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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역사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이재근 지음, 복있는사람 펴냄)

by 서음인 2020. 7. 26.

이 책은 에든버러 대학에서 세계기독교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광신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가 2014년도에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행한 ‘20세기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라는 강연을 토대로 집필된 책이다. 저자는 대부분의 비서양 지역 개신교회와 마찬가지로 한국 개신교회 역시 19세기 복음주의 운동의 산물인 세계 선교운동을 통해 탄생하고 성장했으며, 따라서 복음주의에 대한 신학적 · 역사적 정의를 내리고 그 지형도를 그리는 것은 한국 개신교인의 과거 및 현재의 정체성을 파악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 작업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20세기 복음주의의 주요 사건과 인물, 주제를 이전 300년 동안의 영미권 복음주의의 역사와의 연관성 속에서 개괄적으로 서술해 나가며, 필요한 경우에는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와의 연관성을 함께 살핀다.

 

이 책은 저자의 스승이기도 한 브라이언 스탠리의 복음주의 세계확산 : 빌리 그래함과 존 스토트의 시대와 내용과 체제에서 유사한 부분이 많다그러나 이 책이 스탠리 책의 단순한 동어반복이거나 해설인 것만은 아니며, 눈밝은 독자라면 스탠리가 결론에서 제기했던 의문이 이 책에서 확신으로 바뀌어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주로 영미권의 학자층을 겨냥해 쓰여져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는 스탠리의 책에 비해, 동일한 내용을 한국 기독교의 맥락과 관점에서 친절하게 설명하는 이 책이 훨씬 읽기 쉽고 흥미진진하다. 스탠리의 책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내 신앙의 심층에 자리한 중요한 지층들을 하나하나 발굴해 나가는 흥미로운 고고학 탐사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용을 요약한 후 개인적 단상을 덧붙인다.

 


내용요약  



지형도 : 20세기 복음주의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복음주의 : 역사적 정의   복음주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뜻하는 복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복음적 · 성경적 신앙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16세기 복음주의자는 복음을 따르기 위해 로마가톨릭에 저항한 루터파를 의미하며, 18세기 이래 복음주의자는 교권주의나 세속주의에 반대해 신앙과 경건, 부흥을 열망함으로써 복음이 주는 생명력과 갱신이 이끌린 사람들을 지칭했다. 20세기의 복음주의자는 근본주의의 반지성 · 반문화적 태도와 자유주의의 반성경적 태도에 저항해, 성경에 근거한 신앙을 붙들면서 지성과 문화 영역에서도 그리스도의 주권을 지키려는 신앙인을 의미한다. 복음주의는 특정 교파나 신학 체제를 독점적 배타적으로 따르지 않으며, 양보할 수 없는 핵심사항을 공유하는 자들과는 교파를 초월해 서로 협력하고 연합하려는 이들이다.

 

복음주의 : 베빙턴의 사각형   가장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복음주의의 정의는 데이빗 베빙턴의 베빙턴의 사각형이다. (1) 회심주의는 이전에 살던 죄인의 신분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돌아서는 극적인 또는 은근한 회심의 경험을 강조한다. (2) 십자가 중심주의는 회심의 근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특히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의미한다. (3) 행동주의는 그가 수용한 신앙을 전도선교또는 사회참여 및 사회정의의 형태로 다른 사람과 나누려는 태도로, 기존의 개신교 정통주의와 다른 복음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다. (4) 성경주의는 성경이 모든 영적 진리를 품고 있는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과 법칙이라는 주장으로, 에큐메니칼 진영과 복음주의권을 나누는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다. 이 책은 20세기 복음주의의 주요 흐름을 세계기독교(2), 복음주의 성경관(3), 복음주의 변증학(4), 사회참여(5), 오순절과 은사주의(6)의 순서로 소개한다.

 


세계화 : 영미 복음주의는 어떻게 세계기독교로 부상했나


 

20세기 세계 기독교 지형의 변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은 기독교 세계의 역사 전개에서도 결정적 의미를 지닌 해다. 낙관적 기조의 고전적 자유주의 신학이 퇴조하고 칼 바르트가 주도하는 신정통주의 위기 신학이 세계 신학계의 주도권을 획득했다. 제국과 본국 교회, 선교지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전통적인 서구 중심의 기독교세계와 세계선교 체제가 붕괴했고, 선교의 모국이었던 유럽 대륙은 급격한 세속화가 진헹되었다. 세속 국가로 출발했음에도 많은 부흥으로 세속화의 속도가 유럽보다 늦었던 미국에서도 전통적 기독교가 근본주의 · 복음주의 · 은사주의 등으로 분화되었으며, 지속적으로 세속화가 진행되고 있다. 서구에서 기독교가 쇠퇴의 길을 걷는 반면, 세계 기독교의 중심은 아시아나 아프리카 같은 남반구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


비서구 기독교의 부상과 세계기독교학    비서양 기독교의 부상과 성장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세계적으로 알린 인물은 역사학자 앤드류 월스다. 그는 교수선교사로 시에라레온에 파송받아 초대교회사를 가르치던 중 아프리카 기독교야말로 그가 가르치던 초대교회의 모습과 더 가까울 수 있음을 깨닫고 귀국해 에딘버러 대학에서 비서양 기독교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이러한 월스의 생각에 공감하는 마크 놀, 라민 산네, 브라이언 스탠리, 데이나 로버트, 옥부 칼루 윌버트 섕크같은 학자들에 의해 세계기독교학이 탄생했다. 그들에 따르면 비서양 기독교는 서양인들이 그들에게 전수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믿지 않는 복음주의 신앙을 전수해 지키고 있으며, 세속주의와 다원주의의 영향으로 서양 기독교가 포기해버린 선교 역시 주도해가고 있다(역선교).



성경과 신학 : 복음주의자는 성경을 어떻게 읽었나


 

미국의 신복음주의    1947년을 기점으로 고립적이고 반지성적이며 반문화적이었던 근본주의자들과 달리, 보수적 신앙을 견지하되 지성적이고 진취적이며 사회에 대한 책임을 망각하지 않는 기독교를 추구하려는 일련의 신복음주의자들이 등장했다. 신학자로는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을 쓴 칼 헨리가, 목회자로는 보스턴 파크스트리트 교회의 담임목사였던 해럴드 오켕카가 이 그룹을 대표했으며, 이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교회기관인 전미복음주의협회(NAE)는 칼 메킨타이어로 대표되는 극단적인 근본주의 그룹과 WCC 계열의 에큐메니칼 그룹에 모두 반대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확고히 했다. 그들은 자신들과 동일한 생각을 가진 후세들을 키우기 위해 풀러 신학교를 세웠으며, 그들의 대변지였던 크리스챠니티 투데이는 역사상 가장 발행 부수가 높은 기독교 잡지가 되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운동을 빠른 속도로 대중화시킨 인물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이었다.

 

온건한 영국 복음주의   모든 면에서 온건하고 중도적이었던 영국에서는 미국과 달리 복음주의와 근본주의, 복음주의와 자유주의를 날카롭게 분리하는 분위기가 강하지 않았다. ‘정통신학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갈라서고 분열하는 길을 택했던 미국과 달리,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의 복음주의자들은 신학적 차이로 교단을 떠나기보다 내부에서 복음주의의 목소리를 유지하려고 했다. 존 스토트와 제임스 패커, 고든 웬함, 알리스터 맥그래스. 크리스토퍼 라이트같은 영국 성공회 복음주의자들의 글은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글에 비해 어조가 부드럽고 신학적으로도 온건하고 세련되다. 성공회 사제였던 존 스토트는 다양한 저술들을 통해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를 포괄하는 지적이고 온건하며 균형 잡힌 복음을 소개하며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고, 비국교도였던 로이드 존스는 설교를 통해 개혁신학을 소개하며 특히 한국 장로교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나 분리주의적 성향으로 영국 복음주의 내에서는 고립된 소수파가 되었다.

 

영미 복음주의의 성경관과 성경연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복음주의자들이 주류 교단에 속해 있었고, 신학교가 아닌 명문 종합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유명한 복음주의 출판사들을 포함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중 지성적이고 학문적인 성향이 강했던 학생선교단체인 IVF에서 출발한 틴들하우스와 틴들연구회는 F.F. 브루스나 하워드 마샬, 톰 라이트, 레온 모리스, 조지 래드, 부르스 메츠거 같은 탁월한 성서학자를 배출했다. 현대 복음주의 신학과 지성을 주도하는 인사들의 대다수가 영국에서 나왔으며, 이 현상은 복음주의권 신학교의 교수가 되려고 하는 미국 학생들의 영국 유학을 통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1960년대 이후 풀러 신학교를 포함해 보수적인 신학교에서도 성경관에서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보이고 있으나, 1978년의 시카고 성경무오선언이나 1985년 남침례교단의 온건파 축출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 엄격하고 문자적인 성경무오와 보수적 사회관을 유지하려고 하는 입장도 여전히 강력하다.



지성과 변증 : 복음주의자는 어떻게 자기 신앙을 변호했나


 

계몽주의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    인간의 자율성과 이성의 능력을 신뢰하는 계몽주의는 18세기 이후 서양의 지배적 사상이 되었으며, 기독교는 이에 대해 네 방식으로 반응했다. 계몽주의를 기독교의 적으로 보고 이성을 포기하거나 종교와 분리시키고자 하는 흐름으로 경건주의 운동이나 복음주의 부흥의 일부에서 나타났다. 세속화의 물결에서 교회를 지켜내기 위해 외부와의 접촉을 단절한 채 신앙을 사유화하는 것으로 20세기 유형의 근본주의나 종교개혁 시기의 일부 아나뱁티스트가 이에 해당한다. 기독교 신앙을 계몽주의에 적응시키는 흐름으로 19세기 초반 미국의 유니테리언주의나 19세기 중반 이후 독일에서 시작된 고등비평이 이에 해당한다. 기독교 신앙을 붕괴시키는 이성에 대응해 이성이라는 무기로 맞대응하자는 주장으로 변증학이 이에 해당한다. 찰스 하지나 벤자민 워필드 등이 주도한 구프린스턴 신학에서는 외부 학문이 기독교를 공격해도 진리의 저장고인 성경에서 필요한 본문을 꺼내 적절히 조합하면 충분히 대처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와 계몽주의의 관계 : 적대적 동반자    지난 300년간의 기독교 역사는 통념과 달리 당대의 시대정신이었던 계몽주의와 적대적 동반자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 현대 복음주의의 기원인 1차 대각성 운동의 주역이었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신앙감정론에서 철저하게 이성적 방식으로 감정적 신앙을 변증했다. 감리교의 창시자였던 웨슬리 형제는 옥스퍼드 출신/성공회 소속 중산층 사제들로서 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도 신비적 현상을 강조하지 않았으며, 이는 휫필드와 에즈베리의 영향으로 뜨거운 체험을 강조하게 된 미국 감리교와 많이 달랐다. 근대선교의 아버지인 윌리엄 케리가 주도한 근대 선교운동은 당대의 빅토리아 시대 중산층 신자들이 가졌던 계몽주의 정신의 종교적 표현이었으며, 피어선과 무디에 의해 촉발되어 세계선교의 동력이 된 학생자원운동 역시 계몽주의의 핵심인 낙관주의적 사고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또한 찰스 피니와 자원운동단체에 의해 주도된 2차 대각성 운동에도 인간의 능력을 긍정하는 계몽주의의 영향이 있었다.

 

대표적 변증가들 I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의 결과로 탄생한 미국의 변증가들은 예외 없이 개혁주의자이거나 칼뱅주의자이고, 변증을 통해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분리하려는 경향이 있어 냉랭한 느낌을 준다그러나 전형적인 복음주의자가 아닌 영국의 변증가들은 목회적이거나 선교적이고 주로 문화적인 접근을 통한 변증을 시도하기 때문에 미국 변증가들보다 훨씬 따뜻한 느낌을 준다 미국 변증학의 두 중심은  구 프린스턴/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계열의 영미 개혁주의와 ② 칼빈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네델란드계 개혁교회였으며, 전자가 좀 더 교회 중심적이고 교리 중심적이라면 후자는 자신들의 신학을 교회와 가정뿐 아니라 사회에도 적용시키려고 시도한다.

 

대표적 변증가들 II     미국의 대표적인 변증가로는 기독교가 진리라는 것을 전제할 때만 참된 기독교 변증학이 성립한다는 전제주의적 변증을 주장한 코넬리우스 반틸 성경의 명제들이 그 자체로 진리라기보다 받아들이는 이가 반응을 보일 때만 진리가 된다고 주장한 에드워드 카넬 모순율/비모순율과 성경이 명제적 계시의 저장고라는 주장에 근거해 증거주의적 변증 전통을 계승한 칼 헨리 ④ 회의적인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 분석을 통해 기독교를 변증했던 프란시스 쉐퍼 복음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무신론 학자들에게 개혁파 인식론의 학문적 신뢰성을 고양시킨 엘빈 플란팅가 등이 있다. 이에 비해 영국에서는 세속화와 계몽주의 사상의 지적 토대가 얼마나 취약한지 증명하면서, 공적 진리로서의 복음과 복음의 대리자로서의 선교적 교회를 강조한 레슬리 뉴비긴 합리적 논증보다 상징과 은유에 담긴 메시지를 통해 암시적이고 내재적인 기독교 변증을 수행했고, 북미 복음주의자들이 가장 사랑한 작가였던 C.S. 루이스등이 대표적이다.  



공공성 : 로잔대회 이후 복음주의는 어떻게 달라졌나

 


복음주의 사회성의 스캔들     20세기 초반의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은 총체적이고 균형 잡힌 역사적 복음주의가 사회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는 근본주의로 정체를 바꾸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중에서도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가난을 영속화하는 경제 구조의 개혁을 위해 일하는 것이며 구원은 인간 사회를 하나님 나라로 변혁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월터 라우셴부쉬의 사회 복음은 러시아 혁명을 접한 동시대의 복음주의자들이 사회에 대한 모든 논의에 두려움과 적대감을 갖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47년 칼 헨리의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을 시작으로 셔우드 워트의 복음주의자의 사회적 양심(1967), 짐 윌리스의 더 소저너스창간(1975), 론 사이더를 포함한 일련의 복음주의자들이 시카고에 모여 발표한 복음주의 사회관심 선언’(1973)등이 이어지면서 복음주의자들의 사회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로잔대회와 로잔 언약     빌리 그레이엄이 웁살라에서 열린 WCC 대회의 구호인 인간화에 반대해 복음전도에 중점을 둔 선교대회로 의도했던 로잔대회는, 영국인 존 스토트의 참석으로 지리적 · 문화적 · 신학적으로 명실상부한 전 세계적인 대회로 발돋움할 수 있었으며, 이 대회에서 주목을 받은 두 가지 주제는 랄프 윈터와 도날드 맥가브란이 주창한 미전도 종족 운동남미 출신의 급진적 복음주의자들이 강조한 사회정의와 급진제자도였다. 로잔대회는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일방적이고 보수적인 성향과 지배 의지를 무력화시키고, 주로 남미의 급진 복음주의자들이었던 비서양인들이 세계 복음주의 신학의 방향을 전환시킬 만한 목소리를 낸 첫 대회로 평가받았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나온 모든 목소리를 조화롭고 균형 있게 조율해 복음전도의 우위성을 인정하면서도 사회참여를 전도의 한 영역으로 포괄하는 로잔 언약을 만들어낸 인물이 로잔언약 입안위원회 의장이었던 복음주의의 the' 대부 존 스토트였다.

 

로잔 이후     로잔대회 직후 성공회 특유의 중용 정신과 존 스토트의 활약을 목도한 영국 복음주의자들은 이 대회를 극찬했으나,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이 대회가 복음전도와 세계 복음화의 우선성을 충분히 지켜내지 못했다고 우려했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미국 기독교를 정면으로 비판함으로서 엄청난 충격을 던졌던 올란도 코스타스나 르네 파디야, 사무엘 에스코바르 같은 남미 복음주의자들은 미국에 자리를 잡고 진보 복음주의/급진적 제자도 그룹인 로널드 사이더, 짐 월리스, 존 요더 등과 협력하면서 복음주의권 내에서 더 강력한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로잔대회 이후 한동안 교회성장학과 미전도종족 전도 주제가 강조되었으나, 복음의 전체성과 전인성을 강조한 마닐라 대회’(1989), “온 세계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계에라는 표어 아래 '하나님의 선교'를 창의적으로 발전시킨 스토트의 제자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주도한 케이프타운 대회’(2010)를 통해 사회정의 주제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고 있다.

 


오순절 : 오순절 및 은사주의 운동은 세계 복음주의 지형을 어떻게 바꾸었나

 


세계 기독교의 오순절화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역동적이고 활발하게 확산되는 기독교 신앙은 오순절 운동이며, 2000년도에 전 세계에서 자신을 오순절 신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전체 기독교인의 25%에 달했다. 오순절 신앙은 1900-10년 사이에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교회사의 획기적 전환기로 보고 성령세계와 방언을 체험한 사람들이 새로운 교단을 형성하면서 등장하기 시작한 고전적 오순절주의1950년 이후로 방언뿐 아니라 예언 신유 같은 성령의 모든 은사를 고르게 강조하면서 자신의 교단을 떠나지 않은 채 기성 교회를 갱신하려 했던 은사주의1990년대에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을 통한 영적 전쟁과 치유, 축귀를 강조하던 목회자 존 윔버와 풀러신학교 교수 피터 와그너로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3의 물결오늘날에도 사도와 선지자가 존재하기에 새로운 종교개혁이 우리 시대에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 개혁운동등으로 나뉠 수 있다.

 

오순절 운동의 기원과 특징      오순절 운동의 기원은 오순절 운동이 18세기 영국 감리교와 19세기 미국 성결운동의 성화 교리/체험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1906년 윌리엄 시모어가 일으킨 아주사 거리의 부흥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미국기원설과 오순절 운동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고 강조하는 다원기원설로 나뉜다. 오순절주의는 복음주의의 특징을 공유하지만 특징적인 주장도 있다. 구원을 받은 후 더 큰 능력이나 더 높은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방언 등의 은사로 입증되는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 영혼구원자 · 치유자 · 성령세례자 · 재림하실 왕이라는 그리스도의 네 역할을 모두 인정하는 완전한 복음이 필요하다. 종교개혁의 이상인 평등주의를 성공적으로 성취했다고 주장한다. 이미지, 제스쳐, 드라마 같은 요소가 포함된 구전을 통해 전파되는 민중신앙의 특징을 보인다. 낭만주의, 경건주의, 체험주의, 감정주의적 특성으로 인해 반지성, 반합리, 탈계몽 신앙의 성향을 보인다. 특히 CCM 음악을 통해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오순절 운동의 분화      미국에서 하나님의 성회는 1943년 전미복음주의협의회에 가입하면서 복음주의권 주류로 편입된 후로, 좀 더 세련되고 교양 있는 형태의 오순절 신앙을 추구한다. 그러나 오순절주의는 단일 교단이나 운동이 아니며 늦은비 운동, 케네스 헤긴의 번영 신학, 베니 힌의 신유 사역, 빈야드 그룹의 토론토 블레싱, 신사도운동 등 다양한 집단으로 분화했다. 3 세계의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는 독립한 후 서구의 교파교회를 버리고 아프리카 독립교회(AIC's)를 세웠으며, 이들의 신앙(‘에티오피아 신앙’)은 아프리카 토착종교의 영향을 받아 은사주의의 성향이 강하다. 또한 남미와 한국의 오순절교회는 친미, 친자본, 친독재, 번영신학, 반공 근본주의의 성향을 띠었다. 미국은 성공회 고교회파가 은사주의의 모판이었던 반면, 영국에서는 성공회 저교회파 복음주의자 그룹이 은사주의의 중심지가 되어 알파코스’를 만들었다. 오순절 운동에 대해서는 다양한 신학적 평가가 가능하지만, 이 운동이 지난 100년간 기독교의 지형을 바꿔 왔고 그 지위와 영향력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다는 것은 분명하다.

 


개인적인 단상

 


1. 저자는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이자 규범이라는 성경주의야말로 복음주의자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말씀대로를 관용어처럼 사용하는 한국의 대다수 보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나 강조하는 성경주의, 수천 년 전 고대 근동이라는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기록된 성경의 내용 중 유교적 칼빈주의라는 자신들의 독특한 기독교 하부 문화를 정당화해주는 구절에 대해서만 선별적으로 작동하는 선택적 문자주의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그들이 고대 근동의 문화(와 그와 코드가 맞는 자신들의 유교적 칼빈주의’)라는 목욕물을 버리다가 복음이라는 아기까지 잃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을 이해하지만, 아기를 수호하기 위해  수백년 수천년씩 묵은 더러운 목욕물까지 복음의 본질이라고 강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레이첼 헬드 에반스가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에서 밝혔던 성경은 모두 문화적 상황에 놓인 것이기에 특정한 편견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과학적 객관성의 한 유형으로서 이상적인 성경 읽기는 사랑이라는 편견으로 창조적인 해석을 하는 접근 방식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라는 생각에 깊이 공감한다.

 

2. “성경적 종말론 위에 올바른 기반을 마련하는데 성공하느냐의 여부야말로 은사주의가 복음주의의 미래가 될 수 있느냐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그의 스승 브라이언 스탠리의 유보적 태도와 달리, 저자는 은사주의를 특별한 조건이나 유보 없이 훨씬 적극적으로 복음주의의 현재이자 미래로 받아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이미 은사주의가 세계기독교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엄연한 현실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자가 서구인들에 비해 종교적 문화적으로 은사주의 기독교에 훨씬 익숙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 같다. 그러나 지적 여정의 후반기에 은사주의로의 회심을 감행해 모두를 놀라게 했던 왕년의 세속화 신학자하비 콕스는 그의 책 영성·음악·여성에서, 영향력이 커진 은사주의가 가난한 자들의 희망에서 부와 번영의 복음으로 변질되고 있고, 하나님 나라의 현현이었던 이적과 기사는 부흥을 위한 볼거리로 전락하고 있으며, 억눌린 자들의 변혁 열망은 애국 지상주의나 열광적인 종교권리의 주창으로 바뀌어가고 있다고 우려한다. 과연 현재의 은사주의는 복음주의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그의 스승인 브라이언 스탠리의 우려는 완전히 불식된 것일까?


3. 복음주의의 미래는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마크 놀은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에서 1990년대에 일어난 복음주의의 지적 갱신은 복음주의가 가진 지적 자원에서 나온 열매가 아닌 미국의 주류 기독교나 유럽의 기독교, 또는 가톨릭과 같은 다른 기독교 전통에서 제시하는 사상적 틀을 활용한 결과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북미의 복음주의자들은 미국 복음주의의 독특성 중 많은 것이 기독교의 본질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이 있는 신학적 통찰로부터 사고의 원리를 발전시키는 다른 신학 전통으로부터 배워야 하며, 세상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곧 하나님을 찾는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계 전반을 탐구하기 위한 진지한 지성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복음주의가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된 자신의 요새에서 빠져 나와 풍성한 2000년 기독교 역사라는 대양을 향해 용감한 항해를 떠나는 그 자리, 그리고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라는 격언에 따라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최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피조계를 탐구하는 그 자리야말로, 복음주의의 미래가 열리는 자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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