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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교의 .변증

성령 (스탠리 하우어워스/윌리엄 윌리몬 지음, 김기철 옮김, 복있는사람 펴냄)

by 서음인 2021. 7. 7.

하우어워스는 누구인가

 

1. 나는 이 책의 저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윌리엄 윌리몬의 이름을 꽤 오래전부터 들어 왔다.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에서 시작해 가상 칠언 해설서인 『십자가 위의 예수』, 자서전인 『한나의 아이』, 기도문 모음집인 『신학자의 기도』를 거쳐 이번에 읽은 『성령』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그(들)의 책은 적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비교적 오랜 기간 여러 책을 통해 접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그가 그다지 편안하지 않다.

 

2. 이러한 불편함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쉽게 고정된 범주에 가두기 힘든 그의 독특성 때문이다. 그는 교회의 사명이 ‘자유주의적 근대성’의 소산인 관용과 다원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의 수호가 아니라, 성서에 담긴 그리스도교 고유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신학자들의 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근대 세계에 맞게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예수에 맞게 변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앞서 “우리가 어떤 사람, 공동체, 국가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집중해아 한다고 강조한다. (덕윤리) 여기까지만 보자면 그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3. 그러나 하우어워스는 결코 기존 그리스도인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편안하게 받아들일 만큼 만만하지 않다. 그는 교회가 자본주의의 희생자들과 함께 하는 낮선 거류민들의 급진적인 대안 공동체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경영학이나 사회학의 기법을 도입한 모든 교회 성장 프로그램들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어떤 종류의 폭력과 전쟁도 거부하는 철저한 비폭력 평화주의의 태도를 견지한다. 게다가 그는 감리교 출신이지만 가톨릭 대학인 노터데임 대학에 오래 재직했고, 루터교 · 성공회 · 가톨릭교회의 회중이었을 뿐 아니라 한때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그의 재혼한 아내는 한국의 보수교회가 극단적으로 금기시하는 여성 목사다.

 

4. 알리스터 맥그래스에 의하면 하우어워스는 ‘후기자유주의’ 혹은 ‘예일 학파’라 불리는 신학 운동에 속한 학자 중 한 명이다.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보편적 합리성’이 진리의 토대라는 전통적 계몽주의와 인간의 ‘공통적 종교경험’으로부터 신학적 사유를 시작하는 자유주의를 모두 거부한다. 그리고 종교의 영역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사고와 경험은 특정한 역사와 사회를 통해 매개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종교행위의 핵심은 특정한 역사적 종교 전통 속에 살면서 그 관념과 가치를 내면화하는 것이며, 기독교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서의 내러티브를 통해 전달된 기독교 전승을 탐구하는 기술적인(descriptive) 학문이라고 강조한다.

 

5. 이런 생각에 따르면 신학의 타당성을 가르는 시금석은 공적 합의나 보편적 기준이 아니라 신학 자체의 기준(주로 성서의 내러티브)에 부합하느냐의 여부이며, 진리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의 독특한 교리적 전승들을 그대로 따르는 것과 동의어가 된다. 이러한 하우어워스의 신학은 일견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의 목소리와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식의 보편적 토대라는 관념을 거부하고 (반토대주의), 그 역사성을 강조하며 (역사주의), 신학 형성에서 공동체의 가치와 언어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공동체주의) 그들과 결을 달리한다. 

 

6. 이렇게 복음의 고유성과 특수성을 강조하는 하우어워스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윤리가 바로 ‘교회가 되는 것’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 신앙의 전통적인 가치들에 따라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철저한 비폭력 평화주의의 방식으로 소외된 이웃들을 섬기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품을 신실하게 증언하는 것이야말로 신자 공동체가 세상을 섬기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윤리적 입장은 그의 동료였던 아나뱁티스트 존 하워드 요더의 생각과 비슷하며, 이는 보수적인 그의 신학과 달리 그의 실천이 급진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본문 요약

 

삼위일체 - 성령에 대한 바른 사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기로 결의를 다진 사람들이며, 성령이 없으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한분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보혜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며, 예수는 하나님에 관한 온전하고 완벽하며 충실한 계시다. 우리가 성령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예수의 삶, 죽음 부활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현존한 일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몸을 입고 이루어진 일이며, 기독교는 성령 강림을 통해 몸을 입고 물적 특성을 지니게 된 종교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를 삼위일체의 생명 속으로 이끌며, 우리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게 된다.

 

오순절 - 교회의 탄생    공동체적이고 관계적인 성령의 특성은 교회의 존재 이유를 설명한다. 성령께서는 말씀과 성례전과 목회 사역을 통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세우시며, 교회는 언어의 혼돈으로 고립되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내재된 폭력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 극복되었음을 세상에 증언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한다. 성령의 본질은 특히 교회가 자기만족에 빠지고 현실에 안주할 때 교회를 뒤흔드는 것이며, 힘 있는 성령은 교회가 소명을 저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는 새 공동체를 일으켜 세우셔서 우리의 현실을 품어 치유하신다. 교회는 항상 살아 계시고 자유로우며 때로는 파괴적이기까지 한 성령의 뜻에 일치해야 하는 과제를 지니며, 교회가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하나가 될 희망은 “오소서 성령이시여”라고 기도하는 방법밖에 없다.

 

거룩함 - 성령 안의 삶    성화된다는 것은 성령의 삶에 사로잡히는 것이며, 성령을 통해 우리는 삼위일체로 거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새롭고 다른 세상에 참여하게 된다. 성령은 우리가 세상 한가운데서 평화를 누리고, 원수들을 친구 삼으며, 거짓이 가득한 문화 가운데서 진리를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선물이며, 성령의 선물을 받은 우리는 자기를 정당화하는 모든 시도를 내려놓고 제자도의 모험을 시작할 수 있다. 성령의 열매는 거룩함이며 거룩함을 분별하는 확실한 시금석은 사랑이다. 성령을 힘입어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폭력과 거짓으로 가득한 세상 안에서 우정을 나누게 해주는 진리의 공동체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은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요, 성령의 능력으로 이룬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 일 - 종말론적 백성의 삶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시간 속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마지막 때를 본 종말론적 백성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지막이자 가장 좋은 소망은 우리를 찾으시며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서 죽음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우리를 찾으시고 구원하시며 가끼이 불러 주실 것을 믿는 것이다. 세상이 인생을 자신의 소유인 양 여기면서 국가와 군사력과 여타 인간의 수단으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사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이름이라면, 교회란 죽음의 정치가 삶을 좌우하려 할 때 단호히 거부하는 백성으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대안 공동체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개인적 단상

 

1. 이 책은 하우어워스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읽기에 그다지 쉽지 않다.  원래 그는 친절하거나 편안한 저자가 아니다. 사고든 표현이든 좋게 말하면 솔직하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상당히 직설적이다. 게다가 그는 다양한 신학 전통을 넘나들며 참신하고 깊이 있는, 그래서 기존의 신학 언어/구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꽤 낯설게 느껴지는 방식으로 신학적 사유를 전개한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그의 생각은 큰 틀에서 볼 때 서방 신학의 전통을 벗어나지 않으며, 그가 제시하는 실천 역시 급진적인 대안 공동체라는 자신의 기존 주장과 일치한다. 이 책은 하우어워스의 신학적 정체성을 잘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2. 하우어워스 식의 후기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이 사조가 가치나 합리성 같은 보편적 규범을 거부하고 공적인 영역에서 퇴각해 ‘신학주의’나 ‘부족주의’라는 자신들의 게토로 숨어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 역시 기독교 신학을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해 세상과 대화하고 소통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거부한 채, 교회와 세상을 행해 “역사적이고 공동체적이며 전통적인 기독교 전승”이라는 절대보검을 거칠게 휘둘러대는 하우어워스의 태도가 상당히 불편하다. 그에게 내면화해야 할 “기독교 전통”이란 의심의 여지없이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서구 기독교 교회와 신학이 되겠지만, 한 번도 기독교 세계(christendom)에 속했던 적이 없거나 기독교 공동체가 미약/부재한 곳에서 살아가는 비서구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전통의 실체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들은 서구 기독교 문화가 그려 낸 "하얀 예수"를 자신의 내면에 이식해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하우어워스의 생각이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서구중심주의’의 혐의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3. 나는 개인을 구원과 거룩과 사랑으로 이끄는 성령의 사역에 관한 고전적 교의학의 설명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하나인 교회를 빚어가는 성령의 능력에 대한 하우어워스의 생각에도 깊이 공감한다. 그러나 나는 성령의 숨결이 ‘개인’과 ‘공동체’를 넘어 ‘공동선’에게까지 미치고 있다고 확신하며, 그래서 ‘페리코레시스’를 강조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기초로 성령의 사역을 정의와 평화, 생명과 친교라는 우주적 차원까지 확장시킨 몰트만의 통찰에 흥미를 느낀다. 그리고 메시아 왕국의 선취인 교회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따라 세상의 고난에 함께할 뿐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는 몰트만의 주장에도 공감한다. ‘삼신론’에 대한 세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현재까지 내게 성령론의 ‘최종 보스’는 하우어워스가 아닌 몰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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