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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교의 .변증

떠나보낸 하느님 (돈 큐핏 지음, 이세형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펴냄)

by 서음인 2020. 8. 22.

떠나보낸 하느님은 영국의 성공회 사제이자 종교철학자인 돈 큐핏이 1980년에 쓴 책으로, 세상에 나오자마자 큰 소동을 불러일으킨 끝에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드시 읽지 말아야 할 책이라는 오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이 이렇게 격렬한 의혹의 대상이 된 가장 큰 이유는, 큐핏이 "하느님은 인간 사고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실재론적 하느님 개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반실재론의 입장에서 신학적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큐핏은 하느님은 우리와 구별되는 외부적 객체가 아니라, 영성이 요구하는 종교적 가치들을 보여주는 통합적 상징이자 인간이 도달해야 할 영적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율적이며 책임적인 영적 주체가 되어 사심 없고 보편적인 사랑이라는 원리를 철저히 내면화해 실천하면서 살아가야 하며, 이 과정은 우리가 영적 이상인 하느님과 완전히 연합할 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저자의 생각을 요약한 후 간략한 단상을 덧붙이기로 한다.

 

내용 요약


새로운 기독교   20세기의 서구를 휩쓰는 거대한 세속화의 과정과 교회의 제도적 교리적 쇠퇴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서 종교의 영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가르침에 대한 수동적인 순종보다 영적 자율이 요구되며, 외부에서 부과된 요구나 체계가 아닌 내면화의 과정이 중요해지고 있다. 또한 인간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발전은 신자들 위에 군림하는 '절대군주 하느님'을 시대착오적인 생각으로 만들었으며, 이는 객체적인 유신론과 신학적 실재론을 정당화할 핵심적인 근거가 사라졌다는 의미다. 종교가 영적 진보의 선두로 가아가기 위해서는 관습적인 신학적 실재론과의 단절과 모든 종교적 교리와 주제들의 충분한 내면화, 종교적 · 영적 원리와 실천의 자율적인 수용이 필수적이다.

 

객체적 유신론의 쇠퇴    하느님이 실재로 존재하는 독립된 개체 존재여야 한다는 실재론적 하느님 개념 또는 객체적 유신론은 증거에 의해 입증될 수 없고 인간의 영적 · 도덕적 · 종교적인 자율의 원리를 위협하기에,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 자발적인 종교적 삶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하느님은 세상의 창조하고 절대군주로 통치하는 독립적 실체가 아니며, 하느님의 실재는 사실과 증거를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삶 속에서 종교적 언어와 관행이 갖는 권위를 통해 나타난다. 현대인들에게는 객관적 역사 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태어나고 죽고 부활하는 주관적인 경험이 의미 있는 구원 사건이 된다. 참된 신성은 오직 주관성 안에만 존재한다.

 

철저한 자유의 영성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교리나 윤리가 아니라 영성이며, 교리가 변화해도 영성이 보존된다면 그리스도교 전통의 연속성이 유지될 수 있다. 영성이란 우리가 스스로에게 자율적으로 부과하는 영이 되라는 명령으로, 자연적 필연성의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한 해방에 이르는 철저한 자기 인식과 자기 초월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부름이다. 이 부름은 먼저 죽음의 공포에 두려워 떨면서 절망적으로 삶에 집착하는 옛 자아의 죽음을 요청하기에, 우리는 하느님을 새로운 생명을 주는 존재로 경험하기에 앞서 우리를 심판하고 정죄하는 존재로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계속되는 자기 포기의 과정을 통해 죽음에 대해 죽어야하며, 자율적이고 자유로우며 보편적인 사랑을 가진 사심 없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하느님의 의미   하느님은 영성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종교적 가치들을 인격화해 보여주는 통합적 상징이자, 인간이 열망하고 도달하기 희망하는 영적 이상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종교적 가르침과 요청이 곧 하느님의 뜻이며, 우리 안에 전개되는 종교적인 삶의 드라마가 하느님의 활동이며, 우리 앞에 놓인 종교적인 삶의 목표가 하느님의 본성이다. 이러한 하느님은 독립된 인격이나 실체가 아니라, '영이 되라'고 명령하는 무제약적이고 불변하는 종교적 요청이다. 우리는 자유롭고 자율적이며 책임적인 영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스스로에게 부과하고 그 요구를 이루어갈 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이 과정은 점차 그와 같아져서 마침내 완전히 그와 연합하고 그의 속성을 소유하게 될 때까지 - 즉 영이 될 때까지 - 지속되어야 한다.

 

종교의 언어    종교의 언어는 물리적 세계나 형이상학적 실체를 묘사하는 사실의 언어가 아니라, 듣는 사람의 내면적 변화를 유도하는 실천적이고 고백적인 언어다. 종교적 삶이란 내면적 드라마이며, 영원한 종교적 요청에 대해 우리가 응답하는 이야기다. 따라서 종교적 삶은 이야기로 표현되어야 하며, 종교의 이야기 방식인 신화는 종교적 진리를 전달하는 가장 분명하며 가장 효과적인 전달 방식이다.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믿음체계의 신화적 특성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인정의 과정에 들어섰고 이제 뒤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 신앙은 신화를 사용하지만 신화를 넘어 자율의 세계 속으로 초월해 들어가야 한다.

 

주지주의의 종말    그리스도교 신앙이 불변하는 특정 명제들에 대한 지적 승인이라고 보는 주지주의의 관점은 더 이상 적절치 않으며, 현재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신앙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가치를 좀 더 깊이 내면화하여 오늘날의 새로운 영적 현실인 자율적인 유신론 이후의 의식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기에 충분한 하느님은 철저하게 내면화되고 비객체적인 하느님이며, 기독교는 객관화된 신학적 믿음체계를 저버릴 때에만 영적으로 효과적일 수 있다. 교리의 기능은 세상과 우주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해방 또는 변혁에 대한 치침을 제공하는 영적 삶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하느님 교리의 의미    하느님에 대한 교리는 종교적 요청의 암호화된 영적 지시들이다. (1) 하느님이 지혜롭다는 말은 종교적 요청이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폭로한다는 의미다. (2) 하느님이 거룩하다는 말은 종교적 요청이 모든 세속적 생각들 밖에 있다는 의미다. (3) 하느님이 참 진리라는 말은 종교적 요청이 우리 속에서 창조할 것을 요구하는 도덕적 진리나 정직성이 최고의 가치가 된다는 뜻이다. (4) 하느님은 능력이 있다는 말은 그 종교적 요청이 우리를 무로부터 새롭게 재창조한다는 의미다. (5) 하느님이 정의로운 것은 그 종교적 요청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6) 하느님이 영이라는 것은 그 종교적 요청이 우리로 하여금 영이 되게 한다는 뜻이다.

 

신앙 · 창조 · 섭리    (1)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신앙은 특정한 그리스도교적 가치에 대한 충성의 고백이며,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경험은 우리의 삶 안에 나타나 그리스도교적 가치의 영향에 대한 경험이다. (2) 하느님의 창조에 대한 고백은 하느님이 실재로 세상을 창조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중생과 갱생의 경험을 증언하는 것이자 종교적 관심과 가치들이 우리의 삶에서 최우선의 자리에 오게 된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3)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은 사실에 근거해 인간 역사의 미래를 예견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종교적 관심과 가치들에 신실하다면 그 관심과 가치들이 우리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확신을 고백하는 것이다.

 

부활 · 예배 · 기도    (4) 부활은 예수가 소개했고 예수와 더불어 도래한 자아의 상태이자 구원의 형태이며, 악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이 극대화된 상태이자 영적인 개별화, 창조성, 그리고 반응성이 극대화된 상태다. (5) 예배는 만물을 창조한 초월적이고 전지전능한 절대존재에 드려지는 경배가 아니라, 영적인 자율과 독립의 이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죄인인 예배자가 그 이상에 연합하기를 희망하면서 종교적 가치들을 향한 완전하면서도 사심 없는 헌신을 표명하는 것이다. (6) 기도란 우리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요청에 스스로를 여는 길이고, 스스로 헌신한 그 이상과 가치에 대해 묵상하는 길이며, 우리의 영적 소망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식이다.

 

의지의 행위인 신앙    그리스도교인은 본질상 주지주의자(主知主義者)가 아닌 주의주의자(主意主義者). 종교란 지성의 문제라기보다 의지의 문제이고, 하느님을 인식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느님에 대한 사변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결단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며, 신앙이란 인식을 넘어서는 실천적인 복종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하느님은 자율적이고, 자유로우며, 사심이 없고 누구의 보호나 승인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결단에 의해 완전한 사심 없음과 거룩한 사랑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신적인 의식 곧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또한 우리가 영이 되어 선 자체를 위해 선을 사랑하는 보편적이며 사심이 없는 합리적 자율적 의식을 가지게 될 때에만 완전히 능력 있는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다.

 

최고의 종교적 목표인 사랑    그리스도인들에게 최고의 종교적 목표는 예수의 부름에 응답해 자연적인 필연의 속박에서 해방된 자율적인 영이 되어, 완전한 사심 없음과 능동적 자기 포기, 그리고 보편적 사랑이라는 새로운 원리에 의거해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개인 윤리 차원에서는 거룩하고 보편적인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사회윤리의 차원에서 영적 발전이 일어나는 무대인 역사에 헌신하는 삶으로 나타나게 된다. 종교들 사이에서는 교리의 영역에서보다 영성과 가치의 영역에서 많은 공통점이 발견되며, ‘主意主義의 관점에서 보자면 주요 종교 전통들이 서로 배타적일 이유가 없다. 


개인적인 단상


1. 저자는 하느님이 인간의 정신 외부에 실재하는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영성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종교적 가치들을 인격화해 보여주는 통합적 상징이자 인간이 도달하기 희망하는 영적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저자의 생각은 서방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슐라이어마허와 본회퍼와 불트만과 틸리히로 이어지는 내재적 하나님개념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을 때 도달하게 되는 마지막 지점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독교 신학의 바깥에서라면 이 책에서 칸트나 포이에르바하나 융 같은 이름을 떠올리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관점은 모든 인간이 수행을 통해 성불과 열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사실 저자의 주장은 매우 충격적으로 느껴지지만, ‘기독교라는 외피를 벗겨내고 찬찬히 살펴보면, 불교 문화권에 속한 우리에게 의외로 그렇게 낯설지 않다.

 

2. 그럼에도 기독교의 이름으로 듣는 반실재론은 전통적인 서방 신학의 범주에 익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상당히 당혹스러은 것이 사실이다. 나는 과학의 발달과 자율적 인간의 탄생으로 실재론적이고 군주신론적인 신 개념이 난관에 부딪혔다는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지만, 아직은 하느님을 떠나보낸” 후에 어떻게 기독교 신학이 가능할 수 있는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해 내가 아직까지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견해의 한계는, 하느님은 인간의 사고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인간이 하느님을 직접 인식할 수는 없기에, 하느님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모델과 유추라는 간접적이고 은유적인 신학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비판적 실재론까지다. 어머니 연인 친구』를 읽으며 샐리 맥페이그에게 배운 이 생각은,  이번에 떠나보낸 하느님』을 통해 돈 큐핏을 만난 후에도 아직 바뀌지 않았다.  


3. 저자의 생각 중 가장 공감되는 부분은 종교란 지성의 문제라기보다 의지의 문제이고 하느님을 인식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느님에 대한 사변이 아니라 하느님께 순종해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인이 주지주의자(主知主義者)가 아닌 주의주의자(主意主義者)이고, 신자(Believer)가 아닌 제자(Disciples)가 되어야 하며, 정통신학(Orthodoxy)이 아니라 정통실천(Orthopraxis)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 신학이 명제로 이루어진 진리의 다발인 성경에서 진리의 단편들을 뽑고 논리적으로 재구성해 영원토록 불변하는 진리의 대성당을 건설하는 작업이라기보다, 동시대 사람들이 살아가기에(실천) 가장 적합하고 편리하되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쉽게 고치거나 새로 지을 수 있는 임시 거주지를 짓는 작업에 가까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억압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을 더 잘 실천하게 만들어주는 신학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진짜 정통신학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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