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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인문/문학

그리스 비극 - 인간과 역사에 바치는 애도의 노래 (임철규 지음, 한길사 펴냄)

by 서음인 2017. 4. 6.

『그리스 비극 - 인간과 역사에 바치는 애도의 노래』는 원로 인문학자인 임철규 연세대 명예교수가 쓴 그리스 비극 전체를 조망하는 깊이 있는 연구서다. 

저자는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두툼한 책에서 그리스의 3대 비극작가로 꼽히는 아이스퀼로스 ·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선정해, 고전학자와 철학자에서 페미니즘 비평가에 이르기까지 이 고전들을 둘러싸고 고금의 다양한 학자들이 벌여 온 여러 논의와 논쟁들을 소개하며(앞으로 소개할 본문들에서만도 헤겔, 하이데거, 르네 지라르, 레비나스, 데리다, 에드워드 사이드, 시몬 보부아르, 뤼스 이리가라이와 같은 이름들을 만날 수 있으며, 심지어 각주에는 라인홀트 니버와 폴 틸리히의 이름도 나온다!), 각 텍스트의 심층을 깊이 탐사해 감추어진 의미의 풍성한 지층을 밝히 드러내 보여준다. 

특별히 저자는 “위대한 문학이란 망각 속에 묻혀 있는 숱한 희생자들을 역사 속으로 불러내어 그들을 다시 ‘기억’해주고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고통과 죽음을 슬퍼하며 ‘장례’를 지내주는 애도의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그리스 비극이야말로 이의 전범(典範)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땅의 끝없는 고통과 수난의 역사”가 없었더라면, 그리스 비극에 나타나는 “전쟁의 비극, 전쟁으로 인한 ‘타자’의 고통, 주체의 폭력, 그리고 ‘귀환’의 비극성”을 깊이 다룰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人文’의 향기로 가득한 이 품위 있고 아름다운 책을 읽어 가노라면, 폭력과 억압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애도를 불온한 행위로 매도하고, 약자와 소수자의 편에 서는 일을 인본주의로 간주하며, 전쟁과 폭력을 반대하고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의심하는 한국 주류 기독교의 놀라운 천박함과 야만스러움은, 어쩌면 단 한번도 ‘그리스인’이 되지 못한 나머지 인간에 대한 존중과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 그리고 희생자에 대한 애도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그리스도인’이 되어버린, 그래서 아무 때나 ‘인본주의’나 ‘자유주의’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담아가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체의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좋은 신앙’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차고 넘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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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아이스퀼로스

비극의 ‘운명’과 ‘자유’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은 운명과 자유가 부딪치는 긴장의 지대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이 긴장의 지대에는 오직 파국을 향한 일방로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이 일방로를 달린다. 그런데도 이 긴장의 지대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극적인 행동들은 자유가 운명의 조건임을 전제로 한다. 파스는 “그리스인들은 운명이 스스로의 성취를 위해 자유의 행위를 요구한다는 것을 최초로 인식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자유’와 ‘운명’은 동시에 서로를 요구하면서 부정한다. ‘자유’와 ‘운명’, 그중 어느 한 축이 무너지면, ‘비극’이나 ‘비극적 주인공’이 설 자리는 사라진다. 운명과 자유가 부딪히는 긴장의 지대, 그 긴장의 지대에서 허망하게 춤추는, 그 자유의지로 인해 경이롭고, 그 운명으로 인해 아픈 춤을 추는 이들, 이들이 바로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이다. (『테바이를 공격하는 7인』中)

오리엔탈리즘    일반적으로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것이 페르시아적 가치에 대한 그리스적 가치의 승리, 더 나아가 동양문명에 대한 서양문명의 승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의 일환에서 볼 때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은 이른바 ‘오리엔탈리즘’의 단초가 된다. 사이드는 그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에서 “오리엔탈리즘은 동양과 서양 사이에 만들어진 존재론적 · 인식론적 차이에 토대를 둔 사유양식”이라고 규정하면서, 『페르시아인들』이 이러한 차이를 보여주는 최초의 문학작품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동양/서양이라는 이항대립에서 동양은 서양이라는 ‘주체’의 창조에 필요한 ‘타자’가 되며, 이러한 타자인 동양은 “진정한 인간존재”인 서양적인 주체의 이면, 즉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물질주의적이고 감정적이고 총동적인, 이른바 불투명한 존재가 된다. 이처럼 서양과 동양의 차이를 통해 서양의 우수성을 확인하는 “서양적인 사유양식” 또는 담론인 ‘오리엔탈리즘’은 분명 동양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제국주의의 인식론적 폭력”이다. (『페르시아인들』中)

변화하는‘정의’의 얼굴    아이스퀼로스는 법정에서 펼쳐지는 분노의 여신들과 아폴론 간의 논쟁을 통해 그들이 주장하는 ‘정의’의 갈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아폴론은 왕, 아버지, 남편 우위의 입장에서 오레스테스를 옹호한다. 아폴론에게 남성중심의 가부장제는 문명사회의 토대이고 질서와 권위의 필요불가결한 원리다. 한편 분노의 여신들은 아들이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죽이는 행위를 결코 용납할 수 없다. 분노의 여신들은 그들 스스로 명명했듯, 여성중심의 모계사회를 대변하는 ‘밤의 무서운 딸들’이기 때문이다 ..... 아이스퀼로스는 『아가멤논』에 등장하는 제우스의 ‘정의’, 즉 ‘이에는 이’라는 논리로 무장한 청동시대 제우스의 ‘정의’논리가 신흥 도시국가로 성장하는 폴리스 시대의 아테나이에 이르러 어떻게 변모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이제 제우스의 ‘정의’는 폭력(피의 복수)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법정이라는 이성적인 기구를 통해 실현된다. 시대의 논리에 따라 변모하는 ‘진보적인 제우스의 얼굴’인 것이다. (『오레스테이아』中)

비극과 가부장제의 기원    아이스퀼로스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아테나이의 민주주의에 여성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죽음이 증명하듯, 정치 지배를 도모하려는 여성의 시도는 어떤 것도 용납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아이스퀼로스의 ‘차이’ 논리인지 모른다. 그리그 그의 ‘차이’ 논리가 곧 ‘차별’의 논리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레스테스, 아폴론, 그리고 궁극적으로 제우스의 승리는 진정한 승리라기보다는 여성 원리에 대한 남성 원리의 승리인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즘 비평가들은『오레스테이아』를, 여성을 혐오 대상으로 인식하는 서양적인 사유의 중심 텍스트로 간주하기 때문에 이런 시각에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보부아르는『오레스테이아』를 가부장제의 기원에 대한 신화적인 표현이라고 규정한다. 그녀에 따르면 “『자비로운 여신들』은 모권사회에 대한 가부장제의 승리를 표현하고 있다. 태고의 모성 권위와 권리는 남성의 무도한 항거에 의해 사망 · 살해당했다.” 그리그 이러한 보부아르의 규정은 이후『오레스테이아』에 관한 대다수 페미니즘 비평가들의 기본적인 전제가 되고 있다. (『오레스테이아』中)

2부 소포클레스

헤겔 vs 이리가라이   헤겔에게 국가가 남성의 고유 영역이라면 친족은 여성의 고유 영역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사적인 윤리 단위인 가족의 권리를 옹호하는 ‘친족의 법’을 ‘보편성의 법’인 ‘국가의 법’과 대조되는 “개별성의 법”이라고 일컫는다. 그는 가족의 가치와 권리를 직관적 본능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여성을 ‘자연’ 또는 자연적인 것과 결부시키며, 반대로 남성을 ‘문화’와 결부시킨다. 그런 점에서 안티고네와 크레온 간의 갈등은 여성 원리와 남성 원리, 즉 ‘자연’과 ‘문화’간의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문화’의 최고 형식은 다름 아닌 폴리스라 할 수 있는데, 안티고네의 도전은 바로 남성 원리의 표상인 ‘폴리스’에 대한 도전이라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헤겔은 보편성의 영역인 국가에 좀 더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그가 안티고네보다 크레온의 편에 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 그러나 이리가라이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과는 별개의 존재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녀를 안티고네를 통해 남성과 별개의 존재인 여성을 인정하는 ‘성차의 윤리’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려고 한다. 안티고네는 더 이상 범법자나 국가의 명령에 불복하고 이에 도전하는 “아나키스트”가 아니라 남성과 대조되는 주체로서의 여성이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리가라이는 안티고네를 “또 하나의 계보를 표상하는 인물로서 오이디푸스를 대체하는 여성적인 욕망의 상징”으로 설정하고 있다 ....... ‘남성적인 주체’를 위해 모든 경험과 현실을 일련의 고정된 카테고리에 환원시켜, “성차를 뿌리째 뽑는” 가부장제의 남성과 달리 여성은 무한히 열려 있는, 모든 것을 흐르게 하고 모든 것을 채우는 ‘빈’ 공간, ‘유동성’의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빈 공간, ‘간격’을 채우는 것이 사랑이다. 안티고네는 이 빈 공간, 간격에 ‘사랑’이라는 욕망을 채우고 이를 위해 희생하는 폴리네이케스의 ‘어머니’가 되고 있다. 안티고네는 “나의 본성은 증오에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가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랑에 가담하는 것, 이것이 여성적인 욕망이며, ‘성차’의 근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안티고네』 中)

비극에서의 운명과 자유의지    탁월한 소포클레스 연구자들 중 한 사람인 녹스는 “오이디푸스의 행동은 자유로운 행위 주체의 행동일 뿐 아니라 극중 사건의 원인이기도 하다 ...... 파국은 비극적 주인공의 자유로운 결단과 행동의 결과임이 틀림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의 파국을 가져온 ‘저주’는 아폴론의 신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근원(sperma)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침내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에 모든 것을 집중하는,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리면 자신의 “존재의 드러남에 대한 강렬한 열망”에 불타는 그의 성격 속에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그의 의지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거나 그의 자유의지가 가장 극적으로 표출된 행위는 바로 스스로를 눈멀게 한 행위다. 그는 “나에게 이 잔인한 고통을 가져온 이는 아폴론이었지만 ...... 나의 눈을 찌른 것은 그 누구의 손도 아닌 나 자신의 손이었다”고 울부짖는다. 전형적인 비극적 주인공의 위대함은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홀로(monos - 이 작품에서 이 단어가 자주 반복된다)맞선 채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하고, 그것에 따르는 책임과 결과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자세에 있다. 지라르는 오이디푸스를 집단의 질서와 이익을 위해 희생된, 즉 일종의 희생제의의 속죄양(pharmakos)이 되고 만 비극 주인공으로 설정했지만, 진정한 비극적 주인공은 그러한 희생마저 주저함 없이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감수하는 인물이다 (『오이디푸스 왕』 中)

오이디푸스의 ‘눈’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찔러 ‘제2의 테이레시아스’가 되지만,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의 눈이 신에 의해 주어진 타인의 눈이라면, 오이디푸스의 지혜의 눈은 자기 자신에 의해 얻어진 나의 눈이다. 이 지점에서『오이디푸스 왕』이 운명의 비극이라는 틀은 무너진다. 오이디푸스의 지혜의 눈은 아폴론의 의지가 전혀 개입할 수 없었던 오이디푸스 ‘그 자신’의 눈이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의 실명을 통해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기원전 5세기 소피스트들의 인간중심적인 과학적인 인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찔러 실명케 하는 오이디푸스의 모습, 즉 자신의 눈을 스스로 부정하는 주인공의 상징적인 모습을 통해 눈 또는 그것의 측정(metron)에 기반한 과학적 이성적인 사유를 통한 앎이 얼마나 국소적이고 허망한가를 지적하는 동시에, 그러한 앎을 초래하는 눈을 철저히 부정하고 스스로 지혜의 눈, 각성의 눈을 얻는 오이디푸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앎이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얼마나 위대한가를 역설한다. 『오이디푸스 왕』은 신의 가치와 인간의 가치, 그 어느 하나도 거부할 수 없는 소포클레스 또는 그 시대의 고민과 갈등, 베르낭의 용어를 빌면 “고통스러운 충돌”의 산물인 것이다. “신화는 모순에서 출발하여 그 모순과의 화해를 향해 나아가지만, 비극은 오히려 모순을 확고히 하고 화해를 거부한다” 는 바르트의 지적처럼『오이디푸스 왕』은 끝내 화해를 거부한다. 그러한 순간, 즉 존재의 비극성이 낱낱이 드러날 때도 그러한 현실과 화해할 수 없는, 오히려 그러한 현실을 통해 자기 자신을 더 처절하게 확인하려는 것이 인간 존재다. 아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화해’를 거부하는 ‘찢어진 틈’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오이디푸스가 바로 이러한 “비극적 인간의 패러다임”이 아닌가? (『오이디푸스 왕』中)

3부 에우리피데스

용서 · 애도 · 눈물    우리는 아들의 죽음을 초래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 아들은 아버지를 진심으로 용서하며 자신의 운명보다 아버지의 불운을 더 슬퍼하는, “문학 전통에서 가장 위대한 장면”을 조금 전에 살펴보았다. 죽어가는 아들을 끌어안고 울부짖는 아버지와 자신의 운명보다 아버지의 불운을 더 슬퍼하며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통해, 아니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간에 화해와 용서를 기반으로 펼쳐 보이는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을 통해 우리는 인간 세계가 신의 세계보다 도덕적으로 훨씬 우위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히폴뤼토스의 죽음 앞에서 아르테미스 여신은 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아프로디테 여신이 가장 사랑하는 자를 표적으로 삼아 그자를 죽일 것이라고 약속했다. 신의 세계에는 분노와 복수, 보복의 악순환만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에는 끝나지 않는 복수와 용서되지 않는 죄는 없다. 서로의 불운을 동정하고 애도하는 ‘눈물’이 인간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게 때문이다 ......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속하는 것이며, 용서하는 것은 신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라는 이 거대한 우주 원리가 이 작품의 마지막을 관통하고 있다. (『히폴뤼토스』 中)

‘문명’과 ‘야만’    “아무 죄 없는” 아들 아스튀아낙스를 죽이려는 탈튀비오스 일행을 향해 안도로마케가 “야만족에게 어울리는 잔인한 짓을 궁리해놓은 그대 그리스인들이여!”라 했듯,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군대의 폭력과 살육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다. 이방 민족을 언제나 야만인 ‘타자’로 인식해 왔던 그리스인 자신이 가장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는 이 작품을 통해 그리스인들의 ‘문화적 우월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전쟁을 일으켜 이를 정당화하는 당시 아테나이의 지배 이데올로기, 말하자면 그 당시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의문시하고, 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도전”하는 듯 보인다 ..... 에우리피데스는 제국주의가 내세운 ‘문화적인 우월성’의 이데올로기를 전복시켜 ‘문명인’들의 야만을 폭로하고, 고통 속에 눈물 흘리는 ‘야만인’들의 상처를 애도하고 있으며, 그들의 아픔을 또한 아프게 기억해내고 있다. 그가 트로이의 여인들을 “하나의 거룩한 얼굴”을 한 나의 ‘이웃’, “바로 나의 맥박”, 나의 무한한 책임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그 여인들과 ‘하나’가 되어 함께 전쟁의 비극을 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에우리피데스는 ...... 레비나스적 의미의 ‘타자’의 시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트로이아의 여인들』 中)

애도와 기억, 그리고 희망     트로이아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아스튀아낙스의 죽음을 앞두고 그리스로 끌려가기 직전 안드로마케는 “모든 이들의 마지막 동반자인 희망조차” 자신에게는 “없다”고 탄식한다.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마지막 동반자인 ‘희망’은 이제 우리에게서 주어져야 한다. 그들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끊임없는 기억이야말로 그 ‘희망’이다. 데리다는 『우정의 정치』에서 “우정(philia)은 살아남음의 가능성에서 시작하며, 살아남음은 애도의 또다른 이름 ......”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누구든 애도 없이는 살아남지 못하며” 따라서 애도의 주체는 죽은 자들을 기억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트로이아의 여인들은 그것을 ‘애도’하고, ‘기억’하는 우리 안에서 ‘살아 남는다’. 트로이아는 사라졌지만 트로이아 여인들의 그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또 다른 ‘트로이아들’, 그리고 또 다른 ‘트로이아의 여인들’의 절망과 눈물이 계속되고 있는 한, 그들의 고통이 곧 우리의 고통이 되고 있는 한, 그리고 우리의 애도 대상이 되고 있는 한, ‘역사의 상처’는 망각되지 않는다. 우리의 기억을 통해 언제나 ‘문제화’ 될 뿐이다. (『트로이아의 여인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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