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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예술/미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1. 돈황과 하서주랑, 2. 막고굴과 실크로드의 관문, 3. 실크로드와 오아시스 도시 (유홍준 지음, 창비 펴냄)

by 서음인 2020. 8. 4.

1993년 제 1권인 남도답사 일번지가 처음 나온 이래 지금까지 25년간 총 400만부 이상이 판린 한국 출판계의 대표적인 밀리언셀러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시리즈가 한국과 일본을 거쳐 마침내 중국에까지 이르렀다. 이번에 세 권으로 완간된 중국편은 서안(西安)에서 출발해 하서주랑(河西走廊)과 돈황(敦煌)을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의 여러 오아시스 도시를 통과한 후 카슈가르에 이르는 실크로드의 동쪽과 중앙 구역의 답사기다. 1권에서는 실크로드의 출발점인 서안에서 감숙성의 하서주랑을 지나 돈황에 이르는 여정이 소개되고, 2권에는 실크로드의 관문 돈황과 전설적인 석굴인 막고굴(莫高窟)의 답사기 및 돈황 장경동(臟經洞)의 문서들이 세계로 흩어지게 된 사연이 담겨 있으며, 3권에서는 일찌기 서역(西域)이라 불렸던 곤륜산맥과 천산산맥,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의 여러 오아시스 도시를 살핀다.  


저자인 유홍준 명예교수는 이번 시리즈에서도 지리 · 역사 · 문명 · 불교 · 문학 · 미술 등 인문과 예술과 종교의 제 영역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실크로드 지역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국가와 민족들의 흥망성쇠와 동서의 문명이 교차하며 이 지역에 만들어낸 다채로운 문명과 문화유산들, 그리고 격동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삶을 이어가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고난과 애환을 특유의 유려한 문체에 담아 하나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엮어 냈다. 그는 우리가 중국사를 지나치게 한족 중심으로만 바라본 나머지 우리와 동일한 변강민족이었던 흉노, 돌궐, 위구르, 티베트, 서하의 삶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실크로드의 주도권을 놓고 한족국가들과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지만 자신들의 운명을 지킬 수 있는 강토를 확보하지 못해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거나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로 흡수되고 만 이 유목 민족들의 역사적 자취에 대해서도 애정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살펴나간다


또한 저자는 우리가 장대한 규모를 가졌거나 우리에게는 없는 중국의 문화유산을 볼 때 문화적 열등감을 느낄 수 있으나, 발달된 문명을 주체적으로 소화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왔던 것은 슬기로운 선택이지 열등감을 가질 일이 아니며, 오히려 일본과 달리 중국의 영향에 거의 짓눌릴 정도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지켜왔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도 좋다고 말한다. 또한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장대해진 만리장성이나 굴착이 용이한 사암지대에서 발달한 중국 석굴사원의 예를 들며, 남의 문화를 볼 때 그 자체의 생성과 발전과정을 보면서 세계사적 견문을 넓혀야지 자연환경이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것이 우리나라에 있냐 없냐를 따질 필요나 이유는 없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강인한 생명력으로 3천 년간 독립국가와 문화를 간직하며 살아왔다는 것 자체가 우리 민족의 자부심이요 자랑이며, 꼭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는 것만이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공연히 민족적 자괴감을 갖는 것은 진실로 부질없는 일이라고 일갈한다.

 

저자는 사람들이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다는 무서운 타클라마칸 사막을 통과해 실크로드를 오간 이유는 권력과 총칼이 아닌 자본()과 종교(신앙)의 힘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과연 이 책에서는 그 죽음의 길을 낙타로 왕래하며 부를 축적했던 소그드 카라반들의 이야기와, 현장법사나 혜초 스님처럼 진리가 담긴 불경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서역으로 향했던 존경스러운 구법승(救法僧)들의 이야기를 자주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실크로드 도시들을 방문한 후 그것이 지나가는 자들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저자는, 비로소 오아시스 도시에 뿌리내리고 오순도순 살아갔던 서역인들의 숨결과 체취, 그리고 그들이 시련의 역사 속에 남긴 유적에 서린 아픔과 슬픔과 애잔한 소망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크로드란 길로 나 있는 이 아니라 오아시스 도시에서 오아시스 도시로 이어지는 의 연결이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저자의 답사기는 전쟁과 이동과 교류의 이야기인 이라는 씨줄과 정주와 문명과 삶의 이야기인 이라는 날줄이 합쳐져 직조된 새롭고 매혹적인 창조물이라 할 수 있으리라새로운 지식과 원숙한 통찰, 여행의 흥분과 책읽기의 즐거움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이 흥미진진한 여행기에서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몇몇 부분을 소개하는 것으로 저자와 함께 한 여정을 마치기로 한다.

 


내용 엿보기 



하서주랑(河西走廊)과 우리 역사    우리는 그동안 동아시아 역사를 중국 역대 왕조사 중심으로만 인식하여, 한무제, 위청, 곽거병만 생각하고, 흉노, 돌궐, 위구르, 티베트, 서하의 입장은 개념 속에 넣지 않은 혐의가 있다. 한족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도 변강민족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변강민족의 삶은 염두에 두지 않고 한족의 입장에서 중국사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 오호십육국 시대가 끝나고 남북조시대,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로 이어지는 동안 이 지역(하서주랑, 河西走廊)은 흉노의 뒤를 이은 유목민적인 돌궐제국, 위구르 제국, 탕구트족의 서하 제국등과 끊임없는 쟁탈전을 벌였다. 유목민족들로서는 유목문화에 농사를 짓는 정주 문화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자기 강토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이에 반해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3천 년간 민족국가를 이어왔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여기에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자랑이 있다. 내가 중국 답사 일번지로 하서주랑 길을 택한 것은 이곳에 오면 우리의 역사가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한무제의 무릉을 지나며 )


북위의 불상 : 수골청상(秀骨淸像)     선비족계의 탁발씨가 세운 북위(北魏, 386~534)는 유례없는 강력한 불교국가로 수많은 불교유적을 남기며 중국 불교미술의 제1차 전성기를 맞이했다 ..... 북위시대 불상들은 처음에는 후진시대의 서역 양식에 의지하다가 점차 벗어나 마침내 중국 불상으로 토착화되었다. 북위시대 불상을 보면 부처님의 얼굴이 서역인이 아니라 중국인의 모습을 하고 있고, 법의도 남쪽 인도의 얇은 사라를 걸친 편단우견이 아니라 북부 중국의 기후에 맞는 두툼한 옷을 양 어깨에 통으로 걸치고 있으며 옷자락의 주름이 겹겹이 흘러내린다. 신체는 이 시대의 미인관에 따라 호리호리한 편이고 목이 굳센 듯 길다. 그래서 중국미술사가들은 북위와 서위시대 불상을 묘사할 때 수골청상(秀骨淸像)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빼어난 몸매에 해맑은 인상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 이는 중국 불교미술의 2차 전성기인 당나라 시대의 불상이 풍만하고 역강한 육체미를 자랑하고 있는 것과 크게 구별된다. 북위시대 불상엔 소박하고 진술한 고졸미가 있고 당나라 시대의 불상엔 화려하고 역동적인 사실미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나라 시대 불상에는 절대자의 위엄이 강조된 반면, 북위시대의 불상엔 절대자의 친절성이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북위시대 불상의 보고, 맥적산석굴 ) 


중국의 석굴(石屈)과 우리의 산사(山寺)     맥적산석굴을 보았으면 중국엔 참으로 위대한 석굴문화가 있었구나 라고 감동하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지 왜 우리나라에 이런 전통이 없냐고 기가 죽어야 합니까? 이는 자기 문화에 대한 자신감 내지는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문화란 그 나라의 자연환경에 맞춰 구현되는 법입니다 ...... 인도와 중국에 석굴사원이 유행한 것은 이 지역의 자연환경 때문이었습니다. 인도는 건조한 아열대성 기후 때문에 일찍부터 석굴이 적격이었죠. 인도의 석굴사원은 굴착이 용이한 사암절벽에 조성된 것이었습니다. 불교가 실크로드를 타고 들어오면서 중국에는 자연스럽게 석굴사원 형식이 전래되었습니다. 쿠차의 키질석굴, 돈황의 막고굴 또한 사암입니다. 이에 비해 한국과 일본에는 사암이 거의 없기 때문에 석굴사원의 전통이 없습니다 ..... 그러면 인도나 중국의 석굴사원에 필적할 만한 우리 자연에 맞는 불교의 신앙 형태를 구현한 것이 있느냐는 물음이 나올 만합니다.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산사(山寺)입니다. 인도에 가서 산사가 있느냐고 물어보십시오. 중국과 일본에 가서 우리처럼 아늑하고 운치 있는 산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보십시오 ..... 이제 우리는 남의 문화를 볼 때 그 자체의 생성과 발전과정을 보면서 세계사적 견문을 넓혀야지 그것이 꼭 우리나라에 있나 없다는 생각할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나는 꼭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올바른 생각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지만 공연히 민족적 자괴감을 갖는 것은 진실로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에 석굴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산사가 있다 ) 


당나라 불상 : 삼굴(三屈)의 자세     병령사석굴의 당나라 시대 마애불들은 아주 높은 부조로 돋을새김을 하여 벽에서 튀어나올 듯한 사실감과 생동감이 있다. 보살상들의 자태는 한결같이 목과 허리에서 굴곡을 주어 S자로 몸을 비틀고 맵시를 뽐내고 있다. 누가 보아도 이게 불상인가 싶을 정도로 대단히 육감적이다. 보살상의 이런 자세는 얼굴, 상반신, 하반신이 따로 굽어 있다고 해서 삼굴(三屈)의 자세라고 한다. 삼굴의 자세는 인도에서 토속신의 표현에 먼저 나타난 것으로 트리방가라고 부른다 ..... 굽타시대에 보살상을 경직된 자세가 아니라 유연한 자태로 나타내는 데 응용되었고, 급기야 당나라 시대 불상에 와서는 이처럼 육감적인 삼굴의 자세로 나타났다. 이 삼굴의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말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통일신라 때 크게 유행하여 통일신라시대 보살의 전형적인 포즈가 되었다. (삼굴의 자세 )


불교의 조형미술이 지닌 힘      인도에서 일어난 불교가 중국으로 건너와 1천 년간 동아시아의 고대사회를 이끈 신앙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큰 요소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는 불교의 개방적인 신앙 형태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친절한 안내에 있었다. 전란이 계속되며 날마다 죽음과 맞닥뜨린 오호십육국시대에 기존의 유교는 민중에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는 중국에 안착할 수 있었다 ......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신앙을 나타낸 형식으로서 미술의 힘이다. 유교는 병령사석굴이나 맥적산석굴 같은 제불의 축제가 이루어지는 한마당을 베풀지 않았다. 이에 비해 불교는 미술을 통해 누구에게나 알기 쉽게 부처님의 세계를 일러주었다. 대중은 미술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이해하고 그에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술은 어느 민족에게나 통할 수 있는 국제적인 언어다. 그것은 확실히 조형예술의 힘이다. (불교의 조형미술이 지닌 힘 )


그레이트 게임혹은 인문 침략      돈황의 탐사를 주도한 것은 러시아, 독일, 영국이었다 ...... 이들은 경쟁적으로 탐험에 나서 사막 속의 비밀을 밝혀내는 첫 번째 학자가 되고 싶어했다. 그들로서는 학문적 의욕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제국주의가 낳은 산물의 하나였다. 문필가 러이어드 키플링은 이를 거대한 경쟁이라는 뜻의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표현 역시 제국주의적 시각이다. 그들로서는 게임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것은 인문 침략이라고 생각한다. 제국주의 침략의 피해를 입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그 점에서 지리학과 고고학은 제국주의의 팽창과 함께 발전한 학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니증에는 민속학, 미술사학, 심지어는 종자 확보를 위해 식물학까지 여기 가담했다. 여기에 투입된 학자들은 자신이 이 거대한 음모에 동원되었다는 의식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들로서는 오직 학문적 실천이었을 뿐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 탐사를 마치고 발굴한 유물을 당연히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몽땅 가져간 것을 보면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제국주의의 자식들이었다.(‘그레이트 게임혹은 인문 침략)


실크로드, 돈과 신앙의 길!      호기심과 방랑기를 가진 동물인 인간은 2천 년 전부터 타클라마칸 사막을 뚫고 기어이 동서교역의 길을 열었다. 타고난 장사꾼인 소그드의 대상들은 페르시아로부터 낙타에 진귀한 물건을 싣고 중국으로 와 비단으로 바꾸어 다시 실크로드를 건너 로마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교역했다. 로마에서는 비단과 금을 똑같은 무게로 거래했고, 중국에선 금이면 무엇이든 살 수 있었다. 중국인들에게는 그들이 더없이 귀하게 여기는 호탄의 옥을 팔았다. 죽음을 담보로 한 이익은 막대했다. 대상들이 다니던 이 길을 통하여 인도와 중국의 승려가 오가며 불교가 중국에 전해졌다 .......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힘은 총칼보다도 돈(자본)과 신앙(종교)에서 더 강력하게 발휘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돈황과 서역의 인문지리 )


쿠마라지바와 현장의 불경 번역      쿠마라지바 이전에 중국의 승려와 지식인들은 불교의 경전을 직접 대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불교에 대한 이해도 도교를 비롯한 기존 사상에 비유해 이해하는 격의불교일 수밖에 없었다. 그랬는데 쿠마라지바가 등장해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해줌으로써 비로소 중국의 지식인들도 불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 쿠마라지바는 단순히 언어를 직역만 한 것이 아니라 불교에서 말하는 개념들을 한문으로 옮기려 애썼다. 이리하여 그가 택한 방법은 직역이 아니라 의역이었다. 극락(極樂), 지옥(地獄), 열반(涅槃)이라는 단어는 지금도 그가 번역한 그대로 쓰이고 있다 ....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묘한 것이다. 쿠마라지바로부터 250년이 지나 현장법사는 쿠마라지바의 번역에 대해 궁금한 것이 생겼다. 문장의 아름다움을 이루 말할 것이 없지만 그 원문이 어떻게 되어 있는데 그렇게 번역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현장법사는 천축에 들어가 원전을 구해와 평생을 다해 번역했다. 현장법사는 의역이 아니라 직역을 택했다. 후세 사람들은 쿠마라지바의 번역을 구역, 현장법사의 번역을 신역이라고 하며, 이 둘을 역성(驛聖) 정도가 아니라 율장, 경장, 논장의 삼장에 통달한 삼장법사(三藏法師)라 부르며 영원한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쿠마라지바의 불경 번역 )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책상머리에서 막연히 실크로드를 생각할 때면 동서교역을 위해 낙타를 몰고 가는 소그드 카라반, 또는 불경을 구하기 위해 황량한 사막을 건더던 현장법사나 혜초 스님 같은 구법승들, 도는 서역을 차지하기 위해 중국인과 유목민이 벌인 무수한 싸움을 떠올리곤 했다. 그러나 막상 투르판에 와보니 그것은 지나가는 자들의 이야기일 뿐 오아시스 도시에 뿌리내리고 오순도순 살아갔던 서역인들의 숨결과 체취가 살갑게 다가왔다. 그네들이 시련의 역사 속에 남긴 유적에는 아픔과 슬픔, 그리고 애잔한 소망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오아시스 도시의 숙명 같은 것이었다. 그때 나는 실크로드란 길로 나 있는 선이 아니라 오아시스 도시에서 오아시스 도시로 이어지는 점의 연결이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실크로드에의 유혹 투르판 )


수바시 절터      본래 폐사지(廢寺址)에 오면 종교로서의 불교의 자취는 희미해지지만 역사의 자취가 풍기는 처연함이 일어난다. 불교가 폐기된 흔적이지만 이슬람이 폐불한 벽화의 자취와는 차원이 다르다. 세월의 흐름 속에 한편으로는 사라지면서 한편으로는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사라진 것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남아 있는 것에서 일어나는 스산한 서정이다. 그 폐허에서 살아온 인생과 살아갈 인생을 생각하는 것은 그 나름의 또 다른 종교 감정이 아닐 수 없다 ....... 수바시 절터와 우리나라 폐사지는 다르다. 우리나라 폐사지에는 나무도 있고 흙 속에 파묻힌 주춧돌도 있고 무너진 석탑 부재도 있다, 그러나 이곳 소바시 절터에서는 눈에 보이는 형체와 빛깔이란 오직 흙뿐이어서 자연의 원초적 형태로 회귀하는 것만 같다. 모든 치장이 다 사라지고 남은 것도 종국에는 저 붉고 태양만 타오르는 초르타크산의 일부로 묻혀 버리고 말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렇다고 눈앞의 실체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래서 쿠마라지바는 부처님의 말씀을 이끌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말했는가보다. (폐사지의 서정 )


타클라마칸 사막      모래언덕 능선 깊은 곳으로 올라와 파도가 굽이치는 문양을 그리면서 멀어져가는 사막 깊숙한 곳은 망연히 바라보고 있자니 진정한 탐험가라면 절대로 이 죽음의 사막에 도전하는 것을 거부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벤 헤딘은 거대한 모래 바다가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것을 거역할 수 없었다며 이렇게 말헀다. “저 너머 지평선의 끝에는 고귀한 사구들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솟아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너머 무덤 숙 같은 침묵의 마다 속에 펼쳐져 있는 그 미지의 (...) 아직 아무도 밟아보지 못한 그 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렐 스타인은 단단윌릭 유적지를 찾아 탐험길에 오르면서 어느 날 밤 산기슭의 캠프에서 달빛에 비친 수백 미터 아래의 타클라마칸사막을 이렇게 묘사했다. “마치 나는 끝없는 평원에 펼쳐진 광대한 도시의 불빛을 내려다보는 듯 했다. 저곳이 진정 어떤 생명도, 인간이 존재할 어떤 희망도 허용하지 않은 공포의 사막이란 말인가. 나는 이런 매혹적인 광채를 다시 본 적이 없다....” 탐험가들에게 타클라마칸 사막은 이처럼 공포와 아름다움이 계속 교차하는 곳이었다. (타클라마칸 사막 속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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