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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영성제자도

토머스 머튼의 시간 - 일기로 읽는 토머스 머튼의 전기 (토머스 머튼 지음, 바오로딸 펴냄), 토머스 머튼 - 은둔하는 수도자, 문필가, 활동하는 예언자 (키스 제임스 지음, 비아 펴냄)

by 서음인 2016. 6. 1.

1.『토머스 머튼의 시간』은 트라피스트회 수도사이자 평화주의자로 『칠층산』을 포함한 여러 저작들을 통해 20세기를 대표하는 영성 작가의 반열에 오른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의 일기를 선별해 한 권으로 압축해놓은 책이다. 이 일기는 끊임없이 수도 생활에 대해 고민하고 수도회와도 여러 차례 갈등을 일으켰으며 심지어 잠시 동안이지만 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던 이 위대한 영성가의 솔직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세상을 경멸하며 수도 생활을 예찬하던 초기에서부터 흔히 ‘제2의 회심’이라고도 불리는 1958년 3월 19일의 유명한 깨달음을 거쳐 수도원 밖 세상 및 다른 신학적 영적 전통들에 대해서도 열린 태도를 보였던 후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신앙적 사유가 변화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기도 한다.


2. 영국의 성공회 영성 신학자인 케네스 리치는 그의 책『사회적 하나님』에서 머튼이 보여준 불의에 대한 저항의 원천은 바로 그의 ‘고독’과 ‘관상’에 있었다고 말한다. 관상이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과 그에 반하는 세상의 불의와 압제를 명료하게 “보고” “인식하는” 행위이며, 거짓을 꿰뚫는 진리의 말씀으로 그릇된 의식과 그에 근거한 세계에 맞서는 위험한 행위라는 것이다. 케네스 리치에 의하면 이러한 기독교적 관상과 영성의 목표는 개인의 내적 평화가 아닌 하나님 나라이며, 이를 위해서는 깊은 기도와 성령 충만한 삶 그리고 불의한 현실과의 갈등과 투쟁이 필연적이다. 이야말로 은거 수도자였던 머튼이 일평생 걸었고 추구했던 그 ‘고독’과 ‘관상’ 그리고 ‘영성’의 길이다.

P.S. 함께 읽었던『토머스 머튼 - 은둔하는 수도자, 문필가, 활동하는 예언자』는 작은 판형에 90여 페이지 정도의 소책자이지만 머튼의 생애와 사상을 잘 요약해주고 있으며, 특히 책 말미에 머튼의 중요한 저작들이 소개되어 있어 머튼 입문서로서 매우 유용하다.

본문 엿보기

1941년 11월 7일 (그가 강의를 위해 머물고 있던) 성 보나벤투라 대학에는 자연적인 행복과 평온한 삶이 넘친다. 그러나 그 평화는 위험한 환상이다. 경제적으로 말하자면 폭력과 불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전쟁과 전쟁으로 이끄는 모든 불의다. 이것은 순전히 자연적인 만족이다. 설령 그것이 정당한 것이라 해도 우리는 단순히 자연적인 충만감, 우리의 이기적인 고요와 걱정 없는 자유에 흡족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오직 그분 안에서만 진정한 평화가 있다. 그리스도는 굶주리고 채찍질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계시다.

1949년 8월 8일, 26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영원한 생명으로 영혼을 기르는 자양분이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다윗이 산에서 사울을 피해 숨는 이야기와 사울의 사람들이 마치 왕관처럼 다윗이 숨은 장소를 둘러싸는 이야기, 예수님께서 나인의 과부 아들을 살려내신 이야기, 저녁 희생제사때 향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 사제 엘리는 한나가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기도드리는 것을 술에 취했다고 잘못 생각한 이야기 ........ 마케도니아에 처음 간 바오로가 여인들이 모이는 강가에 나가 성령께서 자색옷감 장수 리디아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듣게 한 이야기 등은 모두 같은 영원으로 들어가는 문과 창의 역할을 한다 ....... 이사야 욥 모세 다윗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은 모두 내 삶의 한 부분이다. 그분들은 언제나 내 가까이에 있다. 그분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누구보다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때로는 함께 사는 수사님들을 보는 것보다 더 그들을 ‘보고’ 있다. 그분들의 책을 기쁨과 거룩한 두려움으로 읽을 때 그 말씀은 나의 일부가 된다. 그분들은 진지하고 엄숙하며 거룩한 사람들이다. 그분들은 자신들이 써내려간 계시에 의해 겸손해진 사람들이다. 그분들은 나의 성조(聖祖) 들이다. 점점 그분들이 본 하느님 나라에 빠져들게 된다.

1957년 12월 29일 다른 나라의 경제가 미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하기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는 내 책임도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가? .......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한 역사와 경제 같은 문제를 공부할 의무가 있다. 이 의무는 나의 ‘관상적’ 성소(소명)와 충돌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진리를 따라 사는 사는가 하는 문제이므로 나는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이 수도원에서 우리는 실제적이고 궁극적인 사회적 의무에서 조직적으로 벗어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사회적 책임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근본 원리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1958년 3월 19일 어제 루이빌 4가와 월넛이 만나는 교차로에서 나는 갑자기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그들 누구도 내게 이방인이 아니며 이방인이 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내가 특별한 성소(부르심)을 받아 그들과 분리되어 있고 그들과 다르다는 미망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내 성소가 내가 그들과 다르거나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인류의 한 구성원이며 나를 더 영광스러운 운명으로 이끄는 것은 바로 인간이라는 소명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은 바로 인류의 일원이 되셨다는 것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처럼 나도 인류의 한 일원이라는 사실에 감사드린다.

1958년 10월 18일 로렌스 신부님에게 엄격하게 격리된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수도자와 철의 장막에 가려진 감시대상 시인(『닥터 지바고』의 저자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사이에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놀라운 사실을 이야기했다. 나는 루이빌이나 바드스타운, 심지어 수도원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보다 파스테르나크에게 더 많은 친밀감을 느낀다. 깊은 적대감을 지닌 두 나라 사이에 교류를 위한 어떤 대화도 없으면서 달과 교류하는 데 수백만 달러를 사용하다니! 나한테는 파스테르나크나 그와 같은 몇몇 사람과 나누는 단순하고 인간적인 대화가 많은 강론이나 라디오 연설보다 훨씬 가치 있다. 이것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 진실한 하느님 나라다.

1959년 3월 18일 낡은 것과 새 것. ‘낡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낡았다. 그는 모든 것을 보았고 이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은 그가 애착하는 ‘오래된’ 것들이다. 그는 가진 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지만 그 때문에 행복하지도 않다. 그는 ‘오래된’ 것을 지키려고만 할 뿐 바꾸려 하지 않는다. 어떤 새로움에도 열려 있지 않다. 그의 삶은 정체되어 황량하다. 움직임은 있지만 변화로 이끌지는 못한다. ‘새로운 사람’ 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다. 심지어 낡은 것도 성령 안에서 변화되어 늘 새롭다. 무엇에도 애착이 없다.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해 희망을 걸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냥 무(無)일 뿐이다. 새로운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곳에서 실재를 발견한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그가 보는 그 순간 현실로 나타날 수 있는 실재다. 보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실재다.

1961년 10월 23일 나는 이 나라에서 국제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폭력 사용을 멈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톨릭 사제의 한 사람이 되었다. 드디어 전쟁 폐지를 위한 투쟁 일선에 나선 것이다. 폭탄, 핵실험, 폴라리스 잠수함뿐 아니라 모든 폭력을 반대한다 ...... 어떤 면에서 수도회의 관점은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하다. 이 같은 때 수도회의 어느 누구도 구체적으로 세상이 처한 상황에는 관심이 없다. 인류 역사의 도덕적 위기가 닥쳤는데도 일반 수도자뿐 아니라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베네딕트회 수사들까지도 중세 저자에 대한 학문적 문제와 신학자한테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텍스트에만 매달리고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특히 이런 위기에 대해 어떤 의견을 내거나 공표하는 것을 방해하고 차단하는 것이 (머튼이 속한) 시토 수도회의 결정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1963년 3월 7일 이제 ‘실현된 종말론’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실현된 종말론’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삶이 변화되고 인간관계가 개선되는 것이다. 실현된 종말론은 정통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의 중심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가 평화 증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령의 현존, 회심에 대한 촉구, 인간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도록 하는 촉구, 성사 안에서 십자가의 구원 권능의 현존 등은 우리의 ‘마지막 시대’에 속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교가 평화를 위한 사명을 수행하고 일치, 평화, 사랑의 복음을 선포하며 인간과의 화해, 하느님과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중요성은 부각되지 않는다. 전쟁과 폭력의 시대에서 남은 이들에게 평화를 가르치는 것이 교회생활의 종말론적 특징이다. 바로 교회가 이렇게 행동할 때 하느님의 일하심이 이 세상에서 신비롭게 완성되는 것이다.

1963년 3월 31일 소문난 계몽주의자, 성령.

1965년 어느 날 새들에게 강론한다. "경애하는 친구들이여, 고귀한 혈통의 새들이여, 이것 외에는 그대들에게 들려줄 말이 없노라. 바로 지금 그대로의 그대가 되어라. 새로서 존재하여라. 그리하여 그대는 그대에게 자신의 가르침이 되노라!” 새들의 대답. “이것조차 우리에게는 너무 긴 설교랍니다.”

1965년 8월 13일 내가 인간이라는 기쁨!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신학적 진리이며 신비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셨다. 바로 나 같은 인간이 되심으로 그분은 나와 결합하고 나를 그분의 현현으로 만드신다. 그러기에 나는 그분을 드러내야 한다. 진정한 인간의 존재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 자유로 빛이신 그분께 순명함으로서 내 안에 그분을 드러내게 된다 ...... 내가 만일 사람들의 인간성을 미워한다면 어떻게 인간으로서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무한한 기쁨이고 즐거움이어야 한다. 나의 창조주에 의해 지음 받았음을 기뻐하는 것은 나의 구세주에 의해 회복되도록 마음을 여는 것이다. 인간이 되는 기쁨이 순수한데도 이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이해는 너무 빈약하여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 천사가 되는 것이 더 큰 기쁨인 것으로 잘못 생각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천사가 되지 않고 인간이 되셨다.

1965년 9월 11일 어떤 의미, 곧 매우 진실한 고독이라는 의미에서 은수자의 집 - 은거 수도자가 홀로 거하는 거처 - 에 오는 것은 ‘세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되었다. 도시라는 세상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겸손한 하느님 세상과의 만남이다. 하느님의 창조, 가난한 사람들이 일하는 세상이다 ....... 나의 진정한 공간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고 구원되는 세상이다. 하느님은 수도원의 제한된 독방에만 계시지 않고 진실로 이 세상 안에 계신다. 이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수도원이 순수하고 거룩한 공간의 신화를 포기하는 것이 중요하고 필요하다. 참된 거룩함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이 수도원이 정말 거룩한지 의문이다 ..... 나는 聖과 俗 사이를 바리사이적으로 분리하는 마지막 지취마저 없애는 일을 해야 한다. 세상이 화해해야 할 대상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느님이지 수도원이나 수도회 가톨릭 학교가 아니다.

1966년 6월 22일 (한 여인과의 사랑이 끝난 후) 그러나 정확하게 이 시점에서 모든 것이 끊어졌고 폭력을 맞았고 모조리 파괴되었다. 사랑의 꽃잎이 막 피어나기 시작할 즈음 잘렸는데, 어떻게 다시 자연스럽고 따뜻하고 서서히 오랫동안 깊은 사랑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불평할 권리가 없다. 다른 양식의 삶에 나를 봉헌했기 때문이다 ...... 너무 갑작스럽게 일이 진전되었고(결별) 그 결과는 우리에게 너무나 참담했다 ...... 이제 깨닫는다, 나는 그녀한테서 내가 일생 동안 추구하던 어떤 것, 찾고자 갈구하던 어떤 사람을 찾았다. 그녀도 나에 대해 같은 느낌임을 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사랑은 너무 깊어 변함이 없고, 앞으로도 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한테서 찾은 것은 쉽게 잃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소유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으로 서로 깊이 사랑한다 하더라도 함께할 수 없는 데서 느끼는 지독한 외로움과 박탈감과 목마름을 느끼게 된다. 이제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가야만 한다. 대면하고 싶지 않은 길이다. 우리가 정말 서로 다른 길을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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