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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교의 .변증

세계관적 성경읽기 (전성민 지음, 성서유니온 펴냄)

by 서음인 2021. 4. 6.

『세계관적 성경읽기』는 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에서 세계관과 구약학을 가르치는 저자 전성민 교수가 『세계관적 설교』에 이어 두 번째로 쓴 기독교 세계관 책이다. 저자는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 내에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는 독선적이고 대결적인 근본주의 신학이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퍼져 있다고 우려하면서, 복음주의 기독교가 추구해야 다섯 가지의 방향(1부 요약 참조)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책의 1부에서 왜 이 다섯 가지 방향을 복음주의 기독교가 추구해야 할 방향으로 제안했는지 설명하고, 2부에서는 한국 기독교라는 콘텍스트에서 생긴 질문을 품고 각각의 방향과 관련된 성경 텍스트를 면밀히 검토한다. 저자는 성경읽기의 활력은 콘텍스트를 예민하게 성찰하고 콘텍스트와 대화할 때 비로소 생기기 시작하며, 이렇게 콘텍스트를 읽고 씨름하며 생긴 질문을 품고 다시 텍스트로 돌아올 때 새로운 텍스트의 세계가 열리게 된다고 강조한다. 작지만 훌륭한 통찰로 가득한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 개인적인 단상을 덧붙인다.

 

 

제 1부 콘텍스트를 품고 다시 텍스트로

 

 

1. 세계관의 자리와 방향을 찾아가는 성경읽기

 

기독교 세계관이 자신을 보편적이고 총체적 완결무결함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면 성경의 활력을 담아내지 못하는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고 만다. 그리고 이는 주변 문화에 영향을 끼치거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 이용되는 대신 두려움과 그 이면인 배제와 혐오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거나 자신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타인을 공격하는 행태로 이어진다. 기독교 세계관이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① 우리의 세계관과 성경읽기가 특정 역사와 문화의 영향을 받는 사실을 인정하고 어떤 자리가 지금 이 시대에 좀 더 성경을 적절히 읽을 수 있는 자리인지 성찰해야 하며, ② 마지막에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의 전망을 가지고 시대의 과제를 풀어가며 지금 여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우리 걸음을 인도해야 한다.

 

한국의 복음주의 기독교가 추구해야 할 자리와 방향은 ① 욕망에 대한 성찰을 통해 완전무결을 강조하는 위험을 극복하기 (지성의 제자도에서 욕망의 제자도로) ② 권력을 지닌 중심이 아니라 경계를 넘는 두려움을 벗은 변두리를 삶의 자리로 삼기 (중심의 삶에서 경계의 삶으로) ③ 자신의 세계관이 최종적이고 보편적 진리라고 생각하는 대신 우리의 세계관이 대화를 가능케 하고 대화가 필요한 세계관임을 인정하기 (대결의 세계관에서 대화의 세계관으로) ④ 혐오와 배제의 율법에 묶이지 않는 포용의 복음을 꽃피우기 (혐오의 율법에서 환대의 복음으로) ⑤ 교회의 부흥을 넘어 사회와 공동선과 창조 세상에서 인류의 번영을 추구하기 (교회의 성장에서 인류의 번영으로)의 다섯 가지다.

 

 

2. 하나님의 창조를 긍정하며 대화하는 성경읽기

 

창조      창조는 세계관적 성경읽기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다. 하나님의 창조에 근거한 세계관적 성경읽기는 ①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세상, 즉 종교와 세속, 육체와 정신, 주일과 평일, 예배와 일상,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모두 품는 성경읽기, ②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 선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선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믿는 성경읽기, ③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심을 믿는 성경읽기, 즉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우리의 성경 이해가 완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성경읽기다.

 

타락      창조된 사물의 어떤 것도 타락의 파괴적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타락의 핵심 결과는 하나님 · 이웃 · 창조세계와의 관계가 파괴된 것이며, 여기에 죄의 특징인 자기중심성이 결합할 때 우리의 성경읽기는 망가진다. ①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는 자신의 생각이나 자신의 이익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해석학적 우상숭배를 범하게 만들며, ② 사람들과의 관계 파괴는 이웃과 공동체를 잊은 채 성경을 사사로이 읽게 한다. ③ 창조세계와의 관계 파괴는 환경과 생태를 무시한 인간중심적 성경읽기를 만들게 된다.

 

구속      십자가의 구속은 창조를 되찾는 회복이자, 창조의 모든 영역에 존재하는 왜곡된 방향을 바로잡는 것이다. 성경읽기와 관련되어 회복되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 자기중심성을 벗어나는 것이다. 십자가의 구속은 ① 권력지향적 승리주의적 성경읽기를 거부하고, ② 고난당하는 자와 함께 하는 성경읽기를 촉구하며, ③ 영적인 측면 뿐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적 구속을 포괄하는 복음의 총체성을 깨닫는 성경읽기로 인도한다.

 

세계관적 성경읽기는 좋으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긍정하고, 타자와 겸손히 대화하며, 자기중심성을 넘어 세계에 발을 담그는 성경읽기다. 성경은 나의 입장이 아니라 저자의 세계관 속에서 이해하려는 성실함과 나의 읽기가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함으로 읽어야 한다. 십자가를 통한 구속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읽을수록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나아가며, 번영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 주님을 만나고, 자기 세계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광활한 세계에 몸을 담그게 된다. 우리의 세계관을 변화시키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성경읽기, 이것이 세계관적 성경읽기다.

 

 

제 2부 한국 기독교 세계관의 자리와 방향

 

 

1. 지성을 넘어선 욕망의 제자도

 

지금까지 기독교 세계관은 교리의 집합이나 신념의 체계와 동일시되었지만 이는 희로애락으로 점철된 삶의 냄새가 배어 있는 성경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우리의 성경읽기는 교리에 호소하며 정답으로 비약하는 대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과 자기희생적 사랑을 실천하는 몸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악과 고통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관찰자나 평론가의 자리에 머물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가슴과 공명하는 제자의 가슴을 품고 악을 극복하는 도상에 있는 순례자와 여행자의 자리에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기독교 세계관은 지적 각성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 삶의 습관과 태도에 배어 있는 욕망도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그릇된 욕망을 숨기는 좋은 방법은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예배는 예배자의 욕망이 드러나는 자리며 우리는 예배와 같인 신실하게 보이는 종교 행위 이면에 감춰진 욕망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정말 이웃을 사랑하는 일상의 삶에 뿌리내린 예배가 아닌, ‘예배 중독자’사울처럼 나의 욕망을 달래기 위해 하나님을 조작하려는 주술적 예배에 중독되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2. 중심이 아닌 경계의 삶

 

성경읽기가 세계관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세계관이 성경읽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중심을 지향하는 세계관과 중심을 향한 욕망은 은혜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중심의 질서와 방법에 익숙해지면 변두리의 방식이 우습고 위험하게 느껴지기 쉬우며, 인간 시스템의 심장부에 서면 예수가 친구했던 사람들과는 멀어지기 쉽다. 중심에 서서 중심이 부여하는 힘을 통해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중심을 향한 욕망을 포장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나아만의 이야기가 잘 보여주듯 중심이 아닌 경계 너머의 변두리야말로 성령께서 우리의 선입견을 깨뜨리고 새로운 시각을 주시는 자리다. 그리고 그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겸손한 자로 변하게 된다. 에스더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선 자리가 하나님의 섭리인지를 분별하는 것보다, 이웃의 필요를 위한 부르심에 응하기 위해 지금 있는 자리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중심의 힘을 선망하는 대신, 서로의 경계를 헐고 돕고 나누는 공동체, 주변적 일상을 신실하게 나누며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공동체다.

 

3. 혐오를 이기는 환대의 복음

 

경계를 넘어설 때 우리는 타인을 만나게 되고, 그 다름이 신앙을 오염시키지 않을지 두려워하며, 이런 두려움과 그것의 다른 한 면인 우월감은 차별과 배제 그리고 혐오로 이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으며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곤 한다. 성경에는 배제와 포용을 지지하는 본문이 모두 존재하며, 우리는 그 중 어떤 것이 성경읽기와 기독교 세계관의 토대가 되어야 될지 선택해야 한다. 요나와 고넬료 사건이 잘 보여주듯 교회는 민족과 인종의 교회를 초월한 공동체이며, 우리의 세계관은 차별과 혐오의 율법이 아니라 포용과 환대의 복음을 담아내야 한다.

 

여성과 남성에게 다른 역할이 주어졌다는 상보론은 구별이 아니라 차별을 조장할 위험이 높으며, 우리는 타락의 영향이 미친 불평등한 질서를 창조질서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 태초의 창조질서는 구속을 통해 주 안에서 경험하는 새 창조의 질서로 완성되어야 하며, 이에 따르면 남녀는 지위와 역할의 차이 없이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이자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서로 돕는 공동체적 삶을 통해 인간에게 주어진 창조세계를 다스리고 돌보는 소명을 이루어간다. 우리는 은연중에 몸에 밴 차별의 습관을 조금씩이라도 바꾸어 나가며, 그렇게 차별을 극복해 나가는 세상과 교회의 큰 흐름에 함께해야 한다.

 

4. 대결이 아닌 대화의 세계관

 

기독교 세계관은 완벽하거나 완결되어 있지 않기에 지속적으로 숙고와 검증의 대상이 되며 이는 많은 경우에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죄의 파괴성에도 불구하고 창조의 질서를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우리는 타락 이후에도 인간과 세상을 긍정할 수 있으며, 비기독교적 세계관 역시 기독교 세계관이 간과할 수 있는 중요한 사상을 일깨워 줄 수 있다. 다원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든 사상 체계를 지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는 오류 없고 탄탄한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채 비기독교인들과 ‘세계관 전쟁’이나 ‘답정너 대화’에 임하는 대신, 성육신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겸손, 사랑, 감사의 태도로 진실한 대화에 임해야 한다.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거나 사람을 미워하게 만드는 진리에 대한 사랑은 진리가 아닌 이념에 대한 추종일 뿐이며, 신앙의 광활함을 몇몇 문제로 환원한 후 모든 것을 그 문제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신앙이라는 이름을 빙자한 이데올로기일 따름이다. 성마른 판단과 정죄와 혐오를 일으키는 진리 수호는 창조주 하나님의 복음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의 표출이며, 그런 세계관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광장에 설 때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진다. “진리에 대한 소신을 품은 예의” 혹은 “신념 있는 시민교양”이야말로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광장에 서기 위해 지녀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다.

 

5. 교회 너머 인류를 위한 사명

 

윤리를 하찮게 여기는 잘못된 예배는 사회적 불의에 면죄부를 제공하는 종교적 기만이다. 교회는 예배당에 메이지 않으며 예배 회복의 열쇠는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상의 삶이다. 인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함께 살아야 할 공동체이고, 하나님은 인류의 번영 자체를 바라고 기뻐하시며, 새 하늘과 새 땅은 온 인류의 번성한 문화로도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앙 공동체의 일원일 뿐 아니라 한 사회의 시민이며, 신앙은 교회의 부흥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번영을 추구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규정하는 특징은 반진화, 반이슬람, 반공, 반동성애이다. 이 네 가지 ‘반’의 공통적인 정서는 두려움이고, 그 뿌리는 한국전쟁이 유발한 “분단 트라우마”에서 자라난 반공주의이며, 그 결과는 사람을 자신의 의제를 효과적으로 이루게 해줄 도구로 취급하는 사랑의 실패다. 그러나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고백이 가장 중요한 기독교 세계관은 포용과 환대를 추구하는 평화의 세계관이어야 한다.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토대는 창조-보존-화목으로 대치되어야 하며, 기독교 세계관은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여전히 보존하시는 이 세상에 하나님께 의미가 있으며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라고 알려 주는 세계관이 되어야 한다.

 

결론

 

작금의 한국 교회는 사랑을 잃어버리고 두려움에 쌓여 있으며, 그 두려움은 타인을 향한 공격으로 나타나 네 가지의 ‘반’이 한국교회의 특징이 되어 버렸다. 이를 형성한 것은 나와 남, 아군과 적군, 절대성과 절대악을 나누는 경계에 대한 강박을 내면화시킨 분단 트라우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계에 대한 강박을 해소해고, 기독교 세계관이 평화의 세계관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며, 평화의 복음이 복음주의를 다시 형성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희생으로 완성되는 사랑을 회복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 사랑을 되뇌지만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혐오와 배제를 통해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한 기독교는 버림받는다. 평화를 위해 치러야 하는 희생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고민하는 데서 복음주의의 미래는 비로소 싹을 틔우게 될 것이다.

 

 

개인적 단상

 

86학번인 나는 기독교 세계관 세대라 할 수 있다. 교회-세상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하겠다는 기독교 세계관의 외침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고, 제임스 사이어와 프란시스 쉐퍼, 그리고 브라이언 왈쉬/리처드 미들턴은 내가 숭배하던 “세계관敎”의 수석 사제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뜨거웠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내 관심은 시간이 지나며 몇 가지 이유로 급격히 잦아들었다.

 

우선 시간이 지나며 그렇게 좋아했던 한국과 미국의 기독교 세계관 저자들 중 많은 분들이 정치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수구에 가까운 보수의 스탠스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내가 알고 있던 “기독교 세계관”이 그들의 ‘수구적’ 기독교를 위해서도 전혀 논리적 오류나 무리가 없는 훌륭한 설명의 틀을 제공하더라는 사실까지 깨닫게 되었다. 이는 기독교 세계관에서 '진보'라는 말을 떠올리고 ‘변혁’과 관련된 무엇인가를 기대하던 내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내가 애초에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뿐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유일한 진리인 기독교 세계관으로 세상의 모든 非기독교 세계관들을 무찔러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이 뭔가 불편하고 어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어색함의 이유가 내가 접했던 ‘기독교 세계관’의 트레이드 마크인 창조-타락-구속이라는 프레임 자체가 철저히 잃어버린 ‘기독교 세계’(christendom)를 회복하려는 서구 그리스도인들의 고민을 담은 사고틀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호전성과 서구 우월주의를 논외로 하더라도 고전적인 기독교 세계관은 원래 ‘기독교 세계'에 속한 적이 없었던 한국과 같은 기독교의 ‘변방’에서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프레임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 후로 내 관심은 기독교 세계관을 떠났다. 대신 다원주의 사회에서 이웃과 공존하면서도 어떻게 선교적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지 고민했던 레슬리 뉴비긴, 세속 사회에서 어떻게 종교가 공동선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지 숙고했던 미로슬라브 볼프, 비서구 기독교의 확장에 주목하며 기독교를 “세계기독교”의 관점에서 바라 본 앤드류 월스나 마크 놀, “본문으로 괴롭히기”를 자행하는 “차이의 해석학” 대신에 성서의 또 다른 전통인 “환대의 해석학”에 주목하는 레티 러셀, ‘중심’이 아닌 ‘주변’에 천착하는 다양한 해방의 신학들 등 내 고민을 좀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저자와 신학들로 계속 관심을 이동해 왔다. 나는 저자 역시 기독교 세계관과 복음주의 기독교의 틀을 넘어서는 여러 저자나 신학 전통들과 대화하고 대결하면서 이 책을 저술했으며 그 내용들이 이 책의 행간마다 상당 부분 녹아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어쨌든 서구 기독교 세계가 아닌 다원주의 사회의 자리, 중심이 아닌 주변의 자리, 배제와 혐오가 아닌 환대와 평화의 자리, 대결과 답정너가 아닌 겸손한 대화의 자리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논하는 저자의 접근은, 바로 이런 문제들에 부딪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흥미를 잃었던 내게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아직은 시작 단계에 불과한 저자의 생각이 반향 없는 울림으로 끝날지 일정한 파장을 일으킬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폐기’를 선언했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최종 판단을 유보한 채 앞으로 저자가 펼치는 사고와 실천의 발전과정을 진지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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