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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윤리이슈

목사의 딸 (박혜란 지음, 아가페 펴냄)

by 서음인 2016. 6. 2.

한국을 대표하는 정통 개혁주의 신학자로 신구약 주석 전집을 저술했던 박윤선 목사님의 딸인 박혜란 목사님이 쓴 이 책은 사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박윤선 목사님이 전처의 소생들인 자신들을 전혀 돌보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큰 상처를 받은 채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가던 자녀들이 먼저 내민 화해의 손길마저도 뿌리친 채 생을 마치셨다는 내용입니다. 저자가 폭로하는 충격적인 진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한 거룩한 희생이라는 말로 용납될 만한 수준이 결코 아닙니다. 저자는 박윤선 목사님의 이러한 모습이, 남존여비와 충효사상이라는 유교의 가르침에 복음의 메시지를 혼합시킨 그의 신앙 -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유교적 칼빈주의" - 때문이었다고 결론내립니다. 그리고 아직도 박윤선 목사님과 "유교적 칼빈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권위주의적, 율법주의적 행태를 보이는 한국교회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냅니다. 이 책을 사자마자 단숨에 읽어가면서 부모로서 어떻게 그렇게 철저히 자녀들을 버려두고 심지어 학대할 수 있었는지 자식이자 부모된 자의 입장에서 혼자 화도 내고 눈물도 흘렸습니다. 그리고 정통 보수를 자처하는 일부 목회자들이 가끔 보여주는 왜곡되고 뒤틀린 심성과 행태의 뿌리를 엿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났다면 이 책은 개인적 원한으로 한국 보수교회가 떠받드는 신학자 한 사람을 흠집내려는 가십성 폭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의 백미가 이렇게 명성과 존경을 한몸에 받는 아버지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았고, 그 아버지를 닮은 ‘무섭고 정죄하는 하나님’만을 알았기에 불행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저자가 미국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음악과 신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어떻게 성경이 증거하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났고 치유를 경험했으며 참 자유를 누리게 되었는지를 그린 이 책의 후반부라고 생각합니다. 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저자는 평생 음지에서 회한을 품은 채 아버지를 원망하고 이 원망을 정죄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악순환에 빠져 살았겠지요. 이 책은 단순히 한 개인의 불행한 가족사에 대한 고백이나 폭로를 넘어, 평생 아버지를 찾아 몸부림쳤던 딸을 따뜻하게 품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기록이자,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는지를 알지 못한 채, 풍족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한국의 보수 교회에 주는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로 읽혀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나오는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할까 합니다. 저자를 포함한 박윤선 박사의 자녀들(물론 사별한 전처의 소생들) 이 장례 후 3천 달러를 모아 그분을 멘토로 섬기는 H 신학교 도서관에 귀한 도서를 기증하러 갔다고 합니다. 책에 붙는 기증자 이름에 아버지인 박윤선 박사와 어머니인 김애련 여사를 함께 넣으려고 했더니 당시 신학교 교장께서 표정이 굳어지며 “안 될 일이요. 박윤선 목사님께 전처가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더랍니다. 글쎄요, 과문하고 세상 이치에 어두운 탓인지 몰라도 진실을 가려야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저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박윤선 목사님을 둘러싸고 있는 찬란하지만 무거운 신화적 아우라를 벗겨 드리고 좀 편히 놓아 드릴 때도 되지 않았을까요? 천국에 계신 박윤선 목사님도 그걸 원하시지 않을까요? 그나저나 이 책의 내용이 불편하신 분들이라면 박윤선 목사님의 '딸'이 - 아들이 아니고 - 목사가 되었다는 사실부터가 심히 불편하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언뜻 머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후 기  이 책에 관련된 여러 논란들을 바라보면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君師父一體의 충정으로 '스승'을 지키려는 '제자'들은 도처에 넘쳐났지만, 상처받은 한 '영혼'을 이해하고 보듬고 위로하려는 '목자'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는 사실이다.  스승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도 목소리를 높였던 목사님들에게 묻고 싶다.  혹시 자신의 교회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부모에게서 방치되고 학대받아 상처입은 성도를 만난다면 과연 그때도 박혜란 목사님께 했던 것처럼 모질게 대할 것인가? 내 눈에는 그분들이 양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가 아닌,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으려고 벌벌 떠는 '유교적 칼빈주의'의 儒生들로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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