼 것이다

 


목차


연표 

1부 / 역사 

1장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 안에서의 바울 
2장 바울의 편지들과 그 역사적 정황들 
3장 바울과 유대 전통 
4장 로마 세계에 위치한 바울의 교회들 
5장 바울의 초기 이미지들 

2부 / 유산 

6장 경전으로서의 바울 
7장 아우구스티누스와 서구 교회 
8장 개신교 전통 안에서의 바울 
9장 유대교-그리스도교 관계 안에서의 바울 
10장 사회-문화적 비평가로서의 바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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