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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영성제자도

토머스 머튼의 단상 - 통회하는 한 방관자의 생각 (토머스 머튼 지음, 바오로딸 펴냄)

by 서음인 2016. 6. 1.

『토머스 머튼의 단상』은 20세기를 대표하는 가톨릭 영성작가요 평화주의자로 평생 정의와 평화의 사도로 살았던 토머스 머튼 (Thomas Merton, 1915〜1968)이 사상의 완숙기에 접어든 1960년대에 기록한 단상들을 모은 책이다. 그의 후기 사상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히는 이 책에서 머튼은 세상을 타락한 곳으로 경멸하고 수도원을 초자연적인 순수함을 지키게 해주는 곳으로 찬양하던 초기의 생각을 떠나, 세상이야말로 비록 왜곡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하느님의 신성한 지혜와 기쁨을 품고 있는 곳이며 은수자인 자신도 인류의 일원으로 세상과 결코 유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간 품었던 잘못된 생각을 ‘통회하는 마음’으로 세상 속에 숨겨진 하느님의 지혜와 모든 사람들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자연과 은혜를 날카롭게 구분하고 ‘오직 은혜만’ 을 강조하는 루터 혹은 바르트의 정신과는 구별되는, 이성과 자연의 질서를 긍정하고 그 위에 은혜의 질서를 덧붙이는 가톨릭의 교의(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 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  혹은 자연에 덧붙여진 은혜 Donum Superadditum)를 잘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책에서 머튼이 보여주는 형태의 ‘포괄주의’는 그 생각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충분히 매력적이다.


본문

은수자(隱修者)가 되되 개인주의자가 되지는 않는 것에 대하여  자신의 삶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에만 관심을 두지 마라. (마르크스가 생각했듯이 이는 추잡한 사치이며 환상일 뿐이다.) 한 사람의 고독은 세상과 하느님께 속해 있다. 고독만이 해야 할 특별한 일이 있다. 곧 세상이 필요로 하는 깨달음을 깊게 하고 소외와 싸우는 것이다. 진정한 고독은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이지 세상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다. (1부 바르트의 꿈 中)

전체주의  우리 자신의 나약함으로, 그리고 거대한 힘을 행하는 그들의 편견으로 우리는 전체주의 세력의 포로가 된다. 우리는 지배되고 또 지배되도록 내맡긴다. 우리는 그들이 거대한 힘을 행사하도록 내버려둔다. 그리고 폭군들에게 ‘복종’하는 상태에서 자신을 폭력에 내몰리게 버려둠으로서 우리의 비겁함을 변명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자신이 고귀하고 의무에 충실하며 용감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전혀 진실이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인류에 대한, 그리고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배반이다. 아우슈비츠는 자기들이 국가를 사랑했고 국가의 적들을 증오함으로서 훌륭한 시민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던, 의무감이 강하고 복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고 운영되었다. (1부 바르트의 꿈 中)

비폭력과 원수사랑  근본적 허위는 우리만이 온전히 진실에 전념하고 있다는 거짓말이고, 정직하면서도 동시에 배타적인 방식으로 진실에 전념할 수 있다는 거짓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적이 모든 과오를 독차지하듯이 우리가 모든 진실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거짓말이다. 상대방을 비난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이 상대방의 선을 인식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확신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상대방을 잘못을 상대방에게 보여줄 수 없다. 사랑, 오로지 사랑, 자신의 기만과 죄 안에서 실제로 기만당하고 있는, 같은 처지에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만이 진실을 향한 문을 열 수 있다 ...... 비폭력은 상대를 구원하고 회복시키고자 하는 사랑의 수단이지, 그를 혹평하고 굴욕을 주고 패배시키고자 하는 수단이 아니다. 육체적 공격 대신 정신적 공격으로 적대자를 패배시키고 굴욕을 주고자 하는 진위가 의심스러운 비폭력은 약점을 자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진정한 비폭력은 증오하지 않고 적대감이나 분개함 없이 작용하려고 노력한다. 진정한 비폭력은 적대자 안에 있는 선을 발견할 수 있고 그 선을 편들면서 공격성 없이 일한다. (2부 진실과 폭력: 흥미로운 시대 中)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행위는 무엇보다도 정치 안에서, 일 안에서, 더 나은 임금이나 사회 보장 등을 위한 사회 계획 안에서 신앙을 발견하는 행위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행위는 결코 ‘교회를 위해서 노동자를 얻는 것’ 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으므로, 모든 사람이 어쩌면 그리스도일지도 모르므로, 그리스도는 우리 형제이므로,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형제가 가난하고 타락하여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비참하게 살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는 행위이다. 한 마디로 사회생활에서 그리스도교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행위를 불행, 비참함, 인간 이하의 생활 조건, 경제적 ‧ 정치적 노예 상태. 무지와 소외에서 인간을 해방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 ....... 복음으로 정화된 정치 원리로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되고, 전쟁과 욕망과 힘과 욕심 같은, 인간을 지배하는 어두운 옛 신의 권세에서 해방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품위에 걸맞은 수준으로 인간을 들어 올리고자 하는 시도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치 행위는 일종의 영적 행위, 곧 영적 책임의 표현이고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다. (2부 진실과 폭력: 흥미로운 시대 中)

종교와 자유  종교적 신념은 필연적으로 자유의 원리이기도 하다. 사람이 자기의 신앙을 옹호하는 것은 자신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이며, 적어도 다른 사람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 지배로부터의 자유, 자기 자신의 영적 삶을 살 자유, 어떠한 인간적 압박이나 집단적 요구에도 기죽지 않고 더 높은 진리를 추구할 자유, 자신의 ‘예스’와 ‘노’를 표현하며 국가 ‧ 정당 ‧ 단체 ‧ 군대 ‧ 체제 등의 ‘예스’와 ‘노’에 단순히 동조하지 않을 능력. 이는 진정한 종교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필요라는, 부딪혀야 할 문제의 인식 없이는 누구도 진정으로 인간일 수 없고, 이것을 인식하지 않고는 완전히 인간이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암묵적이든 노골적이든 모든 전체주의 체제가 종교를 불가피하게 공격하는 것은 종교가 가장 심오한 자유의 원리와 원천이기 때문이다. (2부 진실과 폭력: 흥미로운 시대 中)

자연에 덧붙여진 은혜(Donum Superadditum)   나는 부활절 전야 의식에 원시 의식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음을 안다. 그런데 그것이 기쁘다. 불의 신비, 물의 신비, 봄의 신비, 신성한 봄, 불, 물, 봄의 신비가 주님의 부활로 신성해지고 명확해졌으며, 불, 물, 봄 안에서 주님의 부활을 가리키는 상징이 드러난다. 옛 창조는 오직 새 창조를 위해 만들어졌다. 비록 옛 창조의 형태는 죽을 때 생명이 쇠퇴하는 것이지만 (죽음으로부터 나온 생명의) 새 창조는 옛 창조에서 나온다. 우리 안에 솟아오르는 새 생명의 힘을 우리의 본성으로 짓밟지 말고(그래서 그것이 성화되지 않은 바다 속 용 레비아탄으로 변하게 하지 말고), 십자가의 고통으로 새 생명이 감미롭고 성화되게 하라 ..... 나는 그것이 ‘그리스도교’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그리스도교의 요소가 있다. 다시 말해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내 안에서, 그리고 어쩌면 천국에서, 그리고 새 창조 안에서, 곧 도래한 세상 안에서 울릴 그리스도교의 반향이다. 그것은 14세기 라틴 교부들의 신비주의, 12세기 수도생활의 풍조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중국, 유교, 선(禪), 위대한 도가들에게도 개방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이 초자연적이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준 성사적인 방식으로, 다시 말해 신비스러운 그리스도교의 형태를 지닌 문화적 요소를 이용하여 우리 삶 속에서 일하신다. (제3부 밤의 정기와 여명의 기운)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  아리스토텔레스가 13세기 그리스도교 사상에 미친 영향은 ‘세상으로의 회귀’, 곧 자연, 물질적인 것, 우주의 실재적인 현실에 대한 존중이었다. 성 토마스의 신학은 본성 자체를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체계에 몰두시킴으로서 본성을 변질시키는 신학에 대한 반발이다. 성 토마스는 상징들이 나타내는 현실 세계로 되돌아왔다 ....... 곧 현대 세계를, 가난한 자들의 세계를, 도시의 세계를, 정치에 관심이 있는 중산층 시민과 숙련공들의 세계를, 성직자들의 권위보다는 이성의 권위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의 세계를 인식한다. 그러나 또한 성경이 있다. 그리고 비그리스도교 세계로의 회귀, 곧 아리스토텔레스와 이슬람으로의 회귀가 있다 ..... 그것은 수도원이나 제단에서의 성사와 상징을 통해 낙원으로 복귀하는 신학자가 아니라, 진리는 존재하는 어떤 영역에서도 제외되지 않고 상징이라는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도시의 신학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 토마스의 신학은 지적 화해의 신학이며, 문제를 야기하는 반대 이론을 주장함으로서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상반되는 것들을 결합하고 문제의 상투적 해결을 넘어 미래를 생각함으로서 자신의 신학 자체를 정당화하는 신학이다. (제3부 밤의 정기와 여명의 기운)

대화  부정적 견해는 교회가 반대자와 대화함으로써 무엇인가 잃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진리가 대화를 하는 가운데 발전한다고 보는 그리스도교 소크라테스 철학을 거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진리가 대화하는 가운데 발전한다고 보는 것 또한 복음의 정신이다. 우리는 소크라테스 철학을 신약성경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진리를 받아들였다. 대화를 거부했거나 실용적인 유보조건과 빈틈없는 교활함을 가지고 정치적 의도로 대화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결국 그리스도를 못 박고 사도들을 살해했다. 소크라테스 철학의 원리는 토론에 대한 적극성뿐 아니라 자기의 적대자를 대등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형제로서 기꺼이 만날 각오가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제4부 갈림길에서)

전쟁과 선전  전쟁은 모든 사람이 묵과할 수 있고 적의 섬멸이라는 동일한 과제에 몰두할 수 있는 대규모의 양심 정지 상태, 완전한 무책임을 필요로 한다. 전쟁이 극히 위험한 것은 바로 집단적 부도덕에 대한 보편적 필요 때문인데, 전쟁놀이가 이 필요를 완전히 만족시킨다. 양심의 정지 상태가 매우 묘미 있는 악마 자시의 방법으로 악마를 멸하라는 더 높고 더 신비로운 권고에 대한 카리스마적인 응답으로 보일 때 만족은 더욱 더 크다 ......... 발달한 사회에는 선전(propaganda)의 순진한 희생자는 없다. 선전은 성공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선전이 성공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선전은 마음에 영향을 끼친다. 그들은 영향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열망하는 종류이기 때문에 선전의 결론은 분명한 빛과 만족을 가져다준다. 선전은 사람들이 이미 거의 준비가 되어 있는 행위로 그들을 이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오직 이 행동들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만일 전쟁 선전이 성공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전쟁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정당화하는 몇 가지 좋은 이유만을 필요로 한다. (제4부 갈림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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