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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예술/음악

첼리스트 카잘스, 나의 기쁨과 슬픔 (앨버트 칸 엮음, 김병화 옮김, 한길아트 펴냄)

by 서음인 2019. 7. 31.

첼리스트 카잘스, 나의 기쁨과 슬픔은 저술가이자 사진작가인 앨버트 칸이 20세기를 빛낸 위대한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였던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876~1973)의 구술을 정리해 그려낸 카잘스의 한 초상이다. 1876년 에스파냐 카탈루냐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197397세의 나이로 서거한 카잘스는 이 책에서 어린 시절에서부터 전쟁 전의 좋았던 황금기(La belle époque)를 거쳐 1,2차 세계대전과 에스파냐 내전, 그리고 전후의 냉전기에 이르는 격동의 세월을 통과하며 삶과 음악의 여정 가운데 겪어야 했던 기쁨과 슬픔, 영광과 고난을 담담한 어조로 회고한다.

 

카잘스는 15세 때 바르셀로나의 고악보점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우연히 발견해 8년간 매일 공부하고 연습한 끝에 세상에 내놓음으로서 첼로의 구약성서로 재탄생시켰으며, 과거의 주법을 답습하는 대신 자신만의 새로운 주법을 개발하여 첼로의 표현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 위대한 첼리스트였다. 또한 그는 음악에서 매일매일 새롭고 놀라운 경이를 발견했고, 한 음 한 음을 존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면서 평생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훌륭한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 뿐 아니라 카잘스는 음악이란 특정인의 것이 아닌 만인의 것이어야 하며, 음악가의 임무란 동료 인류의 행복과 평화에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자신을 민중의 일원이자 예술이라는 작업에 종사하는 일종의 육체노동자라고 생각했으며, 평생 조국인 에스파냐의 파시스트 정권에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반핵 평화운동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했던 공화주의자이자 인도주의자였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이렇게 위대한 음악가이자 훌륭한 인간이었던 카잘스의 진면목을 다양한 사진과 생생한 진술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삶과 음악, 그리고 신념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 잡으면 좀처럼 놓기 힘들 정도로 흡인력이 있다. 또한 음악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사라사테, 알프레드 티보, 자크 코르토, 호르초브스키, 요제프 시게티, 루돌프 제르킨, 알렉산더 슈나이더와 같은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과의 일화나 친분에 대한 재미있는 회고에 귀가 솔깃해질 것이다. 전쟁과 폭력으로 점철된 20세기에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모독은 곧 나에 대한 모독"이라고 외치며 음악을 통해 정의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했던 이 위대한 마에스트로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종교와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 증오와 혐오를 전파하는 21세기 한반도에서도 아직 그 적실성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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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시작    지난 80년간 나는 하루를 똑같은 방식으로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피아노로 가서 바흐의 프렐류드와 푸가중 두 곡을 칩니다. 그것 말고 다른 방식으로 일과를 시작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어요. 그것은 이 세계를 재발견하는 것이고 내가 이 세계의 일부분이라는 데서 오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의 기적에 대한 깨달음과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에서 느끼는 믿을 수 없는 경이로움으로 나를 가득 채워줍니다. 내가 들어온 이래 그 음악은 한번도 똑같은 적이 없었어요. 매일매일 그것은 무언가 더 새롭고 멋지고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흐입니다. 자연도 그렇지만 바흐는 하나의 기적이에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우리는 부두 가까이에 있는 어떤 고악보서점에 들렀습니다. 나는 악보 뭉치를 뒤져보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오래돼 변색되고 구겨진 악보 다발이 눈에 띠었습니다. 그것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를 위한 모음곡이있습니다. 첼로만을 위한 곡이라니! 나는 놀라서 그걸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어떤 마술과 신비가 이 안에 숨겨져 있을까? ........  그때까지는 어떤 바이올리니스트나 첼리스트도 바흐의 모음곡을 전곡으로 완주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걸 하나의 전체 음악으로 연주했습니다. 반복 부분까지 모두 연주해야 비로소 놀라울 정도의 전체적인 짜임새가 완성되고 모든 악장의 속도와 구조, 건축적인 구조와 예술성이 완성됩니다. 그 곡들은 학술적이고 기계적이며 따뜻한 느낌이 없는 작품이라고 여겨져 왔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그 곡은 그렇게 폭넓고 시적인 광휘로 가득 차 있는데 그걸 어떻게 차가운 곡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 특징들은 바흐의 본질 그 자체이며, 또 바흐는 음악의 본질입니다. 

 

고통과 음악     주위의 모든 것에서 나는 고통과 가난, 비참함과 인간에 대한 인간의 비인간적인 태도의 증거를 보았습니다. 나는 더 이상 음악에만 빠져들 수 없었습니다. 그때, 그 후도 마찬가지였지만 음악, 아니 어떤 형태의 예술이든 그 자체로는 대답이 될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음악은 어떤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그 자체보다 더 큰 어떤 것, 즉 인간성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사실 현대음악에 대한 내 의견, 인간성이 결여되었다는 평가의 핵심에는 위와 같은 판단이 들어 있습니다. 음악가도 인간이잖아요. 그의 음악보다는 삶에 대한 그의 태도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또 그 두 가지가 서로 분리될 수도 없고요.

 

나는 공화주의자입니다   나는 언제나 왕실 가족들을 사랑했고 그들에게 입은 은혜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군주제도나 궁정생활 일반에 대한 내 태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거기에 속하지 않았고 그곳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세계였습니다. 나는 평민들 사이에서 자라났고 그들과 나는 언제나 같은 부류입니다. 선천적인 성향과 후천적인 교육에 의거하여 나는 공화주의자가 되었어요. 그리고 또 나는 카탈루냐인이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 사실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 내가 예술가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술을 실현하는 과정을 보면 나도 역시 하나의 육체노동자입니다. 나는 일생 내내 그래왔어요. 

 

드레퓌스 사건     나는 이 모든 일들에 소름이 끼치고 넌더리가 났습니다. 예술가들이란 상아탐 속에 살면서 동료 인간들의 고통과 투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지요. 나는 그런 생각에 한 번도 동의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모욕은 곧 나에 대한 모욕입니다. 예술가라고 해서 인권이라는 것의 의미가 일반 사람들보다 덜 중요할까요? 예술가라는 사실이 인간의 의무로부터 그를 면제시켜줍니까? 오히려 예술가는 특별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그는 특별한 감수성과 지각력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도 예술가의 목소리는 전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와 진리의 자유로운 탐구, 바로 그것이 창조력의 핵심인데 드레퓌스에 대한 옹호에 예술가만큼 큰 관심을 가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음악이라는 언어     나는 7개 국어를 상당히 유창한 정도로 구사합니다. 그렇지만 가는 곳마다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음악을 통해서입니다. 모국어는 서로 다르더라도 우리 마음의 언어는 동일합니다. 국경을 넘어 하룻밤 머무는 도시가 낯설지 모르지만, 언제나 이러한 일반적인 동시적 정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연주회장에 모여 있다는 사실을 나는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의 얼굴을 보고 음악의 아름다움을 공유할 때 나는 우리가 형제자매이며, 모두가 한 가족의 구성원임을 알게 됩니다. 국경에는 잘못 세워진 장벽이 있고 그 동안 끔찍한 갈등이 수없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온 인류가 한 가족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큰 연주회장에서처럼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둘러앉아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될 날을 꿈꿉니다

 

러시아 혁명    러시아를 여러 차례 여행하면서 어디를 가든지 눈에 확 띠는 대조적인 모습에 경악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끔찍한 가난이 있었던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귀족들의 악명 높고도 과시적인 부가 있었습니다. 그런 걸 보고 있으며 이런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대항해 민중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시간문제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지요, 결국 1917년의 폭풍이 터져 나왔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혁명과 뒤이어 자행된 부정과 탄압에 대해서는 경악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군요. 모든 혁명에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일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회 개선을 위해 노력한 수많은 죄없는 사람들을 사회 변혁이라는 명분으로 처형하는 행동을 너그럽게 봐줄 수는 없습니다. 어떤 목적과 결과일지라도 그런 수단을 정당화해줄 수는 없습니다


에스파냐 내전 I   나는 역사가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닙니다. 그냥 음악가입니다. 그러나 에스파냐 내전에 관한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 하나의 단순한 사실을 내 눈에도 이미 명백하게 보였습니다. 전쟁의 책임은 국민들의 선거에 의해 선출된 적법한 정부를 무력으로 전복시키려는 사람들과, 음모의 첫 단계에서 실패하자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지원을 요청한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정부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군사적 음모가들의 총알이 아니라 민중의 선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내게 관한 한 에스파냐 공화국에 대한 지지는 양심의 문제에요,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달리 행동할 수 있겠어요?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언제나 그렇듯이 첼로와 지휘봉뿐입니다. 내전 기간에 나는 내가 믿는 목적,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지하기 위해 그 무기를 최대한으로 사용했습니다.

 

에스파냐 내전 II    나는 가끔 혼자 물어봅니다. 만약 서구 민주국가들이 에스파냐 공화국을 도우러 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랬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무시무시한 재난이 일어나기 전에 히틀러를 막을 수 있었으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 또 역사가가 반드시 기록해 두어야 하는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히틀러와 파시즘에 반대해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제일 먼저 무기를 들고 일어선 것이 에스파냐 국민이라는 사실입니다. 에스파냐 국민들의 희생과 영웅심은 온 세계가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에스파냐에서 외롭게 투쟁했던 그 남녀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그들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어요. 그 숭고하고 소중한 친구들, 죽은 사람들, 산 사람들 ....... 그들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습니다.

 

저항!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타도되었지만, 그들이 에스파냐에 구축해둔 파시스트 독재정권은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었어요. 더 불길한 것은 프랑코 정권에게 유화적인 제스처가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수십만의 피난민이나 연합군과 함께 투쟁한 난민들은 연합군이 승리하면 곧 에스파냐에도 민주주의가 회복되리라고 믿었는데 이제 와서 영구히 망명생활을 하라는 선고를 받다니? 나는 이 중대한 시기에 내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한 가지라고 판단했습니다 ....... 나는 민주국가들이 에스파냐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그런 나라에서 연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쉬운 일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냉소주의로 팽배한 세계에서 그런 행동이 국가들의 정책 방향에 거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요. 결국은 한 개인의 행동일 뿐이에요. 그렇지만 달리 행동할 방법이 없었어요

 

평화의 이름으로 I    내 나이가 되면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평화롭다고는 못 하겠군요. 온 세계에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이 많고 분노가 휘몰아치는데 어떻게 나 혼자 평화를 누릴 수 있겠어요. 인류의 존속 그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이 시점에 어떻게 손 놓고 쉬고만 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에 대한 승리가 세계를 대대적으로 변화시키리라 기대했습니다. 국가들 사이에 새로운 사랑의 시기가 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원자탄 실험과 재무장, 가열한 투쟁과 함께 냉전의 시대가 다가왔습니다. 이런 것들은 내가 보기에는 모두 미친 짓입니다. 나는 알고 있어요. 원자탄에 대한 유일한 방어는 평화뿐입니다. 1958년 여름에 나는 슈바이처를 바롯한 다른 여러 사람과 함께 무기 경쟁을 종식시키고 장래의 핵실험을 금지하도록 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 정부에 탄원서를 냈습니다. 공식 선언문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명화된 인간들이 세계를 더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나가기 위해 함께 힘을 모으지 않고 더 새롭고 파괴적인 무기를 자꾸 만들어나가는 상황이 일어나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평화의 이름으로 II     그 뒤 몇 해 동안 나는 평화를 위해서라면 어떤 기회든 놓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으며 핵전쟁의 위협을 알리기 위해 여러 조직위원회에 가입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일생 동안 내가 가진 무기는 언어가 아니라 음악이었어요. 나는 자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무기를 어떻게 써야 할까? 어떤 계획인 내 마음 속에서 형상화되기 시작했습니다  ...... 1962년 초반(그의 나이 86세 때), 나는 전쟁중에 프라드에서 작곡한 오라토리오 엘 페세브레」(말구유)와 함께하는 1인 평화 캠페인을 시작하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저는 먼저 한 인간이고 두 번째로 음악가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나의 의무는 동료 인류의 행복에 대한 것입니다. 나는 신이 내게 주신 수단인 음악을 통해 이 의무에 봉사하려 합니다. 음악은 언어와 정치 그리고 국경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세계평화에 대한 내 기여가 크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최소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스스로 신성하다고 여기는 이념에 바칠 것입니다.”

 

나는 계속 연주하고 연습할 겁니다    어쩌면 나는 카탈루냐를 다시 못 볼지도 모릅니다. 오랫동안 내가 죽기 전에 내 사랑하는 조국에 자유가 오리라고 믿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믿음이 확실하지 않습니다. 나는 압니다. 자유가 오기는 하겠지요. 그걸 알기 때문에 기쁘지만 살아서 그걸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슬픕니다. 어쨋거나 나는 상당히 오래 살았어요. 영원히 살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아요,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죽음이란 자연스런 일이에요.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지요. 그러나 회한은 남습니다. 세계를 이렇게 실망스런 상태로 두고 떠나는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또 마르티타와 내 가족과 친구들이 슬퍼할 것을 생각하니 안타깝습니다. 물론 나는 계속 연주하고 연습할 겁니다. 다시 백년을 더 살더라도 그럴 것 같아요. 내 오랜 친구인 첼로를 배신할 수는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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