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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성서개론서

신약학 강의노트 (니제이 K. 굽타 지음, 이영욱 옮김, 감은사 펴냄)

by 서음인 2020. 10. 14.

신약학 강의노트는 고든-콘웰 신학교와 영국 더럼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노던 신학교에서 신약을 가르치는 니제이 K. 굽타가 쓴 쉽고 친절한 신약학 안내서다. 저자는 이 교과서가 신약학에서 가장 중요하고 논쟁적인 몇 가지 이슈들을 간단한 방식으로 입문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독자들이 이 책에서 불일치하는 다양한 견해를 접하면서 절망하거나 혼돈에 빠지기보다, 논쟁의 풍부한 복잡성과 질감을 느끼면서 반대편에 대한 공감을 형성하게 되기를 바란다. 저자는 독자들이 아무 것도 모른 채 복잡성 이전의 단순성안에서 만족하며 살기보다, 이 책이 소개하는 여러 학문적 불협화음들을 용감히 접해가며 신약에 대한 더 나은 이해와 실천에 도달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1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역사적 예수에서 성경의 적용과 사용에 이르는 열세 가지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대략 30여 페이지 정도의 분량을 지닌 각 장은,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한 개론적 소개, 논쟁의 지형 및 주요한 관점들에 대한 설명, 생각할 거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지막에는 보다 깊은 탐구를 원하는 학도들을 위한 참고문헌 목록이 첨부되어 있다. 현대 신약학의 지형도와 주요 주제, 중요한 학설들과 그들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논쟁까지 한 눈에 살필 수 있는 탁월한 교과서이며, 분량이 많지 않고 서술이 친절해 이 분야의 문을 처음 두드리는 입문자뿐 아니라 그간의 공부를 종합하기 원하는 진지한 성서학 탐구자들에게도 매우 유용하다. 내용을 요약해 공부의 결론으로 삼기로 한다.

 


내용 요약



1강 공관복음 문제

 


공관복음 문제는 마태, 마가, 누가의 세 복음서가 어떻게 눈에 띠게 비슷하면서도, 사건의 묘사와 자료의 배열 취사선택하는 내용이 어떻게 다른지 다루는 학문으로 거의 이천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3세기의 오리게네스는 마태복음이 히브리 개종자들을 위해 가장 먼지 기록되었고, 다음으로 베드로의 지시에 따라 마가복음의 기록되었으며, 마지막으로 누가복음서가 바울의 지시에 의해 이방인 개종자들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에 접근하는 두 가지 방식은 기록문학-의존 관점구술전승 역학 관점이 있다.

 

기록문학-의존 관점   이 방식은 누가 누구의 것을 베꼈는가 하는 문서 사이의 관계나 문학적인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다. 19세기까지는 마태복음이 가장 먼저 쓰였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었으나, 그 이후로는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쓰였고 마태와 누가가 마가복음을 의존해 쓰였다는 마가우선설이 지배적인 학설로 자리잡았다. (1) 두 자료설/네 자료설로 알려진 이 학설에 따르면 마태와 누가는 기본적인 대본인 마가복음에 더해 마태와 누가가 저마다 가지고 있던 고유한 자료(M/L)마가복음에는 없지만 마태와 누가에 공통으로 포함된, 어록집 형태로 추측되는 가설적인 자료인 Q (Quelle) 를 이용해 복음서를 기록했다. 그밖에 (2) 아우구스티누스는 마태가 먼저 쓰였고 마가가 그 다음이며, 마지막으로 마태와 마가를 의존해 누가가 쓰였다고 주장했고, (3) 그리스바흐(1789)는 마태가 처음, 누가가 그 다음이며 마가는 마태와 마가를 요약하려는 시도로 마지막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했으며, (4) 오스틴 파러(1950년대)는 마가우선설을 주장하면서도 Q의 필요성을 부정했다.

 

구술전승 역학 관점   거의 모든 신약 학자들은 기독교의 가장 초기(AD 35-45)에 예수에 관한 이야기와 예수의 가르침들이 구두로 전달되었을 것으로 간주하며, 지난 수십년간 공동체들이 전승을 공유해온 방식에 대한 점증되는 관심이 있어 왔다. 케네스 베일리는 구술문화에서는 공식적인 교사 대신 장로들이 전승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과업을 수행했고, 전승이 재구술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유연성이 허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가 가르침의 핵심은 적절하게 보존되도록 통제할 수 있었다는 비공식적 통제형 구술전승을 주장했다. 제임스 던은 서구인들이 성경을 연구할 때 문헌이라는 틀을 벗어나 반드시 구술문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데일 엘리슨은 인지과학의 성과를 반영해 사람들이 사건의 세부사항이 희미해지더라도 전체적인 사건은 잘 기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공관복음서 문제는 기존의 문서 편집에 관한 이론뿐 아니라, 이러한 구술전승의 역학까지 고려할 때 더욱 잘 설명될 수 있다.

 

생각할 거리   공관복음 문제에 대한 관심은 주로 역사적 예수를 찾고자 하는 바람과 1세기 중후반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세계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소망에서 기인했다. 그러나 역사적 전승의 출처나 층들을 분류하는 작업이 난관에 봉착하면서, 역사적 예수가 실제로 말하거나 행한 것을 결코 객관적으로 복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증가되고 있다. 우리가 가진 것은 현대적 의미의 객관적 보도가 아닌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한 인물(예수)에 대한 증언과 선포이며, 이는 최근의 관심을 개인적 사회적 기억의 성질 및 작동 원리에 대한 심리학적 사회학적 연구로 이끌고 있다.  



제 2강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 탐구의 역사 I    역사적 예수 탐구는 역사적으로 현존했던 인물인 예수의 삶과 사역의 궤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정보(자료)를 역사적이고 비평적인 원칙에 입각해 분석하려는 시도다. 17세기까지 성경 독자들은 대체로 복음서의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나,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학문 세계는 성경을 분석하기 위해 역사 과학과 역사기술의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역사적 예수 연구의 비조인 헤르만 라이마루스(1694-1768)는 허구적 요소인 기적을 배제한 인간적이고 평범한 예수의 삶과 뜻에 대한 이론을 펼쳤으며, 다비드 슈트라우스(1808-1874)는 복음서들을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이야기인 신화로 간주했다. 빌리암 브레데(1859-1906)은 복음서의 메시아 비밀이 예수가 아닌 후대교회의 창작물이라고 주장했으며, 알베르트 슈바이쳐(1875-1965)는 예수를 좋은 도덕교사가 아닌 현대인에게 낯선 종말론적 선지자로 묘사함으로서 탐구가 없는 시대의 문을 열었다. 이 시대의 루돌프 불트만(1884-1976)역사적 예수를 밝혀내거나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그리스도에게 반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역사적 예수 탐구의 역사 II    에른스트 케제만(1906-1998)에 의해 시작된 역사적 예수의 새로운 탐구는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는 불트만의 가르침에 동의하면서도, 동시대에 벌어진 홀로코스트의 영향으로 예수에 대한 지식을 역사에 뿌리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노먼 페린(1920-1976)을 포함한 이 시기의 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의 진정한 진술을 판단해내는 세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인이나 유대교인들이 정통으로 인식했던 것과 다른 예수의 말과 사건일수록(비유사성의 기준), 많은 자료들에 언급될수록(다중 증언의 기준), 초대교회의 입장에서 당혹스럽거나 설명하기 어려웠던 말이나 행동일수록(당혹성의 기준) 역사적 예수에게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헬렌 본드가 지적했듯 예수를 둘러싼 유대 환경과 예수를 따르는 초대교회로부터 동떨어진 예수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3의 탐구시기에는 제2 성전기 유대교와 유대 문헌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예수를 이스라엘의 유산 및 당대 문화의 정치적 예언적 줄기와 공명하는 경건한 유대인이자 회복주의자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동일한 시기에 2기의 탐구 노선과 긴밀히 협력했던 지저스 세미나는 투표를 통해 정경 복음서의 자료들 중 진짜가 20%에 못미친다는 결론을 내렸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네 가지 접근방식 I    (1) 선지자 예수 - 이 견해는 지난 40년간 가장 널리 공명을 얻어 왔으며, 심판 선언이나 기적과 같은 독특한 특징을 가진 사역에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게자 베르메쉬는 예수를 유대교의 거룩한 기적 행위자의 범주에 포함시켰으며, 마커스 보그는 예수를 변혁시키는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게 하려고 했던 신비주의자(“영적인 사람”)로 간주했다. E.P. 샌더스는 예수를 이스라엘과 새로운 세계질서를 위해 미래의 날을 추정하는 종말론적 선지자로 그려냈다. (2) 지혜자 예수 - 이들은 예수를 당대의 유대문화에 영향을 미쳤던 그리스의 견유학파와 관련시킨다. 그들은 복음서의 종말론적인 자료를 의심하고 예수의 행동에 관심을 덜 기울이는 대신, 복음서 안에 있는 예수의 격언들이나 Q와 도마복음 같이 격언으로 구성된 전승자료에 초점을 맞춘다. 존 도미닉 크로산은 예수를 급진적 평등주의와 공동식사에 대한 심오한 메시지를 전한 유대적 양식의 견유학파(사회적 혁명가)로 간주했으며, 벤 위더링턴은 예수가 스스로를 지혜의 방식들로 생각하고 가르친 유대적 양식의 지혜교사나 심지어 육화된 하나님의 지혜로 여겼다고 주장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네 가지 접근방식 II      (3) 사회 혁명가 예수 - 이들은 1세기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대지역의 사회정치적 정황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예수를 견유 학파의 영성가나 지혜 교사가 아닌 로마의 억압적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혁명가로 묘사한다. 리처드 호슬리는 역사적 예수가 자신을 시골의 소작농 무리(민중들)와 동일시했으며, 예수의 묵시적 발언들은 내세의 영성이 아닌 사회 현실을 바라는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소망이었다고 주장했다. (4) 시아 예수 - 많은 예수 학자들은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로 생각했다는 개념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기지만, N.T. 라이트는 예수에 의한 그리고 예수에 대한 메시아 주장이 역사적으로 신빙성 있다고 피력했다. 그는 메시아로서의 예수가 죄와 죽음을 자신에게 부과함으로서 백성들을 구원하는 역할을 했으며, 이는 왕으로 통치하기 위해 시온으로 돌아온다는 야훼의 약속을 실제로 성취한 것이었다고 강조한다.

 

역사적 예수 탐구의 현재와 미래       최근 역사적 예수 탐구가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는 회의적 시선이 있어 왔다. 엘리슨은 역사적 예수를 회고함에 있어 세부사항에 관한 기록은 늘 실패하게 된다고 주장했고, 스캇 맥나이트는 역사적 예수 연구가 개념과 역사 방법론과 방향에 있어 너무 많은 결함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역사적 예수 학자들이 일치된 견해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연구의 전제와 목적이 서로 다르고 연구에 사용하는 자료가 서로 다르며 연구의 방법론과 도구들이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사역의 배경과 맥락이 유대적인지 헬레니즘적인지에 대해 이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톰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학계가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최근의 많은 학자들은 개인적/사회적 기억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향후 비정경 복음서에 대한 연구와 고고학적 연구성과가 새로운 통찰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3강 네 번째 복음서와 역사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서로 많은 차이가 있다. 도입부 - 공관복음은 역사적 보도나 족보로 시작하지만, 요한복음은 예수를 태조부터 존재했던 신적 존재로 그리는 신학적 도입부로 시작한다. 기적 - 요한복음은 기적을 하나님 나라 도래의 표징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메시아적이고 천상적인 존재로 증명하는 사건들인 표적으로 본다. 믿음 - 공관복음은 믿음이 어떻게 기적에 선행하는지를 강조하지만, 요한복음의 표적은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으로 나타난다. 가르침 - 공관복음에서 예수는 주로 간결하고 명쾌한 비유로 가르치신 반면에, 요한복음에서는 장황하고 자세하게 교훈과 지혜를 설파한다. 개념 - 공관복음에서 예수는 주로 종말과 최후 심판을 위한 인간의 준비와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는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믿음과 진리, 증거, 사랑, 영원한 생명을 설파한다. 사역 영역 - 공관복음에서 예수는 갈릴리에서 활동하다가 마지막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특별한 절기나 사건이 있을 때마다 예루살렘을 수시로 방문한다. 대적들 -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의 대적들로 구체적 집단들을 언급하지만, 요한복음서에서는 단순히 유대인들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경향이 있다. 기독론 -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는 주로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행위자인데 반해, 요한복음서에서는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와 자신의 신성 본성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네 번째 복음서는 비역사적이다      (1) 이레니우스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같은 초기 학자들은 요한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의미'에 집중하는 영적인 복음서를 썼다고 설명했으며, 루이스 마틴은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들이 모든 계몽된 세대에 즉각적으로 이해되는 무시간적이고 영적인 확언이라는 특징을 보인다고 강조했다. (2) 1930년대에 들어 네 번째 복음서가 공관복음서에 의존하지 않는 별개의 책이라는 견해가 등장했다. 어떤 학자들은 요한복음이 주로 요한의 신학적 상상력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루돌프 불트만은 요한이 기독교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 영지주의의 구원 신화를 차용했다고 주장한다. 존 애쉬턴은 묵시문학과 묵시사상에서 빌어온 개념이 요한복음을 독특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모리스 케이시는 요한의 복음서가 반-유대적 편견으로 가득 차 있기에 예수의 역사적 삶과 연결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지저스 세미나는 요한복음서에서 나오는 예수의 말들은 복음서 기자가 창안한 것이며, 요한공동체의 신학을 반영하고 있다고 결론내린다. (3) 이렇게 네 번째 복음서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예수의 역사적 생애에 관한 역사적 진술이 아닌 다른 것이기에 역사적 예수 연구의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없다고 여겼다.

 

네 번째 복음서는 역사적이다       요한복음의 역사적 유용성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다음과 같다 (1) 논리와 역사 - 많은 학자들이 요한복음의 영적인성질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역사나 논리로 확증할 수 있는 특징들을 밝혀내고 있다. (2) 전승의 이중구도 - 폴 앤더슨은 우리가 가진 복음서 전승은 1:3으로 치우친 전승이 아니라 마가전승과 요한전승이라는 양 시각 복음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네 번째 복음서는 마가복음과 나란히 놓인 독특하고 신뢰할 만한 예수 전승으로 연구되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3) 장르 - 공관볶음서와 사복음서는 역사신화라는 별개의 장르에 속하지 않으며, 둘 다 중요한 사람의 업적과 명예를 드높이고 그 미덕을 모범으로 삼도록 독려하는 그리스-로마의 전기 장르에 대충 들어맞는다. (4) 중언 - 리처드 보컴은 요한복음도 역사와 관련된다고 주장하는 모든 고대의 문서들처럼 목격자의 증언으로부터 발생했을 것이며, 우리가 이 복음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수 사건을 직접 경험했고 예수와의 관계가 남달리 독특했던 제자의 기이한 증언이라고 주장한다.


요한복음 연구의 현재와 미래      기대할 만한 분야는 저자의 의사전달 목적이나 수사학적 묵적에 대한 연구다. 해럴드 애트리지는 요한이 누가복음의 역사학적 접근 방식에 의도적으로 반발했으며, 독자가 예수를 직접 대면토록 하기 위해 복음서와 드라마라는 두 장르를 벤딩했다고 주장헀다. 현재 학계는 더 이상 요한복음의 역사성을 무시하지 않으며, 이 작품의 역동성에 고도의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4강 예수와 바울

 


예수 대 바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많은 학자들은 유대적 특성과 메시지를 지녔던 예수 운동이 헬레니즘 세계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의 영향으로 영지주의와 이교 신비제의에 의해 오염되면서 완전히 다른 종교로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생각은 바울은 예수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기독교의 두 번째 창시자라는 윌리엄 브레데의 말과,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촉구했는데, 나타난 것은 (바울이 강조한) 교회였다라는 알프레드 로이스의 진술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 바울신학이 강력한 유대적 배경을 가진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신학 학계에는 바울이 그리스도 사건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독특한 방식으로 바울의 기독교를 발전시켰다는 견해와, 바울이 약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예수가 시작했던 사역을 충실하게 계승했다는 입장이 존재한다.

 

예수 저 너머에 있는 바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득한 바울의 글은 명백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생애나 가르침보다 그리스도 사건(죽음과 부활)에 훨씬 많은 관심을 보이며, 바울서신에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정체성과 메시지의 핵심 요소들이 존재하지 않거나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바울서신에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자료로 사용할만한 정보가 아주 빈약하다. 바울서신에서 예수전승을 명백하게 인용하고 있는 곳은 단 세군데로 극히 드물다. 바울 서신에는 복음서에서 예수의 주요한 관심사였던 제자도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급이 없거나 극히 피상적으로만 다뤄진다. 예수는 율법을 긍정했으나 바울은 율법의 끝을 선언했다. 복음서의 예수는 사람들에게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으나, 바울은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가 아닌 예수에게로 인도했다.

 

예수를 뒤따르는 바울      바울과 예수를 연결하는 작업은 삼중으로 되어 있다. (1) 인용과 인유들 - 바울이 예수전승으로부터 직접 인용한 부분은 세 곳에 불과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바울서신에서 예수전승을 자구적으로 인용하지 않는 인유의 형태로 언급하는 부분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2) 공유하는 개념과 주제들 - 바울과 예수가 공유하고 있는 여러 주제들과 개념들이 있다. 2:5-11에 담긴 그리스도서사 믿음, 좋은 소식, 구원 하나님의 은혜 사랑의 덕목 영과 육 사이의 싸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 (3) 반박에 대한 응답 - 바울은 예수의 공생애에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상이나 표현에서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바울의 과거 가르침을 전제로 쓰여진 바울서신이 예수의 생애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들이 바울의 본래 메시지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생각할 거리        불연속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울서신이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보다 그리스도 사건에 집중한다는 부분을 부각시키며, 연속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예수의 비전과 강령을 수행하지 못했다면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제에 대해 응답하기 위해 살펴야 할 세 요소가 있다. 초기 기독교의 운동들 - 예수와 바울의 사역에 존재하는 원시 기독교” (AD 30-50) 시기의 발전과 영향을 무시하고 예수와 바울을 독자적 개인들로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바울과 예수를 모순적인 관계로 가정하는 것은 각기 다른 기독교 공동체를 위해 기록된 정교한 신학적 문서인 복음서와 바울서신의 목적과 서술방식을 오해하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의 대적도 제자도 아니었으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부름 받은 사도였다. 예수에 대한 바울의 지배적 이해는 스승-제자 관계라기보다 주-종 관계였다.

 


5강 바울의 신학적 관점


 

이신칭의      바울신학에 대한 고전적인 개신교의 접근 방식은 루터로 대표되는 이신칭의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통해 하나님에 의해 죄가 용서되고, 구원은 인간의 행위를 통한 하나님의 호의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신자의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주어진다는 주장이다. 이 관점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구원이나 복음과 관련해 주로 법정 상황과 관련된 용어/개념들을 사용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특히 로마서 1-4장을 인용하며, 칭의/· 자랑 · 율법 · 행위 · 믿음과 같은 단어들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그들의 신학적 방향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행위와 믿음을 날카롭게 대치시키는 특징을 보인다. 그러나 이 방식은 구약/율법과 신약/복음을 날카롭게 대립시키면서 후자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믿음을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행위의 역할이 모호해지며, 실존적 칭의에만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공동체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게 만든다.

 

구원 역사      고전적인 이신칭의 접근방식이 신약과 구약을 하나의 이야기로 밀접하게 연결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몇몇 학자들은, 인간 역사 내에서 영원한 구원의지를 이뤄가시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활동에 중점을 두는 구원-역사 접근을 선호한다. 개혁주의의 전통으로부터 강한 지지를 받는 이 방식을 옹호하는 학자들은 신구약 정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행위 및 구원 계획의 전체적인 연속성과 일관성을 강조하며, 약속 · 성취 · 절정 · 좋은 소식 · 복음과 같은 단어들을 중요하게 여긴다. 복음의 시야를 개인 구원의 차원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메시아 예수를 통해 그리고 교회를 통해 자신의 뜻을 행하시고 약속을 이루시는 더 넓은 방식들로 넓히려고 노력한다. 로마서 9-11장에서 바울의 초점이 개인이 아닌 이스라엘이나 교회와 같은 그룹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과 관계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방식은 구약과 신약을 하나의 통일된 내러티브로 연결하고 구약성경의 성취에 대한 바울의 관심을 진지하게 반영하지만, 과거의 현재의 연속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십자가의 거치는 것과 독특성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

 

묵시론적 바울      묵시론적 바울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바울에게 있어 복음은 구원 역사에서 계속 진행되는 시간의 선 안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그 선을 깨고 옛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대가 돌입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옛 시대는 은혜의 선행 혹은 예비시대가 아니라, 복음을 필요로 하는 악한 시대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관점을 가진 학자들은 주로 로마서 5-8장에서 영감을 얻으며, 구원 · 해방 · 승리 · 새 창조와 같은 단어들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영적이고 초월적인 능력들 사이의 우주적 전쟁과, 인간을 노예화하고 지배하는 악한 세력인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정복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묵시론적 관점은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거치면서 악의 잔인성과 인간의 죄성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새롭게 재고할 필요성이 생김에 따라 발전했으며, 바울이 죽음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데 강점을 지니지만 바울서신의 또다른 특징인 성취언어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리스도에 참여함      그리스도에 참여함혹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바울신학의 핵심이라고 믿는 학자들은 로마서 6:1-14절이나 고린도 전후서 빌립보서를 중시하며, 엔 크리스토”(그리스도 안에) · 그리스도와의 연합 · 십자가를 본받음 · 참여 · 변화와 같은 용어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내주하시면서 신자를 내면에서부터 외면으로까지 변화시키는 관계인격변화까지를 포괄하는 의미이며, 이 과정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뿐 아니라 그의 고통과 죽음까지 공유하는 상호교환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필요한 것은 단순히 유죄가 아니라는 판결이 아니라 죄인의 중심이 진정으로 변화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있는 새로운 삶은 아담 안에서의옛 삶의 죽음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이 개념이 그리스 신비종교의 영향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지만, 최근 학자들은 이를 언약적 결속과 같은 바울의 유대적 유산과 연결시킨다. 주로 동방 기독교 전통에서 두드러졌던 이 입장은 바울서신을 쉽게 설명할 수 있지만, 이 언어가 바울의 신학 내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구체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생각할 거리      우리가 이 성찰로부터 배울 수 있는 바는 바울서신은 역사적으로 매우 다양하게 이해되어 왔으며, 개인/교회의 신앙고백이 바울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을 이끌어 왔다는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논쟁을 구성하는 세 가지 원동력이 있다. 상황성과 일관성 - 바울서신이 특정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상황화된 편지라는 사실과 모든 편지 배후에 하나의 바울 신학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 인간과 신의 역할 - 구원과 최종 심판의 관점에서 인간의 뜻과 노력, 순종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어떠한 역할울 하는가? 신구약의 연속성과 비연속성 - 신구약은 연속적인 이야기인가? 예수가 얼마나 이 이야기를 비틀거나 두 성경 사이의 연속성을 깨뜨리고 있는가?



6강 바울과 유대교 율법

 


바울에 대한 새 관점      바울에 대한 새 관점’(NPP)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바울 시대의 유대교가 행위-의에 의해 주도된 행위종교가 아니라, 로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강조하는 은혜종교였다고 주장한다. (1) 크리스터 스탠달은 율법의 족쇄로 인해 죄책감과 절망에 사로잡힌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후 비로소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을 찾았다는 잘 알려진 설명은, 마르틴 루터의 자기반성적 양심이라는 렌즈로 바울의 경험과 수사학을 오독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2) E.P. 샌더스는 바울 시대의 팔레스타인 유대교가 하나님의 언약과 선택에 기초한 은혜 종교였으며, 토라에 대한 순종의 요구는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언약적 율법주의를 주장했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야 자신이 구원이 필요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음을 깨달았다고 강조했다. (3) 제임스 던은 바울이 비판한 율법의 행위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에게 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반드시 준수할 것을 요구했던 할례 · 음식법 · 안식일 규례 같은 정체성 표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4) N.T. 라이트는 유대 메시아로서의 예수가 야훼의 구속과 구원 계획 안에서, 특히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언약의 성취 안에서 이스라엘의 역할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한다.

 

새 관점에 대한 반대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은 바울이 바울 당대의 사회적 환경에서 연구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복음서 뿐 아니라 다양한 유대 문헌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환기시켜 주었다. 그리나 이에 대한 네 가지의 중요한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곤경에서 해결책으로 - 프랭크 틸만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곤경에 처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샌더스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당대 문헌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죄로 오염되어 종말론적인 구원이 필요한 존재로 간주했다고 주장했다. 유대인의 자랑의 문제 - 사이먼 개더콜은 바울이 대항했던 것이 개인이 종말에 있을 최후신원에서 토라 순종에 의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라고 주장하면서, 바울이 율법주의와 민족적 자부심 모두를 비판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바울 신학자로서 루터를 재건하기 - 스티븐 웨스터홀름은 루터식 바울 읽기를 변호하면서 바울이 죄를 처리하는 그리스도 특유의 능력에 집중했다고 주장했다. 칭의와 다채로운 율법주의 - 카슨과 오브라이언은 다양한 유대문헌들을 검토한 결과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하나의 패턴으로 묶을 수 없는 다양성이 발견된다고 판단했다.

 

이스라엘에 율법이 주어진 이유      바울은 모세 율법, 곧 토라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 지배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율법이 범죄 때문에주어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에 대한 해석은 크게 세 진영으로 나뉜다. (1) 원인제공 : 범죄를 야기하기 위해 - 이 주장에 따르는 학자들은 로마서 5:20에 호소해 율법이 죄와 범죄를 야기하기 위해 더해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죄인이 자신의 죄성을 제어할 수 없을 때 모든 것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2) 인지적 목적 : 죄를 확인하기 위해 -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로마서 4:14에 의지해 죄인이 율법 때문에 죄를 더 짓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없었다면 몰랐을 죄의 문제와 결과를 더 충분히 인지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3) 교정의 목적 : 범죄를 줄이기 위해 - 이는 유대 율법에 대해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견해로, 율법이 죄를 예방하고 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주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율법이 죄를 억제하고 줄일 수 있지만, 죄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한다고 덧붙인다.

 

바울이 문제삼은 율법의 행위들      이 주제는 오늘날의 바울 신학 연구에서 가장 치열하게 논의되고 있는 주제다 (1) 공로적인 행위 -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인용해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율법은 인간이 자신의 죄를 깨달아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존하게 하는 역할만을 한다고 주장한다. (2) 유대인의 배타성 - NPP에 따르면 율법의 행위들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외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약 백성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요구했던 정체성 표지인 할례와 음식규례, 안식일 준수를 의미한다. (3) 토라의 한계 - 이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은 토라가 전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가지고 있었지만(3:24, 몽학선생), 죄의 문제에 대한 영구적인 해결책은 아니었으므로 그리스도가 오신 후로는 무시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생각할 거리      이 논쟁의 본질이 가지는 중요한 함의들은 다음과 같다. 배경 - 바울의 텍스트를 개인적 신념을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는 유혹은 거부하면서, 바울의 텍스트를 당대의 사회역사적 맥락에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 바울 신학과 구약성경, 특히 율법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에 대해 깊은 연구와 성찰이 필요하다. 믿음과 행위 - 믿음과 행위 간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며, “믿음(피스티스)”이라는 용어는 그리스도에 대한 전인적 위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7강 요한계시록 해석


 

요한계시록은 어떤 문서인가      (1) 종말론은 마지막에 일어난 일들과 관련된 신학적 연구 분과로, 특별히 예수의 재림과 최후 심판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2) 묵시록은 내러티브의 틀을 가진 계시문학의 한 장르로, 여기서 계시는 다른 세상의 존재에 의해 인간 수혜자에게 전달되어 초자연적인 실체를 드러낸다. (3) 묵시론적 사고는 묵시록이라는 장르에 속하지 않은 문헌에서도 발견되며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세상의 이면에서 초자연적 실체들이 선과 악으로 나뉘어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이원론적 초자연적 우주론 하늘로부터 종말과 구원에 관련된 신비롭거나 초자연적인 메시지와 통찰을 받는다는 특별한 계시 세상의 마지막이 다가왔으니 신실한 자들은 종말에 대비하며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종말론 의로운 자들이 고난을 당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개입을 통해 그들을 구해 주시고 새로운 세상을 이룬다는 신적 통치/급진적 변혁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풍부하고 생생한 이미지와 상징의 사용 (4) 요한계시록은 유대적 양식의 묵시록에 속하지만 예언이나 편지 같은 다른 장르의 문학적 특징도 포함하고 있으며, 그 목적은 미래를 예측하는 데 있다기보다 고난에 처한 수신자들에게 위로와 소망과 도전을 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네 가지 방법      (1) 과거주의자는 계시록의 메시지가 후대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서술 당시의 독자인 로마제국의 초대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요한계시록의 언어를 풀 수 있는 열쇠는 유대적/기독교적 담론과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화적 배경이며, 주후 2세기 말 정도까지는 계시록의 모든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주장한다. (2) 역사주의자는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이 계시록 시대부터 지금까지 역사 내에 존재했던 다양한 인물이나 사건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는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를 거쳐 19세기까지의 계시록 해석을 주도했으나, 주관적 편견이 작동할 여지가 많이 현대에는 인기가 없다. (3) 미래주의자는 게시록의 예언들이 미래의 특정한 시기에 시작될 종말을 둘러싸고 펼쳐질 사건들과 관련된다고 가정한다. 이들 중 존 넬슨 다비에 의해 시작되고 스코필드 관주성경에 의해 대중화된 전천년적 세대주의는 아직도 미국에서 많은 추종자를 지니고 있으나,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그들이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는 본문들에 대한 주석적 연구를 통해 이 견해를 거부한다. (4) 이상주의자들은 계시록을 역사의 특정 시점과 연결시키기를 거부하고, 모든 세대와 관련되어 이해될 필요가 있는 무시간적이고 반복적인 신학적 메시지로 이해한다. 그들은 계시록의 기능이 미래의 예견이 아니라, 영적 전투에 임하고 있는 성도들이 어떤 영적 무기와 사고방식을 장착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이라고 주장한다.

 

요한계시록 해석의 현재와 미래       크레이그 쾨스터는 계시록의 의미와 메시지는 계시록 자체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이는 (세대주의와 같이) 계시록을 성경의 다른 부분과 섞어 특정한 종말론을 조립하려는 유혹을 피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그리고 계시록은 편지들의 모음으로서도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하며, 이는 이 책에 당대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관련된 구체적인 목적과 저작 의도를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마이클 고먼은 현대 독자들이 666이나 적그리스도와 같이 흥미를 유발하지만 지엽적인 사안에 관심을 갖기보다, 보좌 · 어린양 · 예배 · 증인 · 고난 같은 계시록의 핵심 주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데이비드 드실바는 계시록의 주요 주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새창조를 촉발시키는 그리스도의 재림 신실한 자들의 복수와 신원 죽은 자들의 부활 어린양의 보좌 앞에서 일어나는 심판 하나님의 대적들의 멸망 하나님의 질서로 충만한 정의로운 새로운 우주의 창조. 계시록은 특정한 정치적 당파의 입장을 지지하는 책이 아니라, 저항과 적대의 시대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실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8강 위명과 신약의 편지들

 


위명과 신약의 편지들      오늘날 많은 성경 해석자들은 신약의 일부 편지들이 편지 내에 명시된 저자에 의해 기록되지 않은 위서라고 의심한다. 이에 따르면 신약의 편지들을 세 종류로 범주화될 수 있다. (1) 논쟁적인 - 많은 학자들이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표명된 저자에 대해 반박하는 경우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베드로전후서, 야고보서가 이에 해당한다. (2)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는 - 몇몇 학자들이 약간의 증거를 가지고 표명된 저자에 대해 반박하는 경우로 데살로니카후서, 골로새서, 에베소서가 이에 속한다. (3) 논쟁의 여지가 없는 - 표명된 저자가 원저자라고 보편적으로 간주하는 경우로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카전서, 빌레몬서가 포함된다.

 

저자를 왜 의심하는가      18세기에 들어서며 일부 학자들이 신약 서신서의 저자 문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진정성과 허위성을 가리는 역할을 하는 다섯 요소로는 (1)(2) 문체와 개성 - 같은 저자의 이름으로 기록된 편지들 간에 문체(로마서-에베소서)와 개성(데살로니카전서-디모데전서)이 현저히 다른 경우, (3) 신학적 발전 - 동일한 저자의 이름으로 된 편지들 간에 신학적 용어의 사용 방식이 변했거나, 그 저자가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시대를 앞선 경우(갈라디아서-목회서신), (4) 역사적 타당성 - 서신의 진술이나 특성들이 역사적으로 타당해 보이지 않는 경우(베드로전서의 세련된 그리스어), (5) 위작가의 속임수 - 위명의 저자가 원저자의 편지처럼 보이기 위해 속임수를 쓴 흔적(데살로니카후서나 에베소서)등이 있다.

 

위명에 대한 세 가지 접근 방식 I      학자들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어 저작하는 위명이 적법한지 아닌지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보인다. (1) 이명(allonymity) - 이 주장에 동의하는 학자들은 위명 작가들이 독자들을 기만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존경받는 지도자들의 이름을 빌어 사도적 전통을 현실화 내지 동시대화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며, 최초의 수신자들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위명 편지들은 유언 문학이라 불리는 동시대의 대중적인 유대 문학 형식과 유사하며, 리처드 보컴에 따르면 베드로후서의 문학 양식은 편지 형식과 유언 장르를 결합한 것이다. (2) 위조 - 몇몇 학자들은 1세기 이후의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이 위조의 가능성에 민감했고 위-사도적 작품을 경멸했다는 것과 일부 신약의 편지들에 편지를 진짜 같이 보이게 만드는 아주 개인적인 세부 내용들이 포함된 것을 근거로, 위명이 고의적 기만인 위조일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그리고 경건한 동기(고귀한 거짓말)이든 악한 동기이든 당대에 이러한 위조의 관습이 일반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위명에 대한 세 가지 접근 방식 II      (3) 진정성 - 이 입장은 저자의 개성과 문체, 전달 방식이 역사적 연구에서 일반적으로 허용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저자의 진정성을 옹호한다. 동일한 저자에서 약간의 문체/개성변화는 정상적이며, 문체나 개성이 얼마나 달라야 저자의 진성성을 의심해야 할지에 대한 분명한 규칙은 없다. 또한 문체와 개성의 차이는 필사자(편지 대필자)의 기여나 공동저자들의 문학적 영향력을 통해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동일 저자에게서 나타나는 신학적 사고의 다양성은 서신서들이 수신자들의 독특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록된 문서라는 사실과, 저자들의 신학이 시간에 따라 발전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에 의해 설명이 가능하다. 위작가와 관련된 속임수의 단서를 감지하는 것은 고도로 주관적이며, 위명저자와 관련된 직접증거는 될 수 없다 역사적 개연성의 문제는 저자의 진정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가장 설명하기 힘든 난제로 남아 있다. 저자의 진정성을 변호하는 가장 강력한 주장은 저자가 허위라는 확실하고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생각할 거리      이 논쟁의 중심에는 다섯 가지 이슈가 관련되어 있다. 배경 - 그리스-로마의 맥락에서 위명은 중요한 인물의 명성과 권위를 거짓으로 끌어내려는 기만행위였는가, 아니면 실제 저자에 대해 경의를 표하면서 그의 유산의 중요성과 존속력에 대해 영예를 돌리는 일반적인 문학 관습이었는가? 정경 - 특정 책들이 정경으로 승인된 이유는 무엇인가? 초대교회가 위명서신임을 알아챘더라도 정경의 위치를 뒤집었을까? 저자 - 저자가 개요만 작성하고 위명작가가 기록했다면, 혹은 진짜 저자에게서 나온 본문 일부가 위명의 작품에 포함되었다면 저자는 누구인가? 장르와 문체 - 저자가 상황에 따라 의도적으로 문체를 변경했다고 가정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신약 편지들의 초기 수용사 - 최초기의 교회는 위명의 문제를 평가하는 데 우리보다 더 나은 입장에 있었기에, 수용사적 증거는 위명 여부의 판단에 도움을 준다



9강 신약성경과 로마제국

 


제국연구란 무엇인가     1세기의 로마제국에서 종교는 모든 사람에게 필수불가결한 부분이었고, 시민들은 제국을 수호하는 로마의 신들에게 적절할 경의를 표할 의무가 있었다. 최근에 신약과 제국의 관계에 관한 논의인 제국연구혹은 제국비평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왔으며, 이는 고대 로마세계의 정치와 종교에 관심을 가진 신약학자들이 신약의 언어 및 사상과 공명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되면서 이에 대한 설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텍스트 내부와 배경에 존재하는 제국의 억압적 정치권력과 이에 대한 피지배자들의 반응에 관심을 가지는 탈식민주의 비평이 성서학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간주했던 1990년대의 전반적인 정치적 분위기와 달리, 리처드 호슬리 같은 학자가 성경이 종종 하나님의 백성을 제국에 대한 저항자로 묘사했다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약과 로마제국의 관계에 대해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대체로 로마제국을 비판했다고 주장하는 견해와, 신약에서 철저하고 광범위한 반제국주의 정서에 대한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고 믿는 견해가 존재한다.

 

제국에 반대하는 신약성경      이 주장을 옹호하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신약의 저자들은 황제와 관련된 용어였던 복음같은 정치적인 언어를 의도적으로 빌어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데 사용함으로서 반제국주의적 태도를 드러냈다. 신구약 성경을 모두 포괄하는 중요한 관심사는 영적 구원이 아닌 현실정치와 관련되어 있었다. 예수는 로마제국에 반대하는 반역자로서 십자가에 달렸으며 이는 전적으로 정치적 사건이었다. 요한계시록 같은 몇몇 성경은 로마제국을 하나님의 주권을 대적하는 세력으로 직접 비판한다. 톰 라이트에 따르면 1세기에 가장 빠르게 성장하던 종교였던 황제숭배는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기독교의 신념과 직접 충돌했으며, 기독교인들은 한분이신 하나님 제국의 우상 중 누구를 섬길지 정치적선택을 내려야 했다. 하나님 예배와 황제 숭배는 결코 함께할 수 없었으며, 기독교의 좋은 소식은 정치적으로 전복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제국과 협상하는 신약성경      이 주장 역시 몇 가지 근거를 통해 옹호된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로마의 병사들과 종종 긍정적인 방식으로 반응한다.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정치권력이 하나님의 목적을 일한다고 주장하며, 사도행전에서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자주 제국의 공권력에 호소한다. 신약의 저자들은 그들의 대적으로 황제의 이름을 언급하는 대신, 사탄이나 죽음 죄와 같은 영적 실체를 거론한다. 몇몇 학자들은 예수가 주시다라는 말은 카이사르가 주가 아니다는 직접적 선언이라기보다, 주인인체 하는 땅 위의 주들에 대한 고의적 침묵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공공연하게 정치적 언어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황제와 제국 정부에 대하여 직접적이고 명백하게 비난하는 것은 신약 저자들의 최우선 과제가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생각할 거리       초기 기독교와 사도적인 저작들의 제국적 배경과 관련한 연구는 신약성서의 모든 문서를 사회정치적 맥락에 맞춰 새롭게 읽도록 자극했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의식적으로 정치적 언어를 채택해 예수, 하나님, 복음, 구원, 교회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신약의 저자가 제국의 용어와 사상을 차용했던 이유와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교회와 정부, 영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관계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10강 신약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리더십

 


예비적 과제      오늘날 교회에서의 여성 리더십과 관련해서는 오직 남성만이 회중에 대한 권위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믿는 계층적 남성 리더십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교회에서 권위자의 입장에 설 수 있다는 평등주의적 권위 리더십이라는 두 입장이 존재한다. 이 주제를 다루기 전에 다뤄야 할 몇 가지 예비적인 문제가 있다. 목사 - 여성 리더십과 관련해 논쟁이 되는 목사는 성경에서 리더 사역자를 표현하는 주요 용어가 아니었으며, 1세기에는 일반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의 직위가 아닌 사역의 내용으로 인정받았다. 문화적 동향과 편견 -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려는 견고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성경에 대한 진지한 연구에서 오는 최선의 논리적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계층적 남성 리더십      계층적 남성 리더십(HL) 관점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여성이 교회생활에 활동적으로 참여해야 하고 교회에서 어떤 종류의 리더십(주로 어린이나 여성들을 위한 사역)을 위해 세워질 수도 있지만, 성경적으로 남성들에 대한 직접적인 권위를 행사할 권한은 없다고 믿는다. 이들은 대부분 여성의 존엄성이나 지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다스리는 은사가 주로 남성들에게 주어졌고 여성은 가사와 양육에 집중해야 하는 성 역할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지지하기 위해 제시하는 성경 구절과 패턴들은 다음과 같다. 아담과 하와(1:26-28) - 여성은 먼저 창조된 남성의 조력자와 동반자로 창조되었다. 이스라엘의 남성 지도자 -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족장들과 중요한 인물들이 모두 전부이었으며, 신약에서도 예수와 제자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고전 11:12-16 - 남자는 아내의 머리이고, 남자를 위해 여자가 창조되었다. 고전 14:34-35 여성을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 딤전 2:11-14 -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고 순종함으로 배워야 한다. 딤전 3:1-12 - 감독과 집사의 자격은 한 아내의 남편에게만 주어진다.

 

평등주의적 권위 리더십      평등주의적 권위 리더십(EL)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여성에게 교회 안에서 권위를 가지도록 은사와 소명을 주실 수 있으며, 남성들을 가르치며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리더십이란 하나님이 원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은사와 소명의 문제일 뿐이며, 남성은 성별에 부여되는 어떠한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다.

 

(1) 계층적 본문 리더십에 대한 해답 - 여성에게 사용된 창세기 1장의 조력자라는 단어는 하나님께도 사용되는 단어이며, 완전히 동등한 입장에서 남성을 돕도록 창조되었다는 의미다. 창조질서의해 확립되었다는 장자상속의 원리는 하나님에 의해 꽤 자주 바뀐다. 성경에 나타나는 남성 리더십은 하나님이 당대의 남성 문화의 눈높이에 맞춰주신 결과이며, 그 자체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고전 11:11-16에서 머리는 반드시 권위라는 의미로만 해석되지 않으며, 이 본문의 결론에서는 남녀 간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한다. 고전 14:34-36은 성 역할에 대한 보편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교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여성들에 관련된 특수한 문제에 대한 대답이다. 딤전 2:11-14은 일반론이 아니라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려고 했던 에베소 교회의 특정 상황에 대한 언급이다.

 

(2) 평등주의적 리더십 관점을 형성하는 본문 - 창세기 1:26-28 - 인류에 대한 첫진술은 남녀 모두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고 피조물을 지배하도록 부름받았다. 드보라와 훌다 - 이스라엘 역사에서 드보라나 훌다 같은 몇몇 여성들은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복음서의 여성들 - 예수를 따르는 무리 중 많은 수가 여성이었으며, 그중 몇몇은 예수의 사역을 재정적으로 지원했거나 막부활의 첫 증인으로 부름받는 등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바울과 평등한 새로운 시대 - 3:28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남성과 여성이 없다고 말하며, 1:17-21에서는 성령이 부어지면 아들과 딸들이 예언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여성 - 바울은 빌 4:2-3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복음 안에서 동역자로 지칭하며, 16장에서 뵈뵈는 겐그레아의 집사”“후원자”“보호자로 불린다. 또한 롬 16:7에서 유니아는 사도로 불리며, 18:26에서 브리스길라는 그의 남편 아굴라보다 더 먼저 지칭된다.

 

평등주의에 대한 계증적 리더십의 대답       1:26-28에서 남성과 여성은 존재론적으로 동등하게 창조되었지만 기능적으로는 서로 구분된다. 드보라와 훌다는 표준이 아닌 예외다. 드보라의 권위는 남성 사사들의 것과 같지 않으며, 훌다의 예언이 그를 권위적인 교사로 보게 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서의 여인들은 예수를 따랐지만 예수로부터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직접적 권위를 받지는 못했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첫 증인이었지만 1세기에 공식적 사도로 인정받지 못했다. 3:18은 교회의 리더십과 관련된 본문이 아니라 교회를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그리고 뵈뵈의 역할은 불분명하며, 유니아에 대한 본문은 사도 중에서 유명한자뿐 아니라 사도들 사이에서 유명한자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브리스길라는 아굴라를 공식적 의미로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생각할 거리      이 주제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해석학적 질문이 있다. 문화와 진리 - ‘가부장제는 그 자체로 성경적인 진리인가? 문화가 반영된 본분에서 어떻게 영원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가? 창조와 새창조 - ‘창조새창조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이 주제에 대해 각각 어떤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하는가? 내러티브 분석 - 이 주제와 관련된 성경의 내러티브들은 서술적인 것인가 규범적인 것인가? 경험과 해석학 - 이 문제에 대한 이해에 있어 인간의 개인적 경험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11강 이신칭의와 행위에 따른 심판

 


믿음에 의해 결정되는 심판      (1) 스티븐 트래비스는 우리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심판 아래 있는 행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증거로 여겨야 하며, 따라서 행위 자체가 아니라 행위가 보여주거나 나타내고 있는 바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칭의와 최종 심판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며, 구원은 (이론적으로)처음의 칭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최종 심판에서 구원받을 만한 충분한 행위가 행해졌다는 조건 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2) 잘 알려진 신약성경의 몇몇 본문(7:48-50, 3:36, 16;31, 10:9)은 예수에 대한 믿음이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는 효과가 있다고 진술한다. 존 파이퍼는 라이트가 처음의 칭의 판결이 죄종 심판 때 사람이 살았던 삶에 의해 확정된다는 라이트의 견해가 복음의 진수를 잃은 것이며, 은혜가 참 은혜가 되기 위해서는 행위에 근거한 모든 심판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행위-지향적 심판       어떤 학자들은 성경의 몇몇 본문들을 근거로 바울과 다른 신약의 저자들이 최종 심판에서 인간 행위의 평가가 구원 여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주장한다. 구원이란 일종의 저울질이나 회계장부 정산과 같다는 것이다. (6:8) 다른 학자들은 두 가지 종류의 최종 심판이 있다고 주장한다. 불신자들은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고 신자들은 믿음에 따라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행위-지향적 관점은 하나님의 은혜와 칭의 개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지만, 최종 심판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에 초점을 두고 있는 많은 성경 구절들의 지지를 받는다. 다른 요소들도 이 관점의 손을 들어준다. 오경은 은혜로운 언약 관계에 남아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약에서도 마 25장에 유사한 가르침이 나온다. 행위로 최종 심판될 것에 무게를 두는 사람들은 약 2:14-16과 같은 본문을 언급하면서 행위는 참 믿음의 살아있는 활동이라고 강조한다. 가톨릭 신약학자 마이클 바버는 행위가 최종 심판 때 구원을 결정하지만, 이 행위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리스도 자신이 선한 행위들의 (사람 안에 있는) 원천이 되신다고 강조한다.

 

생각할 거리       이 논쟁에서 두 가지 생각거리가 있다. 사람들은 흔히 믿음과 행위가 반대된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으로 얻는 의가 행위와 완전히 분리된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행위에 따른 심판 역시 믿음의 중심성을 폄하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 둘은 언제나 함께 작동한다. 심판이 논의되는 전형적인 방식은 행위로부터의 심판이지 행위에 의한 심판이 아니다. 이는 심판이 행위와 관련될 수 있지만 수학적/제적 방식이 아닌 총괄적인 방식으로 관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2강 신약의 구약 사용

 


논의 설정하기      초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 가운데 나타났던 모든 진기한 사건들을 유대 성경을 통해 바라보았으며, 그 거룩한 문서가 사건들을 형성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님의 살아있는 음성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신약성경 원본에는 인용부호가 포함되어 있지 않기에 구약 인용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문학적 맥락을 잘 살펴야 한다. 신약에 인용된 구약 본문은 히브리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이었다. 신약성경 저자들은 이전의 유대인들이 예언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다양한 텍스트에 대해 성취를 주장한다. 신약의 저자들은 당대 유대인들이 채택했던 다양한 해석 방법론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해석 방식을 사용했다. 신약 기자들의 구약인용 방식에 대해서는 그들이 본래 구약의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문맥을 존중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는 두 가지 이해가 있다.

 

신약 저자들은 구약 문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많은 학자들은 신약 저자들이 구약 본문을 인용할 때 맥락 안에서 읽지 않고 구절들을 여기저기서 뽑아 자신들의 주장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원자론적 주해) 그리고 신약 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의 의미를 푸는 열쇠로 삼아 회고적인 방식으로 구약 본문들을 읽는 데 집중하느라(기독론적 해석), 본문의 원 의미를 반영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그리스도의 출현과 함께 시작된 방식인, 본문에서 인간 저자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에 의해 의도된 보다 깊은 의미인 센수스 플레니오르” (sensus plenior, 충만한 의미)를 찾아냄으로서, 구약 전체를 비로소 완성(telos)'으로 향하게 하는 독법이라 할 수 있다.

 

신약 저자들은 구약의 문맥을 고려했다        C.H. 다드는 신약 저자들이 종종 구약의 단일한 어구나 문장을 전체적인 문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용한다고 주장한다. 월터 카이저는 센수스 플레니오르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면서, 우리가 인간 저자의 의도를 붙들지 못한다면 구약성경은 구속사 내러티브의 맥락에서 읽히지 못한 채 신약에서 이끌어낸 신적 의미를 뒷받침하는 조각의 모음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신약 저자들이 구약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고 믿는 학자들이 강조하는 모형론적 해석은 구약에 기록된 사건이나 인물들을 모형으로 삼아 이와 대응되는 신약 본문과 병행점이나 대응점을 추적하는 방식이며, 특정 구약 본문의 패턴이 성경 역사 안에서 어떻게 놓여 있으며 그리스도에 비추어 어떻게 이해되는지 살피는 것을 그 목표로 삼는다. 이 방법은 센수스 플레니오르와 달리 본래의 의미를 부정하거나 약화시키지 않은 채 본문에 새로운 의미를 추가할 수 있다.

 

생각할 거리       신약 저자들은 구약을 해석하는 한 가지 방식에 메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단순히 구약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신약의 구약 사용에 대해 몇 가지 생각거리가 있다. 기독론적 해석 -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구약의 의미가 발원하는 중심이라는 기독론적 이해는 구약성경 읽기를 어떻게 재구성하는가? 점진적 관점/회고적 관점 - 헤이스에 따르면 신약 기자들은 구약에서 예수에게로 향하는 앞으로 읽기와 그리스도에 비추어 구약에 새로운 빛을 조명하는 거꾸로 읽기를 모두 수행했다. 과연 이들 중 어디에 우선순위가 있는가? 이중 저자? -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에서 새로운혹은 숨겨진의미를 발견한다면, 영감에 찬 이 의미들은 구약 저자의 본래 의도를 빗나가거나 대체하는 것인가? 성취 언어 - 성취란 객관적 현실, 즉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에언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모형론적으로 다시 돌아보게 된 주제와 같이 유동적인가?


13강 성경의 적용과 사용


 

성경 적용의 흔한 오류      성경을 적용하는 데 있어 독자들이 흔히 범하는 두 가지 해석적 오류는 성경에 어떤 명령이나 금지가 기록되어 있든지 항상 직접적으로 적용가능하다고 가정하는 성경에 대한 직접적 보편적 접근 방식문화적 눈가리개를 하고 자신이 원하는 본문만 적용을 위해 선택하는 알라카르테방식이다. 오늘날 성경의 적용에 대한 더 성숙한 방식은 기록된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윤리는 인도하는 데 충분하다고 간주하는 성경으로부터의 적용”(FTB), 성경이 세상에서의 삶에 윤리에 대한 완전한 그림을 제시하지 않기에 성경을 넘어 해석해야 한다는 성경 너머의 적용”(BTB)의 두 가지 관점이다.

 

성경으로부터의 적용방식      성경으로부터의 적용방식은 기록된 성경을 그리스도인의 삶과 윤리를 인도하는 데 완전히 충분하다고 간주하는 견해로, 성경이 다른 시대와 문화에서 쓰였다는 것을 인식해 적용에 반영한다는 점에서 직접적 보편적 접근 방식과 구분된다. 이 방법을 취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전제에 기초해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한다. 원리들에 집중하는 것 - 성경 본문을 올바로 해석/적용하기 위해서는 문화 안에서의 구체적 명령이 아니라 그 명령의 배후에 놓인 (초문화적) 원리들에 입각해 보편적인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점진적 계시 - 하나님은 자신의 뜻과 계획을 성경의 거대한 이야기에 담아 점진적인 방식으로 보여주신다. 따라서 성경 내러티브의 뒤쪽에 위치할수록 더 완전에 가까운 이상이나 명령이라고 볼 수 있으며, 더 충만한 신약에 비추어 구약을 해석/적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원리다. (데니스 홀링거)

 

성경 너머의 적용 방식       성경 너머의 적용”(BTB)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적용을 위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지만, 성경이 세상에서 어떻게 바르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종국적 계시를 제공하고 있지는 않다고 여긴다. 그리고 성경에 내포된 윤리적 비전들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넘어서는 해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적용방식의 범주에 속한 두 가지 핵심 견해가 있다. 구원-운동력 해석학 - 윌리엄 웹에 따르면 하나님은 백성과 세상에 대한 완전한 뜻과 그에 따른 거룩과 순종의 기준을 시간에 따라 점진적으로 드러내시며, 이러한 변화의 궤적은 성경이 제시하는 틀을 넘어 궁극적인 윤리추구로까지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움직이지 않고 정적인 윤리 원칙(예를 들어 십계명)도 존재한다. 각본 없는 즉흥극 - 톰 라이트는 성경이 네 가지 막(창조, 타락, 이스라엘, 예수)를 따라 흘러 왔고, 지금은 교회의 사명이라는 다섯 번째 막이 펼쳐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교회의 역할은 이 내러티브 안으로 들어가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창조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생각할 거리       성경의 적용과 관련해 생각해볼 지점이 있다. 성경의 독특한 영감과 권위 - 성경의 적용에 있어 정경은 충만한 신적 계시를 제공하는 닫힌 체계인가? 아니면 성경 시대를 넘어설 수 있는 화살표이자 기초로 기능하는가? 영적 분별 - 직접적-보편적 접근방식과 달리 FTBBTB는 성경사용과 적용에 있어 어느 정도의 영적 분별력을 요구한다. 그리고 BTB의 경우 어떻게 성경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현대인들과 공동체로부터 더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보편성과 문화적 상황화 - 직접적-보편적 접근 방식이 성경을 모든 시대에 모든 문화들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문자적으로 적용가능한 것으로 다루는 반면 알라카르테 접근방식은 개인적 문화적 선호도나 적용가능성을 최대한도로 허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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