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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인문/역사

역사의 의미 (칼 뢰비트 지음, 이한우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by 서음인 2019. 12. 14.

역사의 의미는 하이데거의 제자로 우리나라에도 몇 권의 책이 번역된 바 있는 유대계 독일 철학자 칼 뢰비트(Karl Löwith, 1897~1973)가 '구속사'와 '세속사'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구 역사철학의 기원과 전개 그리고 가능성에 대해 탐구한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역사철학'이란 "역사적 사건이나 결과를 서로 통일시켜 궁극적 의미와 관련지어 주는 원리를 찾아내려는 세계사에 대한 체계적인 해석"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서구의 역사철학은 역사를 구속사로 해석하는 신학적 역사 개념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근대 역사철학자들은 볼테르의 경험적 방법론을 수용해 검증될 수 없는 신학적 역사 연구를 거부하면서, 진정한 역사적 사유는 18세기에 와서야 시작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뢰비트는 이러한 일반적 견해에 반대해 진정한 역사철학의 기원은 유대-기독교인들의 독실한 신앙이며, 그 결과 역사철학은 종말론적 모델의 세속화와 함께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부르크하르트에서 성서의 역사 해석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며 중요한 역사철학(자)의 생각을 살피는 방식으로 자신의 논지를 펼쳐 나간다.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단상을 덧붙이기로 한다.  



1. 세속 역사의 과정 자체는 포괄적이거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최소한의 단서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역사 내에서 역사철학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역사적 경험은 고통스러운 죄와 실패의 반복일 뿐이며, 역사적인 세계 종교로서의 기독교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18세기와 19세기의 역사철학으로부터 성서적 신앙으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진보적' 역사의 정교한 계획을 찾기란 점점 더 힘들어진다. 복음서에는 역사철학을 위한 최소한의 암시나 단서도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그리스도를 통한 세상으로부터의 구원 계획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사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는 세속사의 용어들로 번역될 수 없으며, 지상의 사건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구원의 원천이나 모델이 될 수 없다. 성서적 전통의 가장 놀라운 측면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를 날카롭게 대립시키는 이원론이다

 

2.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 구원사와 세속사를 날카롭게 구분하고, 세속사란 초역사적 실체인 구원사와 아무 관계가 없거나 그 단편적인 반영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고전적인 기독교 역사신학 모범을 확립했다. 그는 역사가 하나의 전체로서 의미를 갖기 오로지 위해서는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시작 및 종말과 관련을 맺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 외에 역사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보쉬에는 섭리라는 전제에 입각해 천지창조에서 샤를마뉴에 의한 기독교 국가 성립에 이르기까지의 보편사를 서술했으며, 정치사에 좀 더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고 속사와 구속사와의 상호관계를 좀 더 강조하는 방식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계승 발전시켰다. 요아힘각각 성부와 성자의 시대인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이어 미래에 도래할 새로운 성령의 시대를 예견함으로서, 기독교적 섭리 이해에 역사 내에서 완성될 진보라는 새로운 이념을 도입했다. 


3. 비코는 인간이 스스로가 창조한 사회와 역사에 대해서만 명확하고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있으며, 섭리란 그 원리를 해독할 눈을 가진 사람에게 모두 열려 있는 역사적 과정 자체의 보편적인 질서라고 주장했다. 또한 최초의 역사철학자 볼테르는 신은 통치하지만 개입하지 않으며 역사의 목적과 의미는 인간 스스로가 이성을 사용해 지식과 도덕과 경제의 진보를 이뤄내는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서 세속사를 구원사로부터 해방했다. 헤겔은 기독교적 역사신학을 사변적 체계로 번역하여 정교하게 가다듬었고, 섭리를 '절대정신'이나 '이성의 간지'와 동일시함으로서 역사신학을 성스럽지도 세속적이지도 않은 역사철학으로 전환시켰다. 콩트프루동 그리고 마르크스는 신의 섭리를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이를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대체시켰고, 이러한 역사의 진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인 기독교는 마땅히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세기의 역사가였던 부르크하르트는 역사에 대한 체계적인 해석을 거부하면서 역사를 단순한 연속성으로 환원했으며, (20세기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입증된) 급격한 '진보'의 폐혜로부터 우리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고통과 극기의 신앙인 '원래의 기독교'라고 주장했다. 

 

4. 그리스도인들에게 역사란 인간적 노력과 진보로 이루어지는 자율적 영역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의 영역이며, 그리스도의 출현은 세속사의 연속성 내에서 나타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자연적인 역사의 경로를 깨뜨림으로서 역사의 모든 틀을 단번에 영원히 붕괴시킨 유일무이한 사건이다그리스도인들이 섭리를 강조하는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근대의 정신을 따라 역사를 자율적으로 발전하는 세속적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그러나 그리스도를 전후한 역사의 의미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출현에 의존한다는 기독교적 이해는 너무도 낯설고 급진적이어서 고대의 순환론적 우주론 및 근대의 역사주의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


5. 성서의 메시지는 역사적 행동의 촉구가 아닌 철저한 회개에의 호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함께 시작된 것은 기독교적이라 불리는 세속사의 새 시대가 아니라 종말의 시작이다. 섭리에 대한 이스라엘의 믿음이 보편사적 의의를 지닌 이스라엘 민족의 신성함과 관계한다면기독교에서는 구속사가 개인화되어 각 개인의 영혼 구원에 관계한다. 고대 그리스인과 기독교인들은 운명(섭리)에 대한 존중과 자유로운 순종을 공통점으로 가지며, 이는 인간에 의한 자연과 운명의 통제 가능성을 믿는 근대적 신념과 배치된다. 그리고 이러한 섭리에의 믿음은 역사에 대한 부르크하르트의 근본적인 지혜라 할 수 있는 역사적 진보에 대한 회의주의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6. 기독교 문명을 전세계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은 놀라운 힘은 섭리를 진보로 치환한 세속화된 형태의 유대교적 메시아주의와 기독교적 종말론이며, 이는 종말이 오기 전에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기독교적 요구가 서구화를 통해 야만적인 비서구 세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전환된 것이다그러나 이렇게 유대-기독교적인 사고에서 종말론적 지평을 제거한 채 영원한 진보에의 소망만을 남겨둔 서구의 근대 문명은 끔찍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한 처절한 전락을 경험했역사에 존재하는 모든 악은 구원적인 사건들과 세속적인 사건, 구속사와 세속사의 근본적인 구별을 혼동하는 인간의 교만과 잘못된 기독교에서 나온 열매이다


7. 그리스도의 재림이 2000년간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종말이 지연되고 있을 뿐 여전히 다가오고 있다는 희망과 믿음이며, 이는 현재 일어나는 사건들과 온갖 재난들을 종말의 전조로 해석함으로서 정당화된다. 기독교적 희망이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세속적 바램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목적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앙에 기반을 둔 정신적 태도로 경험에 의해 확증되거나 부정될 수 없다. 우리는 절대적인 희망과 신앙이 상대적인 인간의 합리성에 의해 정당화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이러한 무조건적인 희망과 신앙을 하느님이 아닌 인간에게 쏟는 것이 타당한가를 질문해야 한다



개인적인 단상



1. 저자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결정적으로 계시되었고 종말을 통해 완전히 드러날 초역사적 섭리가 역사의 동력이라고 믿는 고전적 역사신학에서 '그리스도'와 '종말'을 제거한 채 자율적이고 지속적인 진보의 이념만을 받아들인 근대의 역사철학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철저하게 붕괴되고 말았다고 진단한다. 이는 나치라는 절대악의 출현 및 전쟁과 인종말살정책으로 인한 대량학살이라는 현실을 목도하며 '진보'에 대한 환상이 무너진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서구, 특히 독일 지성계의 반성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구속사를 역사적 현실로부터 철저히 퇴각시켜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지에 대한 믿음의 도약으로만 가능한 개인 구원의 영역으로만 제한하려는 저자의 태도는, 그가 하이데거의 제자로 주로 그의 실존철학적 측면을 바탕으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한 학자였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2. 1957년에 나온 이 오래된 책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비판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도 근대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실패한 탕자"인 근대의 서구 역사철학이 그 뿌리인 "기독교 역사신학"의 품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저자의 해법은, 더욱 강력해진 세속화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이미 본격적인 후기 기독교 시대로 접어든 오늘날의 상황에서 보면 지나치게 시대착오적이며 서구 중심적인 주장으로 보인다. 과연 '기독교 역사신학'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는 모든 시대가 동경해야 할 에덴의 낙원이었는가? 2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목표는 서구 기독교 세계(christendom)로의 회귀인가? 돌아갈 "뿌리"가 없는 비서구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서구 기독교를 자신들의 영적 고향으로 삼는 "검은(황색) 피부에 하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3. '하나님 나라'와 '인간의 나라'를 날카롭게 대립시키면서 참된 역사의 의미는 역사 그 자체가 아닌 초역사적인 섭리와 종말론의 관점에서만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저자의 주장은 마치 "죄많은 이세상은 내집 아니네"를 외치며 세상에 초연한 채 신앙생활에만 몰두해야 한다고 가르치던 한 세대 전의 한국교회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초역사적이고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섭리'나 '이성의 간지'의 손에 맡기고, 우리는 우리의 손에 맡겨진 '인간의 나라'를 좀 더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하는 것 아닐까? 실제로 2차 세계대전 이후 탈식민, 탈서구, 탈주류, 탈가부장의 흐름 아래 소수자나 약자와 연대해 역사 내에서의 진보와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실패와 고난을 무릅써가며 다양한 신학과 실천을 통해 "인간의 나라를 통해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노력해 왔다


4. 이렇게 보자면 그의 오래된 책은 이제 그 수명을 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상과 분리된 거룩을 추구했던 한 세대 전의 '분리형 기독교' 대신 세상의 질서나 구조와 가급적 충돌하지 않으려다 정체성의 상실을 우려해야하는 적응형 기독교’ 패러다임이 대세로 자리잡은 오늘날, 우리는 성급히 책을 덮기 전에 19세기의 낙관론을 '흉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그 종말을 예언함으로서 참된 역사의 예언자로 자리잡은 야곱 부르크하르트의 생각에 한번쯤 기울일 필요가 있다. 부르크하르트에 따르면 근대적 삶의 악한 본성인 권력욕과 소유욕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덕목인 자발적 고통 및 자기 복종과 정면으로 배치되며,  '진보'의 폐혜로부터 우리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세속 권력이나 문명과 타협하지 않은 고통과 극기의 신앙인 '원래의 기독교'다.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 본회퍼의 "타자를 위한 교회",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바로 그 '원래의 기독교'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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