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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인문/역사

오늘의 역사학 (안병직 외 지음, 한겨레신문사 펴냄)

by 서음인 2020. 6. 25.

오늘의 역사학1970년대 후반 이후로부터 20세기 말에 이르기까지의 서구 역사학 동향을 소개하는 국내 역사학자 다섯 명의 글 여섯 편을 모은 책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여러 경향들은 한 마디로 일상, 집단 심성, 문화, 언어, 담론, 상징 등의 분석을 통해 역사를 새롭게 이해하고 접근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책 전체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는 서론이 있고, 1장은 독일 역사학의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한 일상사를 다루며, 2장은 20세기 프랑스 역사학계를 풍미한 아날 학파의 심성사를 소개한다. 3장은 역사에 대한 문화사적 전환이나 신문화사에 관련된 영미 학계의 동향에 대해 설명하며, 4장과 5장은 역사학의 자기인식을 언어의 중요성에 입각해 새로이 규명하려는 언어로의 전환에 대해 다루고 있다.

 

서론을 쓴 안병직 교수에 따르면 20세기 말을 지배한 역사학의 새로운 경향들은 몇 가지 공통적 특질을 지닌다. (1) 이들은 그간 역사학계를 지배해 왔던 역사적 사회과학으로서의 사회사* 를 비판하고, 역사적 현실의 다양성과 차별성, 불투명성과 불확실성, 모순성에 접근할 수 있는 한층 정교하고 세련된 방법론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 이 경향들을 역사에 대한 전통적 관념을 깨고 역사의 연구대상을 관념과 심성, 언어와 담론, 미시적 일상 등에까지 확장함으로서 역사학이 훨씬 더 창의적이고 자의식적이며 비판적인 학문분야로 발전할 수 있는 소지를 제공한다. (3) 새로운 경항들은 풍성하고 구체적인 연구성과를 통해 그 유용성을 증명해가고 있다.

 

20년 전에 쓰여진 조금 오래된 책이라 오늘의 역사학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낡은 감이 있지만, 20세기 말 서구 역사학의 주요 동향과 중요한 학자 및 저술들을 충실하면서도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는 책의 내용은 아직 그 매력과 유용성을 잃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오래 전부터 내 역사 독서의 충실한 길잡이 역할을 해온 고마운 책이다. 다시 읽고 내용을 요약한다.

 

* 이들이 공히 극복하려고 시도하는 역사적 사회과학으로서의 사회사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사건 인물 행위가 아닌 구조와 과정의 파악에 주력한다. 정치 경제 문화를 망라하는 통합적 역사서술을 추구한다. 개념과 범주에 입각한 논증적 분석과 인과관계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역사서술의 본질로 간주한다. 역사연구에 사회과학의 이론이나 모델을 적극 수용한다. 가치중립성을 거부하고 계몽과 해방을 위한 역사학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내용 요약


 

1. ‘일상의 역사란 무엇인가 (안병직)


 

일상사의 출현     


1980년대 이후 독일 역사학의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한 일상사는 사회의 구조적 측면보다 인간의 경험을 강조하고, 서민의 일상적이고 미시적인 생활과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등 역사의 인류학적측면에 강한 관심을 표명했으며, 평범한 개인이나 집단의 일상적 경험을 재구성함으로서 그들의 실제 삶이 어떠하였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이는 역사적 사회과학의 입장에서 역사에 접근하는 기존 사회사 연구에 대한 도전이자, 학문적 전문성을 추구하는 대학 중심의 제도화된 역사연구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일상사의 특징적 경향   


일상사가 역사연구의 새로운 방법론으로 추구하는 것은 일상의 여러 계기를 통해 표출되는 상징적 언명이나 행위들에 대한 망라적 서술을 지향함으로서 분석적 개념에 의한 직접적 파악이 불가능한 가장 비밀스러운 관계들과 생각들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방법인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의 치밀한 묘사/중층기술 (thick description)'이라 할 수 있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역사를 양면적 모순적 복합적 중층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② 피지배자나 피억압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파악한다. 구조보다는 구조나 구조적 변화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경험 그리고 해석에 관심을 갖는다. 소공간의 생활세계인 미시세계를 역사의 대상과 서술범위로 삼는다. 문화에 의해 매개되는 일상적 경험에 대한 사람들의 처리방식 혹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천과 생활방식을 밝혀낸다. 역사서술에서 대상과 교응하며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일상사 연구의 실재와 성과    


(1) 노동사 연구   일상사가들은 노동자들의 객관적 삶의 조건을 규정하고 있는 구조적 측면보다, 노동자들이 일상의 현실을 어떻게 경험하며 노동자 문화라는 전략을 통해 어떻게 프롤레타리아적인 일상을 유지해 나갔는지를 규명해 왔다. 그들에 따르면 20세기 초 독일의 노동자들은 일상에서 그들의 욕구와 희망을 수렴하지 못했던 공식적 노동운동이 아니라 일상에 존속하고 있던 노동자 문화를 통해 문제의 해결방식을 찾았으며(정치의 사생활화), 나치체제에서 독일의 노동운동이 겪었던 실패와 좌절은 노동자 문화에 잠재된 저항의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것을 규제의 대상으로 삼았던 노동운동과 노동대중의 유리에 기인한 것이었다


(2) 나치즘 연구   일상사가들은 나치즘에 대해 전체주의 같은 거시이론을 바탕으로 접근하는 대신, 나치정권의 지배가 피지배자인 일반 대중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그들이 그 체제를 어떻게 경험했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일상사가들에 따르면 나치즘에 대한 노동자들의 태도는 적극적 동참이나 적극적 거부가 아닌 소극적 저항을 포함하는 유보적 수용이었으며,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일상이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던 반인륜적 행위와 타인의 고통을 기꺼이 방조하고 묵인했던 나치정권의 공범자였다

 

일상사에 대한 비판과 평가   


일상사에 대한 핵심적인 비판은 역사 서술이 구조사적 분석을 배제한 경험의 재구성만으로 이뤄질 수 없으며, 역사가가 개념과 이론에 의존하지 않고 논리적인 분석과 체계적인 해석에 도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일상사는 기존 사회사를 완전히 대체하기보다는 보완이나 확대로 여겨져야 한다.

 


2장 심성사의 여러 모습 (김응종)

 


머리말    


포스트모던 역사이론이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면서 기존 역사학이 추구하던 과학적 객관성이 도전을 받고 있으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오늘날의 지배적 언어인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심성사란 프랑스 아날 학파의 출범과 동시에 시작되었지만 직접적으로는 브로델 이후의 제 3세대 역사가들의 역사학자들의 역사학을 지칭하며, 이성뿐 아니라 감성까지도 포괄하는 민중의 집단심리와, 전체사 속에 아우러져 있던 인류학적 주제들 - 가족 · 공동생활 · 신화 · 축제 · 민중문화 · 종교의식 · 결혼 · · 범죄 · 광기 · 죽음 - 을 다룬다.


전사    


심성사의 계보는 페브르의 심성적 세계에서 시작한다. 마르크 블로크의 인류학적 역사도 요즘에는 심성사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 관례이다. 브로델의 역사학에서 심성의 비중은 매우 작지만, 그의 일상생활의 역사는 심성사와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1) 페브르의 심성적 도구    페브르는 그의 대표작이자 심성사의 선구적인 저서로 평가받는 16세기의 무신앙 문제 - 라블레의 종교에서 각 문명의 심성적 세계는 그 시대가 가지는 심성적 도구를 통해 형성되며, 다른 심성적 세계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에는 양적인 차이가 아닌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16세기의 심성적 도구들을 검토한 후 믿기를 원하던 시대라는 심성적 구조의 한계 때문에 라블레는 결코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무신론자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2) 블로크의 인류학적 역사    블로크는 기적을 행하는 왕에서 중세인들이 왕의 손대기가 연주창을 치료한다는 관념을 믿고 합리화하게 된 이유는 초월적 존재인 왕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는 중세인들의 미신적 심성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봉건사회에서 봉건제의 발생은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한 극도의 혼란과 불안으로 사람들이 혈연을 뛰어넘는 새로운 인적 종속관계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으며. 가혹한 중세의 자연환경은 무기력무감각이라는 중세인들의 심성을 형성하는 데 큰 몫을 했다고 강조한다.

 

(3) 브로델의 일상생활의 역사    2차 세계대전 이후 아날학파가 브로델의 주도하에 물질문명에 대한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계량적 방법을 사용하고 과학성을 지향하게 된 사회경제사의 득세에 따라 심성사는 점차 변두리로 물러났다. 그러나 심성사가로 여겨지는 브로델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산업화 시대의 경제활동 영역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15-18세기의 의식주 생활을 포함한 일상생활의 역사를 꼼꼼히 서술하며, 이를 통해 위기를 극복해가며 불평등을 지리적으로 확장시켜 온 자본주의의 어두운 뒷모습을 고발한다.


사회사적 심성사 


조르주 뒤비와 자크 르 고프, 그리고 미셸 보벨은 대체로 사회사적 토대 위에서 심성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1) 뒤비의 이데올로기의 사회사    뒤비는 사회가 경제적 기초뿐 아니라 표상에 의해서도 설명된다고 믿었다. 그는 세 위계 : 봉건제의 상상세계에서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일하는 사람이라는 잘 알려진 중세의 세 위계 체계는, 1025년경 프랑스의 두 주교가 일련의 평등주의적 경쟁 모델들의 위협에 대응해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정당화기 위한 수단으로 고안해 낸, 정교한 이데올로기적 체계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성직자 · 수도사 · 제후들이 각각 자신들을 정점에 놓고 만들어 낸,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던 다양한 위계 담론들 중의 하나였으며, 그 담론들의 최종적 목표는 지적 헤게모니와 현실 권력의 쟁취였다고 강조한다.

 

(2) 르 고프의 연옥의 사회사    르 고프는 서양 중세 문명에서 일반적 개설서와는 달리 망텔리테 · 감수성 · 태도 · 경이로움 · 시간과 공간 · 육체 · 몸짓 · 쾌락 · 상상력 등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연옥의 탄생에서는 12세기말에 온전한 형태로 탄생한 연옥관념이 봉건제라는 새로운 삼분법적 사회체계의 정립과 함께 등장한 중간이라는 개념 및 중간 계급의 발생과 그 맥을 같이하는 시대의 부산물이자, 연옥교리에 반대하는 당대의 이단들에 대응해,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가 가져다주는 경제적 이익을 지키고 산 자들에 대한 교회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필요성의 산물이요 제조된 공간/관념이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3) 보벨의 죽음의 사회사    미셸 보벨은 18세기 프로방스 지방의 바로크적 신앙심과 탈기독교화에서 1680년에서 1789년까지 프로방스 지역에서 작성된 유언장 중 2천여 개를 시간적 · 공간적 · 사회계층적으로 분석해 죽음에 대한 집단 심성을 계량화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종교적 실천의 후퇴나 교회제도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나는 탈기독교화라는 집단심성의 변화가 프랑스 혁명 이전에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계량적으로 증명했다. 그의 연구는 문화적 심성적 현상에 대한 계량적 연구의 효시였으며, 심성사는 곧 계량사라는 인식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문화사적 심성사 


이들은 앞의 역사가들과 달리 사회학에서가 아니라 주로 인류학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 있다. 아리에스는 가장 페브르적인 심성사를 계속했고, 드 라 라뒤리는 스승인 브로델의 전체사와 대조적인 미시사의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샤르티에는 사회의 문화사를 추구하며 아날학파의 역사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1) 아리에스의 죽음의 심리학    아리에스는 죽음의 역사에서 문학작품 · 전례서 · 유언장 · 비문 · 성상 등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표현을 통해서, 서구 천년의 역사는 자아의식’ ‘야만적인 자연에 대한 방어’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 ‘악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라는 네 가지 심리적 요소가 변화함에 따라, ‘친숙해진 죽음’ ‘나의 죽음’ ‘너의 죽음’ ‘전도된 죽음이라는 단계로 변화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19세기 이후로는 낭만주의의 위선이나 죽은 자와 유족간의 유대가 사라지면서, 죽어가는 사람은 추한 존재로 인식되어 고립된 채 쓸쓸하게 죽어가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그는 계량화를 거부하고 죽음에 대한 심리적 태도를 단계별로 추적해 인간에 죽음에 부여하는 의미를 그 내적 논리에 따라 설명했다.

 

(2) 르 롸 라뒤리의 미시사    미시사가로서 그리고 인류학적 역사가로서의 르 라 라뒤리의 면모가 가장 잘 나타난 책은 몽타이유이다. 그는 이 책에서 중세시대 프랑스의 작은 마을인 몽타이유에서 벌어진 이단재판을 꼼꼼히 기록한 한 유능한 이단심문관이 남긴 기록에 대해 치밀한 사료분석을 수행함으로서, 중세 농민들의 삶 · 사랑 · 문화와 같은 인류학적 분야 뿐 아니라 그들의 심성의 세계까지 생생하게 복원해냈다. 그는 몽타이유의 농민들이 야만적이거나 수동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인생의 목적, 삶과 죽음에 대해 숙고하고 토론하는 등 다양한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서, 민중을 미신 · 마술 · 야만 등으로 규정하여 역사로부터 소외시켜 오던 공식문화의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3) 샤르티에의 사회의 문화사    아날학파의 4세대인 로제 샤르티에는 문화적인 현상을 사회적으로 바라보는 기존의 문화의 사회사대신, 전체사회를 문화라는 시각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그의 관심분야는 앙시앵 레짐기의 문화와 문화의 전파, 더 구체적으로는 책과 책읽기의 역사이며, 명확하고 정교한 사상을 우대하는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대신 전달 · 수용 · 굴절 · 사회단체 · 의사소통 · 교육 등에 역동적 의미를 부여하는 프랑스 혁명의 문화적 기원을 중시한다.


맺음말

 

(1) 좁은 의미의 심성사는 페브르가 제시한대로 한 시대나 한 계층의 심성적 한계를 설정하거나, 감정의 세계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심성사는 심성이라는 좁은 영역에 국한된 부분적 역사가 아니라, 심성이라는 창을 통해 전체를 조망한다. 심성사가 계층구분을 경시한다는 주장이나 환원주의적이라는 비판은 이 학파의 일부 역사가의 작업에 해당하는 것일 뿐이다.

 

(2) 심성사는 개념의 모호성 때문에 경계설정에 어려움이 있으며, 실제로도 심리사, 지성사, 사상사, 인류학적 역사, 미시사, 일상사, 신문화사 등과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심성사는 대체로 사회사적인 토대 위에 서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관념사나 포스트모던 신문화사와 구분되며, 민중의 수용을 강조함으로서 엘리트적인 사상사, 지성사와도 방향을 달리한다.

 

(3) 과학적 객관성의 도구인 계량화는 과학적인 설명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지니지만, 계량화로 역사학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의 해석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포스트모던 역사이론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역사를 위한 노력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4) 심성의 가장 큰 문제는 그 시작과 더불어 제기된 대표성이나 시대착오의 문제다. 과연 역사가가 제시하는 사례는 당대인들의 심성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가? 같은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사회계층에 상관없이 같은 심성적 한계 속에 사는 것인가? 동일한 심성적 세계라고 하는 것이 과연 지역적 차이를 없애주는가? 역사가는 자신과 다른 심성적 세계를 살았던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3. 역사서술의 문화사적 전환과 신문화사 (김기봉)

 


머리말

 

문화사적 전환을 시도하는 역사서술의 실재는 매우 다양하지만 그들은 역사를 현재의 문화와 과거의 문화 사이와 대화라고 이해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과거인들과의 진정한 대화는 과거인들이 당시 그들의 삶 속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또 어떤 방식으로 그 중요한 것들을 성취했는지 결정하는 그들 삶의 가치체계와 의미체계를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역사서술의 문화사적 전환은 문화적 현상에 담겨 있는 역사적 의미를 해명하고자 노력함으로써 문화를 역사의 중심적인 연구대상으로 부각시키고, 더 나아가 현재와 과거의 대화 코드를 문화로 설정함으로서 문화를 통해서 역사를 보는 새로운 연구방식을 제시한다.

 

문화를 통해 본 계급 형성 : 톰슨

 

톰슨은 계급이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처럼 특정한 생산양식에 의해 저절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을 통해 인간이 성취하는 역사적 사건이며, 따라서 계급의식이 없다면 계급 역시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문화란 사회경제적 토대의 단순한 반영물이 아니고 계급경험이나 계급의식이 발생하는 모판이라고 강조했다.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신문화사라는 새로운 역사서술의 태동을 선도하면서 마르크스주의적 역사서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과정을 밝히면서 18세기 영국 민중의 투쟁이 차지하는 몫을 되찾아 주었다.


영국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은 산업혁명을 통해 변화한 생산조건과 노동조건에 대한 노동자의 주체적 반응에 의해 형성되었다. 18세기 영국의 민중은 거대한 생산양식의 변화에 직면해서 집단적 폭력으로 저항했고, 그 과정 속에서 잡다한 계급적인 경험들을 하나의 계급의식으로 결집했다. 톰슨은 18세기에 일어났던 민중의 집단행동을 추동했던 힘의 원천이 근대적 계급의식이 아니라 신이 내린 공정가격이라는 전통적이고 공동체적인 가치관이었다는 것을 밝혀냄으로서, 민중의 공통된 경험이 하나의 집단적 운동으로 전화될 수 있는 에너지를 민중문화에서 발견했다. 톰슨은 이 이야기를 통해 역사의 과정에서 패배자로 전락했던 사람들의 정당한 몫을 찾아주며, 과거의 민중이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의 발전 가능성들을 찾아낸다.

 

인류학적 역사연구 : 기어츠와 살린스

 

클리포드 기어츠는 문화연구는 법칙을 추구하는 실험과학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해석과학이며, 인류학자는 원주민 문화를 하나의 텍스트로 이해하고 거기에 상징적으로 구현되어 두꺼운 의미체계를 치밀한 묘사의 방법으로 해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방법을 받아들인 사학자들은 거대 이론가들이 만들어낸 이론들에 의지해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인들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구체적 경험을 치밀하게 묘사하는 것을 통해 당대인들의 삶의 의미체계를 해명하려고 시도한다. 이는 일상사가들이나 구술사가들이 구조의 역사를 지양하고 경험의 역사로 나아가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마샬 살린스는 역사적으로 전승된 의미들의 체계가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문화라는 기어츠의 정의를 받아들이는 한편,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문화의 의미구조를 밝히기 위해 역사와 문화의 상호연관을 해명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쿡 선자의 죽음을 분석해 어느 한 사건을 계기로 전체 구성원들의 삶의 방식을 구속하는 문화적 가치체계가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역사적 행위는 문화적 체계들에 구속되는 것을 면할 수 없지만 동시에 전자가 후자를 변형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 인류학적 역사서술 : 단턴과 데이비스

 

로버트 단턴은 『고양이 대학살』에서 1730년대 프랑스의 한 인쇄소에서 일어났던 고양이 대학살의 이야기를 클리포드 기어츠의 치밀한 묘사를 통해 재현함으로서, 이 이상한 이야기에 새로운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이 텍스트를 통해 노동자인 인쇄공과 부르주아인 주인 간의 계급갈등이 고양이를 둘러싼 두 문화 사이의 차이를 기반으로 어떻게 굴절되어 나타났는지 보여준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전통적 민중문화의 폭력적 행동양식을 보여주는 18세기 초의 고양이 대학살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출되었던 민중의 저항과 폭력은, 18세기 말에 일어난 혁명의 진행과정을 통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가, 점차로 부르주아 사회의 시민사회의 문화 속으로 해소되어 갔다고 말할 수 있다.


나탈리 제문 데이비스는 마르탱 게르의 귀향』에서 장 드 코라스라는 재판관이 기록한 재판기록을 바탕으로 16세기 프랑스 농민의 일상적 삶과 사고방식을 하나의 드라마로 재구성한다. 데이비스는 누가 한 여인의 진짜 남편인지를 가려야 했던 재판관이 농민의 세계에 대해 내린 해석을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 재해석함으로서, 가짜 남편을 진짜로 용인하며 살고자 했던 한 농부의 아내의 망텔리테를 여백을 가진 사실적인 소설의 형태로 재구성했다. 데이비스는 이러한 역사서술을 통해 재판관에 의해 한 사악한 사기꾼의 희생자로 기록되었던 그녀를, 농민문화라는 역사적 환경 속에서 페미니즘을 원형적으로 구현했던 영웅으로 재탄생시킨다.

 

미시사적 역사서술 : 진즈부르그

 

미시사는 브로델적인 전체사 개념에 반대하는 포스트모던적 기획의 일환으로, 연구의 관심을 사회이 전반적 구조나 사회변화의 거대과정에서 작은 것으로 전환시킴으로서, 종래의 역사서술에서는 주목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삶을 발굴해 그 역사적 의미를 되찾아주고자 하는 역사서술이다. 미시사의 고고학적 접근방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치즈와 구더기에서 저자인 카를로 진즈부르그는 재판 기록을 통해 16세기에 이단으로 처형된 한 방앗간지기의 생애를 재구성한 후, 공식적 담론 안에 은폐되어 있던 장기지속적인 심층구조로서의 독자적인 민중문화를 발굴하는 데 성공한다. 이는 근대적 사고방식의 생성과정을 아래로부터연구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맺음말

 

신문화사는 역사의 거대한 과정 속으로 매몰되거나 지배구조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복원시키기 위해 역사서술의 문화사적 전환을 시도한다. 그런데 문화의 형식과 내용은 매우 복잡하고 다원적이기 때문에 신문화사는 하나의 정형화된 형태나 관점을 추구하지 않는다. (1) 68혁명의 실패를 맛본 신좌파 지식인들은 변혁의 방식을 정치혁명에서 지적 헤게모니를 쟁취하려는 문화운동으로 전환했으며, 이탈리아의 미시사와 독일의 일상사는 이러한 좌파적 전통과의 연속성에서 성립된 신문화사의 조류들이다. (2) 문화 패러다임의 또 다른 지적 기원은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근대성의 해체를 그 목표로 삼는 이 운동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근대라는 기획의 연속선상에서 바라보는 탈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채택했다

 


4언어로의 전환과 새로운 지성사 (조지형)

 


머리말

 

새로운 지성사를 추구하는 역사가들은 전통적인 지성사의 담을 허뭄으로서 새로운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은 지성이라는 담을 해체하고 의미라는 보다 넓고 새로운 지평을 마련했다. 그들은 의미를 얻어내려는 모든 역사연구를 지성사로 간주하며, 의미를 얻어낼 수 있다면 어떠한 것이든지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전통적인 역사학 분야로서의 지성사는 사라지고 모든 역사는 의미의 역사로 통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성사가 사상의 역사로부터 의미의 역사로 전환되는 과정은 언어로의 전환(linguistic turn)'으로 요약된다.

 

담론과 저술 의도에 대한 연구로서의 지성사 : 포콕과 스키너

 

전통적인 지성사의 역사인식과 방법론에 대해 언어탐구적 비판을 제기한 지성사가는 오스틴의 일상언어철학의 영향을 받은 포콕과 스키너였다. 그들은 전통적 지성사의 두 흐름인 텍스트 중심주의와 컨텍스트주의는 모두 지성사 연구에 부적절하며 불충분하다고 비판하면서, 이들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언어적 컨텍스트주의를 제안한다. 언어적 컨텍스트주의에 입각한 지성사 연구란 텍스트가 저술되었던 특정 시대의 언어관례(포콕)나 정치담론(스키너)을 통해 텍스트를 연구하고, 이를 통해 텍스트 저자의 저술의도를 밝혀내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것은 텍스트에 나타난 저자의 언어적 창의성을 탐구하고 특정 텍스트의 관념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정착되고 나아가 언어관계와 정치담론이 되어가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철학의 탈철학과 역사화 그리고 신실용주의 : 로티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일상언어철학의 영향을 받은 리처드 로티는 진리의 보편성 절대성 객관성을 전제하는 전통적인 실재론을 거부하고, 진리로 간주되는 담론이란 특정 시대와 장소에서 살아가는 공동체에게 그냥 더 좋거나” “세상사에 더 잘 대처하게하면서도, 동시에 공동체의 문화적 다양성과 개방성 그리고 사회연대성과 소통 가능성을 최대로 확대시키는 담론이라고 강조한다. 로티는 역사연구는 존재론적 사실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탐구하는 것이며, 텍스트에 대한 역사연구는 문예비평’(‘진리의 재컨텍스트화)을 통해 언어를 탐구함으로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역사연구의 어떤 결과(담론)도 절대적인 우월성을 갖지 않기에 역사해석은 /가 아닌 그럴듯함의 기준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야기체, 역사의 문학성과 문예비평 : 화이트

 

화이트는 역사서술이란 하나의 언어적 인공물이며, 역사와 문학의 차이란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라고 주장한다. 역사가는 역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적 상상력을 통해 주어진 사실들을 배열하는 플롯구성에 참여함으로서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이다. 그는 프라이의 원형비평 이론에 나오는 네 가지의 비유양식에 기초한 원형이 모든 역사서술의 심층적 구조를 이루며, 역사가가 어떤 비유전략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역사서술의 방향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모든 역사서술은 특정 비유 전략에 따라 코드화되어 있기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순수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화이트에 따르면 새로운 지성사는 특정 비유전략과 코드에 의해 이야기체로 만들었던 텍스트를 해체하고, 새로운 코드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체를 만드는 탈 코드화재 코드화의 작업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텍스트, 컨텍스트. 역사의 대화화 : 라카프라

 

역사학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데리다주의자인 라카프라는 어떤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일하게 언어로 이루어진 컨텍스트의 이해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서 텍스트/컨텍스트의 전통적인 이분법을 해체한다. 그리고 텍스트는 다양한 전통들과 경향들이 복잡한 언어적 망상 조직 안에서 서로 엉켜 긴장과 경쟁을 일으키는 공간이기에, 그 이해를 위해서는 텍스트가 실재를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기록적 읽기보다 텍스트를 작품으로 간주하면서 그 안에 있는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과거와의 대화로서 텍스트 읽기가 더 유용다고 주장한다. 라카프라에 따르면 정전 읽기는 그 정전의 텍스트가 정전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준 담론들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며, 정전이 가지고 있는 헤게모니적 기능들을 탐구할 수 있도록 해주기에, 다른 텍스트 읽기보다 더욱 가치 있는 행위가 된다.

 

언어로의 전환을 통한 새로운 지성사

 

(1) 언어로의 전환은 언어에 대한 전통적인 신뢰를 소박한 환상이라고 비판하면서, 언어의 우연성, 불확정성, 불투명성, 주관성을 주장한다. (2) 언어로의 전환은 텍스트와 컨텍스트는 모두 언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서로 엉켜 있다고 강조한다. (3) 언어로의 전환은 일차적으로 담론과 그 담론 안에 숨겨진 권력에 주목한다. (4) 언어로의 전환은 담론과 권력에 의해 생산되는 문화의 연구이다. 역사가는 자문화주의의 편견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지평융합이 가능한 열린 공간으로 밀어넣어야 한다. (5) 언어로의 전환은 이분법적 사고와 이성중심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이항대립쌍을 언어를 통해 전복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삶을 분산적으로 통합하려 한다. (6) 언어로의 전환은 이항대립적 구분을 기반으로 한 학문의 구획을 흐릿하게 함으로서 모든 학문을 삶에 대한 연구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7) 언어로의 전환은 이성중심주의와 과학만능주의를 추구했던 논리학 중심의 전통에서 언어를 통한 효과적 설득을 추구했던 수사적 전통으로의 회귀를 시도한다.

 

맺음말

 

새로운 지성사란 언어를 통하여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의미의 끊임없는 과정을 해석하는 작업이며, “의미의 역사에 대한 학제적이고 종합적인 연구라는 성격을 띤다. 새로운 지성사는 하나의 중심을 갖지 않는 다원적 , ‘절대적의 이름 아래 이질적인 문화, 담론, 언어, 의미들이 무조건 억압당하거나 절대적 타자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텍스트를 거울 보듯 투명하게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허위와 기만을 폭로하고, 전통적인 역사연구를 새로운 차원으로 고양시키기 위한 열린 전망을 요구한다.

 


5장. 정치문화 상징 담론의 분석을 통한 역사서술 - 프랑스 혁명과 앙시앙 레짐 (백인호)

 


머리말

 

프랑스 혁명을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이 반 봉건적이고 반 귀족적인 부르주아혁명이었다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정통해석을 제시했고, 이 관점이 1950년대까지 학계를 지배했다. 그러나 이러한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전적 사회사 연구는 네 단계를 거치며 해체되었다. (1) 1950~1960년대 초 아날학파의 브로델은 장기지속 · 계열사 · 전체사 등을 강조하면서 정치적 사건을 조류의 강한 움직임으로 야기되는 표면의 소요에 불과한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서 프랑스 혁명의 의의를 평가절하했다. (2) 1960년대에 나타난 수정주의학자들은, 귀족과 부르주아는 혁명 초기에 서로 협력했으나 삼부회 소집 때 우연히 발생한 오해가 혁명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함으로서, 계급투쟁을 거부하고 정치의 우연성과 자율성을 강조했다. (3) 보벨의 프랑스혁명사연구소장 취임(1983) 이후 혁명사 연구에 계량적 방법과 지도를 이용한 분석 방법이 도입되는 등 다양한 방법과 연구 주제들이 개발되었다. (4) 1980~1990년대에 접어들어 미시사적 방법과 언어로의 전환이 혁명사 연구에 유입되면서, 프랑스 혁명을 문화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당대의 보통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한 혁명을 파악하며, 혁명기에 출현한 새로운 담론, 의식의 변화, 상징적 행위의 의미 등을 연구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연구

 

(1) 오주프의 혁명축제 연구    오주프는 혁명축제에서 혁명기의 축제 현상을 통해 근대적인 정치문화가 형성되었음을 간파하고, 축제 상징 및 언어가 현실에 미친 실제적인 힘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혁명가들이 직접 조직하고 시행한 축제들은 혁명의 이상을 담은 상징과 의식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모든 프랑스인들은 축제라는 경험을 함께 하면서 통합과 일체감을 느끼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재구성해 나갔다. 또한 혁명가들은 구체제의 핵심인 가톨릭과 군주제와 봉건제를 상기시키는 시간과 공간 개념을 의도적으로 청산하고, 새 시대를 상징하는 새로운 표상을 만들어내려고 시도했다. 그럼에도 민중들에게 깊이 뿌리박힌 전통적 종교 의식들은 축제 속에 견고하게 남아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혁명가들의 노력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혁명축제는 근대적 이념들인 권리 · 자유 · 조국과 같은 개념들을 신성화함으로서,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창출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감당했다.

 

(2) 아귈롱의 상징과 이미지 분석    아귈롱의 마리안느는 혁명기의 표상, 특히 상징물이 어떻게 정치문화를 형성하였는지 보여주는 선구적인 작업이다. 아귈롱은 프랑스 혁명기에 공화국의 알레고리로 널리 사용되었던 상징물인 자유의 여신 마리안느에 주목한다. 그는 성모 마리아와 그 모친인 안나의 이름이 결합된 '마리안느'라는 여신은, 군주숭배와 성인숭배에 익숙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자유나 공화국’ 같은 추상적 개념을 의인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혁명세력이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하면서 일반대중을 열광시킬 선전 매체와 교회를 대신할 신성한 권위가 필요했고, 바로 이 시기에 국민공회가 공화국의 국새에 자유의 초상을 새겨놓기로 결정함으로서, 공식적으로 자유라는 여성적 알레고리가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존재로 부각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3) 헌트의 혁명기 정치문화연구     미국의 역사가 헌트는 정치가 단지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마르크시스트들의 관점을 거부하면서, 프랑스 혁명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자본주의의 발전이나 경제적 근대화가 아니라, 민주적 공화주의라는 새로운 정치문화의 탄생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정치의 자율적 기능을 강조하면서 정치문화의 토대를 이루는 문화적 패턴, 즉 상징적 실행, 언어, 이미지 몸짓들에 주목하며, 혁명기 정치언어가 어떻게 사회 정치적 변화의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문학비평의 방법을 통해 혁명의 수사학을 분석한다. 그리고 혁명기의 언어는 사회정치적 이해관계를 형성하고 이데올로기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혁명의 정치문화는 이전 정치문화의 연장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계급의 수사학, 상징, 실행에서 비롯되었다고 결론내린다.

 

앙시앵 레짐 연구

 

(1) 베이커의 담론 분석      베이커는 언어야말로 사회적 정치적 현실을 만들어내는 결정적 요인이며, 따라서 정치적 사건으로서의 대혁명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유용한 방법은 담론분석을 통한 정치적 담론의 재구성이라고 말한다. 그는 절대주의에 반대해 앙시앵 레짐 시대 말기에 나타난 정치체제에 관한 세 가지 담론들 사이의 긴장과 모순이 앙시앵 레짐 말기의 새로운 정치문화와 정치적 투쟁을 야기했으며, 그 결과 나타난 정치적 담론의 변형은 1789년 이후의 혁명 역사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해석의 토대인 언어로의 전환은 미국 밖에서는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했으며, 샤르티에는 베이커의 분석에 담론과 함께 핵심을 이루는 실행에 대한 분석이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2) 샤르티에의 실행과 담론 분석      샤르티에는 프랑스 혁명의 문화적 기원에서 경제적 논리에 따른 계급구분이나 정치사적 개념틀을 따르기보다, ‘담론실행의 분석을 통해 새로운 사회적 현실을 만들어내는 집단들에 대한 미시적 연구에 집중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계몽철학서적이 제시한 사고방식이 많은 독자들에게 확산되면서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는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는 명제를 거부하면서, 계몽사상가들이 죽은 후 혁명가들이 혁명의 목적을 위해 그들의 작품과 단어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냄으로서 계몽사상의 혁명적 모델을 발명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탈기독교화는 계몽철학사상의 확산의 결과가 아니라 교회 내부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며, 왕의 탈신성화 역시 계몽사상의 확장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계몽사상이 성공할 수 있었던 조건이었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맺음말

 

프랑스 혁명 연구에서 계급갈등에 근거한 사회경제적 해석은 지도적인 위치를 수정주의 해석에 양보했으며, 연구영역은 더욱 개방되고 유연하며 흥미진진해졌다. 프랑스 혁명을 일괄적으로 받아들이는 역사가들이 점점 줄어드는 반면, 다양하고 서로 모순되는 혁명의 요소들을 파악하고 연결시켜야 한다는 역사가들의 목소리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1) 새로운 정치문화적 접근은 혁명의 사건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역사를 움직이는 힘으로 사회경제적 구조보다 정치문화에 집중하면서 혁명의 복합성을 재발견했다. (2) 정치문화적 연구는 언어로의 전환이라는 새로운 연구방법을 받아들여 정치적 사건들뿐 아니라 정치적 유토피아에 대한 연구나 혁명기의 주요 표상들에 대한 연구에까지 그 영역을 확장했다. (3) 정치문화적 접근은 앙시앵 레짐 사회를 변화의 역동성을 담지한 능동적인 사회로 보게 되었고, 혁명기와의 단절보다는 연속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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