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 기독교/윤리이슈

여성이 만난 하나님 (강호숙 지음, 넥서스 크로스 펴냄)

by 서음인 2017. 1. 13.

1. “내가 신앙적으로 가장 깊이 좌절한 때는 “하나님이 남성 편”이라고 느꼈을 때였다. 교회에만 가면 왠지 여자라서 미안하고 ‘불편한 존재’인 것처럼 주눅 들어 많이 낙심했고 방황했다. 한국교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건 참 아프고 서러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 여성의 편이시기도 한 하나님을 만났고, 여성의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이야말로 존엄한 인격체로서 나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요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2. 이 인상적인 서문으로 시작되는 책 『여성이 만난 하나님』에서 총신대에서 오래 동안 ‘여성의 하나님’에 대해 강의해 오다가 지난해 초 부당하게 해직된 저자 강호숙 박사는, 보수교단의 여성신학자와 여교역자로 겪어야 했던 한국교회의 성차별적 현실과 남성적 시각으로 왜곡된 성경읽기를 고발하고, 지난했던 신앙과 인생 그리고 신학의 여정에서 만나왔던 ‘여성의 편이시기도 한’ 하나님을 증언한다. 저자는 하나님 앞에서 여성은 “남녀질서라는 교회의 가부장적 교리에 함부로 짓밟히는 ‘잡초’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마치 ‘모자이크의 한 조각’처럼 하나라도 빠지면 하나님의 창조 그림이 완성되지 않는 소중하고 독특한 존재”라고 강조하면서, 이 책이 “진정한 여성됨과 기독교 신앙의 양극단에서 길을 잃은 교회 여성들에게 다리 역할(bridge role)을 하고, 남성 중심의 교회에서 말할 수 없었던 여성들의 실존적 필요나 신앙적 질문들을 함께 고민하고 나누는 공감과 위로의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교회에서 가르친 남성의 하나님을 뛰어넘어 여성 스스로가 찾고 구하고 두드려 만난 여성의 하나님을 당당히 드러내며 자랑하게 될, 그래서 교회가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맛보게 될' 그날이 속히 오기를 소망한다. 아픈 차별의 체험에 대한 생생한 증언과 설득력 있는 신학적 · 주석적 통찰이 잘 어우러진 저자의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에는 진실만이 줄 수 있는 깊은 울림과 감동이 있다.

 

3. 오늘날 정통보수를 자처하는 한국 주류 기독교의 정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단어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반(反)”이 아닐까? 저자와 같은 교단에 속한 한 교회에서만 30년 넘게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심각한 질문을 제기한다. 反이슬람, 反동성애, 反共, 反여성안수 등 온갖 종류의 들을 양산하면서 그 이야말로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자 사명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종교가, 과연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심으로 사람들을 가르고 억압하고 차별하는 모든 장벽을 허무시고 해방과 화해와 평화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요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 합동총회장 입구에서 “여성안수를 승인해달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배포하던 저자는 수많은 남자 목사가 총회장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합동 총회는 음행한 목사도 들어가고, 거짓말과 도둑질한 사람도 들어가고, 가스총도 들어가고, 괴악하고 악독한 목사까지 모조리 들어가건만 이찌된 영문인지 여자는 절대 못들어가는구나.” 내가 보기에도 화장실도 아닌데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인간 중 오직 한 종류의 性에 해당하는 사람들만, 그것도 짙은 색 옷을 입고 머리에는 기름이 번들거리는 중늙은이 이상들만 바글거리는 모임이라니 ‘보기에 심히 좋지 않다’. 

 

목차

 

1부 여성이 기독교 신앙을 말하다

2부 신학의 렌즈로 성(性)을 보다

3부 여성의 눈으로 구약성경 읽기

4부 여성의 눈으로 신약성경 읽기

5부 기독 신앙과 성윤리

6부 기독 여성의 인생과 사랑

7부 미래 교회를 위한 여성 리더십

에필로그 하나님의 딸들이여, 당당하라! 행복하라!

 

본문 엿보기

 

여성의 하나님을 만나다   한국교회가 내게 가르치고 보여준 이미지는 남성적이다. 마치 과정은 살펴보지도 않고 결과만 중요시하는, 전근대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처럼 말이다. 잘못하면 혼을 내고, 남성의 권위에 도전하면 큰 벌을 내릴 것 같은 무서운 아버지 같다. 남성 중심인 현 교회의 풍토는 여성이 남성보다 학력이 더 높거나, 신앙이 더 깊거나, 은사체험이 많거나, 능력이 많은 것을 원치 않는 모습이다. 나는 후배 사역자에게조차 “나대는 여자는 딱 질색”이라는 말을 듣곤 했다 ..... 주님을 믿으면 행복하다는 말을 많이 하건만 그 무렵 나는 ‘남성의 교회에서 남성의 하나님만 강요하는’듯한 폐쇄성과 획일성에 깊은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있었다. 교회와 학교에서 접하는 남성적인 하나님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아 마음속으로만 홀로 외롭게 저항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냥 습관적으로 성경을 읽고 난 후 무릎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 그때 깨달았다. 내가 남성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교회에 몸담으면서 남모르게 아파하면서 힘들게 저항했던 이유는, 주님께서 나에게 여성의 하나님을 알리라는 사명을 주셨다는 것을!

 

하나님은 남성인가?   폴 주잇은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하나님을 가리키는 대명사 he를 남성적 언어로 해석하지 않고 유추적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그렇게 유추하는 해석은 그 단어가 갖는 성적 의미가 아니라 인격적 의미다”라고 하였다. 결국 “하나님은 인격이시다”라는 중대한 명제로 하나님을 언급할 때 he아니면 she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몇몇 여성 신학자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 가부장적 단어라 생각해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르자고 주장하지만 나는 이런 주장에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어머니로 부르자는 것 역시 하나님 아버지를 남성으로 보는 해석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 주의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 역시 남성성을 강조한 의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이라는 사고를 묘사한 친근한 표현이다. 이는 하나님의 性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표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인정하듯이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 말할 때도 하나님의 남성적 이미지뿐 아니라 여성적 이미지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왜 성을 만드셨는가?   하나님이 인간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단순히 남녀질서(가부장적 위계질서)만 의미하는 게 아니다. 성적인 존재라 함은 생육과 대화, 친밀과 교제, 문화와 신앙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남성과 여성의 ‘하나됨’과 ‘친밀’, ‘서로 사랑함’의 본질적 의미는 인격적인 것이다.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종속적 관계와 역할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가치들이다. 만약 남성이 인간의 전체요 대표라고 생각한다면 독단적이고 교만한 발상이다. 남성이 여성 없이 자신을 안다고 하는 건 마치 거울 없이도 자신의 얼굴을 잘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 내가 합동교단과 총신대학교에 오랜 세월 머무는 동안 절감한 것은 신학과 신앙에 ‘여성’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여성에 대해 아느냐?”라고 물으면 바로 총알처럼 날아오는 대답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합동과 총신은 “페미니즘이라는 목욕통 물이 조금 더럽다고 그 속에 담긴 아기(여성)까지 내다버린” 셈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이 여성을 지으신 뜻과 목적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여성의 입장과 문제제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여성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성적 존재로서의 인간됨이 본질이라면,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서 여성의 권리와 자유, 여성의 입장과 경험, 여성의 통찰을 수용하는 것은 마땅하다.

 

생각하는 여성, 질문하는 여성, 행동하는 여성   성경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남성 중심의 성경 해석을 그대로 믿어온 결과 오늘날은 거의 ‘남성 무오주의’에 육박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 안타깝게도 보수교단의 문자주의자들은 성경을 구속사적 관점으로만 읽고 해석하는 방식을 정형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여성의 관점을 일체 배제시켜버렸다. 하나님의 구속이 인간의 삶에서 남성과 여성의 통합적인 관계 속에 있음을 보지 못한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은 강조하지만 이들의 아내인 사라, 하갈, 리브가, 레아와 라헬과의 관계에 개입하여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은 놓쳐버린 것이다. 인간관계의 갈등과 애환, 억압과 소외 같은 실존적 삶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놀라운 은혜 역시 간파하지 못한다 ....... 여성의 하나님은 낮은 자의 하나님이요 죄인과 여성의 친구이신 하나님,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의 말씀과 인간적 삶을 깊이 묵상하며 실천하는 신앙이 오늘 이 시대에 절실하다. 여성들의 성경 읽기가 더 깊어지기 위해서는 여성이 하나님 앞에 주체적인 존재로 서야 한다. 남성이 떠먹여주는 성경말씀과 해석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 하나님께서 여성 자신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끊임없이 질문하며 하나님을 찾아가야 한다.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과 이스마엘의 하나님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임신한 상태로 쫓겨난 하갈을 광야에서 만나 그 억울한 사정을 헤아려주신 하나님을! 그리고 이스마엘과 함께 쫓겨났을 때도 하갈에게 나타나 위로와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신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언약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정 때문에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기를 주저한 아브라함보다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했던 아내 사라의 편에도 계시는 분이다. 아울러 억울하게 쫓겨난 여종 하갈에서 직접 나타나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을 볼 때 아브라함, 이삭, 야곱만 집중해서 볼 일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남성의 하나님인 동시에 여성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모든 자에게 은혜와 축복을 고루 베풀어 구원의 섭리를 이루신다. 그러니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뿐 아니라, 사라, 리브가, 라헬과 레아, 하갈이 만난 하나님도 고루 잘 살펴야 한다. 그래야 구속사뿐 아니라 인간관계의 갈등과 삶의 애환 가운데 찾아오시는 은혜의 하나님은 더 넓고 더 깊이 알아가지 않겠는가!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 여성들   나는 여성 신학자로서 성경을 기록한 자가 모두 남성이라는 사실에만 큰 의미를 두는 관점에 유감을 갖고 있다. 남성이 성경을 기록한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온 세상의 주님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생애와 지상사역의 목격자로서 예수님을 전한 여성에 대해 아는 것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서다. 남성 제자들이 없던 상태에서 기록된 복음서의 사건을 분류하면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의 생애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여인들의 증언이다 ....... 왜 주님은 그 당시 하찮은 존재이며 증인도 될 수 없었던 여성을 우주적이고 종말적인 그리스도의 부활의 첫 제자로 삼으셨을까?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를 오히려 신적 권위를 지닌 열 두 제자에게 부활을 전하는 전달자로 삼으셨을까? 끊임없이 질문하며 묵상한 끝에 “십자가의 증인이 되지 못한 자를 부활의 증인으로 세울 수 없다”는 답을 얻었다. 유대 가부장사회에서 예수님이 열두 사도를 모두 남성으로 세웠다 하더라도 십자가의 증인이 되지 못한 자를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세울 수는 없었을 게다. 주님 입장에서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었을 것이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을 해석할 때는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성경에 흐르는 하나님의 뜻과 가치와 정신에 따라야 한다. 바울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라고 말한 것은 오히려 그 당시 예배를 드릴 때 여성이 예언도 하고 방언도 했음을 입증하는 말이기도 하다. 고린도교회에는 예언과 방언하는 자 가운데 여성이 있었다(고전 11:5). 유니아, 뵈뵈, 브리스길라, 다비다 등이 사도, 집사, 동역자, 선지자, 교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바울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말한 의도가 “떠들지 말라”인지 “예언하지 말라”인지 또는 “교회에서 어떤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인지 성경 문맥상 정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 또한 바울 당시 오늘날과 같은 ‘목사’ 직분은 없었다. 따라서 “교회에서 여자는 잠잠하라”는 말을 “설교하지 말라. 목사하지 말라”고 해석한 것은 현대에 남성 목사 중심으로 직제가 이루어진 이후의 해석으로 보아야 한다. 바울은 여성에게 “설교하지 말라. 목사하지 말라.”고 말한 적이 없다.

 

한국교회의 여성들에게   내가 여성 교인과 여성 사역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예수를 믿는 여성은 도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을 만난 여성은 고분고분하지 않고 하나같이 적극적이며 심지어 드세고 과격한 여성이었다 ..... 오늘날 여성 교인과 여성 사역자들이 사복음서에 나오는 여성들만 자세히 살펴보아도 당시의 여성이 얼마나 그 시대에 도전하며 복음을 위해 헌신했으며 사랑으로 주님을 따랐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이러한 여성을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제자로 여겨주셨다. 이러한 주님의 태도야말로 그 당시 예수님을 따랐던 여성이나 오늘의 여성에게 복음이 아닐 수 없다 ....... 내가 기독 여성에서 두 번째로 하고 싶은 말은 여성의 하나님을 드러내어 교회를 되살릴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남성이 가르쳐준 하나님이 아니라 여성이 우리가 부딪혀 만난 그 하나님을 소리쳐 불렀으면 좋겠다 ..... 한국교회가 남성의 하나님을 외쳐온 사이에, 남성 목사에게 신적인 특권을 부여하여 절대화시키는 사이에, 여성이 차별받고 인권이 유린되었으며, 성적 권리와 자유를 억압당하면서 분열과 권력다툼과 거짓과 부패 그리고 성적 타락이라는 엄청난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 아닌가!

 

<여성이 만난 하나님 - 한국교회에서 여성의 하나님을 만나다>

 

 

여성신학 책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