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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영성제자도

한국 기독교 지도자 강단설교 - 이용도 (이용도 지음, KIATS 엮음, 홍성사 펴냄)

by 서음인 2016. 11. 4.

1. 『한국 기독교 지도자 강단설교 - 이용도』는 한국의 신비주의자라 불리며 짧지만 불꽃같은 생을 살다 간 시무언(是無言) 이용도 목사(1901∼1933)의 설교와 일기 일부를 발췌해 엮은 책이다. 강렬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예언자적 설교로 가는 곳마다 회개와 부흥의 물결을 일으키며 많은 일화를 남겼지만 특유의 신비주의적 성향과 기성교회에 대한 강한 비판 때문에 여러 교단에서 배척받은 후(1933년 감리교 목사에서 면직된 후 장로교 총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나 1999년 감리교 총회에서 정회원으로 복직됨) 예수교회를 창립하여 활동했던 이 독특한 인물의 말과 글을 살피는 일은, 머리말을 쓴 백석대학교 성백걸 교수에 의하면 “근대 서구의 기독교 패러다임을 넘어 인류의 보편사적 의미와 가치를 지닌 한국 특유의 기독교 패러다임”의 출현을 살피는 일에 다름아니다

2. “죽음의 물결 위에 산 시체들이 떠다니는” 어둠의 시대를 살았던 그는 기도를 통해 인류 생명이 사랑과 정의의 생명으로 바뀐다는 “생명역환(生命易煥)”을 통한 기도와 사랑의 혁명운동을 주창했으며, 예수의 삶은 단지 숭배나 찬양의 대상일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내야 할 참된 삶의 길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성백걸 교수는 이러한 시무언의 영적 기독교에 대해 “동아시아의 종교문화에서 형성된 佛敎 전통 영성과 결합하여 창조적으로 융합된 ‘無’와 ‘空’의 영적 기독교이자, 儒家 전통 영성과 새롭게 만난 ‘음양창성(陰陽創成)’의 영적 기독교였으며, 道家 전통 영성으로 재해석된 ‘柔’와 ‘玄’의 기독교일 뿐 아니라, 한국 巫敎의 원형적 영성에 접목된 ‘一化’의 영적 기독교”로, “동양 종교 전통의 진수와 기독교 진리가 융합되어 피어난 영적인 꽃”이라고 평가한다. 그런 이용도 목사의 신앙이 선교사들에 의해 전해진 서구 근대의 보수적인 기독교 패러다임과 충돌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3. 단순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비유와 시적이면서도 위엄있는 예언자적 강화로 이루어진 그의 설교와 글들을 접하노라면 1세기 갈릴리 민중들의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사로잡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바로 이렇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보니 회개를 외치고 청빈을 벗삼았으며 당대 기독교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성 교단에서 축출되고 젋은 나이에 요절한 것까지, 이용도 목사의 삶 자체가 그가 그렇게도 따르기 원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많이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신비주의 성향이 강한 그의 신학과 신앙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논란을 떠나, 성공과 번영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복음’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오늘, 그의 삶과 설교야말로 한국교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예언자적 외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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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활동은 공(球)입니다 (1931년 1월 24일 일기) 나는 주께서 놀리시는 대로 노는 공입니다. 주여 사랑의 줄로 나를 메시옵소서. 그리고 마음대로 주께서 놀리시옵소서. 나의 운동은, 그것이 나의 운동이 아니라 주의 팔의 운동이었습니다. 주의 팔을 움츠려 끈을 당기시면 나는 주의 앞으로 따라 들어올 것이요, 팔을 펴서 끈을 풀으시면 나는 또 굴러 나갈 것입니다. 주의 팔의 운동대로 들고, 나며, 구르고, 노는 공이옵니다. 눈도 귀도 입도 수족도 다 없는 그냥 공입니다. 나의 눈도 버리고, 귀도 잘라 버리고, 수족도 버리고 전체가 구르기 쉽게만 되게 하옵소서. 그것들이 있으면 나는 구르기에 거리낄 것이 심히 많습니다. 그러면 주께서 내가 보는 대신 보아 주시고 듣는 대신 들어 주시고 동하는 대신 동케 하실 것이었으니 나의 귀, 눈, 입, 코, 손, 발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곧 주의 눈이 나의 눈이요 주의 귀가 나의 귀였습니다. 그런고로 나는 주를 통해서만 보고, 주를 통해서만 걷고 동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생애 (연대 미상) 예수는 당신이 이 땅에 와서 하신 일이 세상에 나타나거나 말거나 명예가 되거나 안 되거나 후세 사람이 보거나 안 보거나 관계하지 않고, 그저 죄인 하나를 만나서 그를 친구로 삼고 의인으로 만들려는 것만이 목적이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예수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렸노라고 일기에 써 둔 것이 없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사정이 불쌍해서 살리시고 일으키신 것이지 자랑하거나 책을 쓰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 예수의 일은 쓰는 데 있지 않고 자랑에 있지 않고 세상의 계획으로서가 아니고 오직 하늘에서 내리는 지시에 의해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 인도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구박과 천대 속에서 살다가 전도에 나서서는 갖은 박해와 곤란을 당하시도 붙들려서는 때리면 맞고 욕하면 말없이 받으시었으니, 그 중심에 오직 사무친 것은 세상에서 몰리는 자와 연약한 자, 세상에 몸 둘 곳 없는 죄인을 붙들어 안아 그를 위로하고 그를 구원하고 죽은 자를 살리려는 사랑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일생이요, 예수의 사업이었습니다.

예수의 사랑 (1932년 6월25일 명촌교회에서 한 설교) 육의 생명은 피로 살고 영의 생명은 사랑으로 삽니다. 피가 없는 육은 시체요, 사랑이 없는 영은 악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이 살려면 예수의 사랑에 접하여야겠습니다. 세상에 귀하다는 것이 많지만 사랑이 가장 귀하다는 것은 사랑의 근원이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 예수의 사랑에 접한 자는 고(苦)에서 미(美)를 찾고 난(難)에서 시(詩)를 찾습니다. 비애, 고독은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찾게 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입니다. 비애와 고통 속에서 아름다운 시의 노래를 찾는 자 - 예수에 접한 자 -는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 고(苦)는 나의 선생, 빈(貧)은 나의 애처, 비(卑)는 나의 궁전으로 알아야겠습니다. 솔로몬의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상가에 가는 것이 낫다고 한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성자와 진리의 사도들은 苦 · 貧 · 卑賤을 환영하였습니다. 주를 믿는 자는 내가 먹기 위하여, 물건을 얻기 위하여 일하는 것보다 남을 위하여, 남을 구하기 위하여 힘써야 할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 (1931년 12월 27일, 산정현교회 일요 강화) 2천년 전 겟세마네 동산에 흐르던 피땀이 지금도 이 강산에 흐르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면 다 같이 겟세마네로 달려가 주님 앞에 엎드려 통곡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고 우리 교회를 위하여 이 강산을 위하여 피땀 흘리며 기도해야겠습니다. 피땀 흘리는 기도가 있는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또 이 세상은 악하여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무리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힘써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행적을 한 편의 史記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피땀이 우리에게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 강산에서 자란 우리는 이 강산을 겟세마네로 삼고, 피땀 흘리며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의 겟세마네는 우리의 피땀을 부르고 있나니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같이하여 겟세마네 동산, 주님 계신 성산으로 나아갑시다.

믿음이란 (1931년 10월 7일 편지) 그 말 (설교하던 부흥회 강단에서의 축출선언)을 듣고 온 나는 강단에 올라가 엎드리자 참회의 눈물, 비분의 울음에 들썩거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악한 교회가 강단에서 교리와 신조를 설명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삼되 그리스도의 마음은 잊어버렸구나! 믿음이란 교리의 승인이나 신조의 묵인에 있지 않고, 예배의식을 집행함에도 있지 않고, 연설이나 기도에도 있지 않고, ‘할렐루야 아멘’ 하며 노래하는 데도 있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그 神이 나의 신이 되어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함으로 죽음에서 나오는 것이어늘, 어느 교만한 교회가 알맹이는 빼어 버리고 무엇을 말하며 사랑이라 하는고.

종교는 설교에 있지 않고 삶에 있습니다 (1931년 10월 편지) 나는 별것 다 봅니다. 무교회지도 보고, 순복음지도 보고, 장로회지도 보고, 감리회지도 보고, 사회주의지도 보고 별것 다 봅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 본다고 그 주의자는 아닙니다. 나는 어떤 형제에게는 佛經 좀 보기를 권하고, 어떤 교역자에게는 사회주의지 좀 보기를 권하기도 합니다 .....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서 그의 전체를 부인할 것을 찾지 못하는 자이기를 원합니다. 취사의 일을 주님께 의탁한 나는 무엇에나 다 접근합니다. 나는 나를 기를 수 있어 취하고, 나를 기를 수 없어 버립니다. 나는 창기에게서도 배움이 있는 자요, 난봉꾼에게서나, 아이에게서나, 무식한 자에게서나, 불교인에게서나, 무교회주의자에게서나 누구에게서든지 다 배울 바를 찾는 자입니다 ..... 나는 말하지 않고 즉 이론하지 않고 그냥 살렵니다. 말하지 아니하고 사는 자가 되어 최대 축복을 누릴 따름입니다. 진리는 말할 바 아니요, 사는 장소임을 나는 압니다. 설교, 문서, 다 좋지만, 그 뒤에 우리 삶이 없으면 이는 무익한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 모든 것이 나오게 합시다.

생명의 역환(易煥) (1931년 11월 14일 편지) 신앙이란 곧 생명의 역환의 일입니다. 세상에 살던 나의 죄악의 생명은 하늘에 사는 예수의 생명과 바꾸어지고, 物을 바라던 나의 생명을 靈을 원하는 그 생명과 바꾸어지고, 근심과 걱정과 염려로 애쓰던 나의 생명은 환희와 평화와 용기로 날뛰는 그 생명으로 변하여지고, 땅 위에서 물욕과 정욕에 싸여 오래 잘 살기를 꿈꾸던 나의 생명은 이를 저주하여 버리고 하늘에 살려는 생명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 이렇듯 신앙생활이란 곧 생명과 생명의 바꿈질(역환)이었습니다. 믿는다 하여도 이 생명의 역환이 없으면 그는 아직 사망에 거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생명에서 불의를 찾아 가지고 예수에게 달려가서 그 생명의 의와 바꾸어 가지고 나오나니 이것이 곧 우리의 기도 중에 되어지는 일이었습니다 ..... 지상에서는 공간으로서 거리를 측정하였으나, 영계에서는 사모(思慕) 정도에 따라 원근이 정해집니다. 고로 육의 원근은 공간에 달려 있고 영의 원근은 사모에 달려 있습니다. 사모의 정도가 밀(密)할수록 열(熱)하여 지나니 열하여 질수록 영과 영은 접근하게 됩니다. 사모의 정도가 소(疎)하여지매 주님에게서 우리는 그만큼 멀리 있고 밀(密)하여지매 그만큼 우리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와의 원근은 그 관계가 주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에게 있는 것이외다 ..... 평양 부형들, 육으론 멀되 영으로 가까움은 사모의 도(度)가 냉(冷)치 않은 까닭인 줄 압니다. 무언(無言), 겸비(謙卑), 기도, 순종, 근실(勤實), 회집(會集), 구제, 십자가, 이것이 천국 동행자들의 할 바 일이올시다.

생명의 공부 (1931년 2월 8일 일기) 영원한 생명은 곧 하나님과 예수를 아는 것입 니다. 생명은 곧 진리입니다. 이 앎은 연구 탐색의 앎이 아니라 感하여(느껴) 아는 것입니다. 감하여 아는 일이 가장 만물을 잘 아는 법입니다. 가장 깊은 또 가장 참된 앎은 感(느낌) 입니다. 영계를 아는 일, 하나님을 아는 일, 이는 두뇌의 연구 로서 득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감으로서 하는 것입니다 ..... 주께서 말씀하신 바 영생의 내용과 성질이 이러합니다. 천당에 가서 길게 사는 일이기도 하지만, 지금 이날에서 깊이 아버지와 아들을 경험하는 생명을 가지는 일입니다.


한국기독교 지도자 강단설교 - 이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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