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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인문/문학

일리아스 (호메로스 지음, 김원익 평역, 서해문집 펴냄), 오디세이아 (호메로스 지음, 김원익 평역, 서해문집 펴냄)

by 서음인 2016. 11. 9.

『일리아스』『오디세이아』는 기원전 8세기경 소아시아의 이오니아에 살았던 시인인 호메로스가 그때까지 전승되어 오던 그리스의 전설이나 민담을 집대성하여 기록한 서사시로 서양문학의 출발점이자 원형으로 일컬어지는 고전이다. 이 두 서사시의 중심 사건은 트로이 전쟁으로,『일리아스』는 전쟁 발발 후 트로이가 함락될 때까지 10년간의 이야기이며 (정확히는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불화에서 아킬레우스의 죽음까지),『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중 한 명인 오디세우스가 수많은 난관을 헤친 끝에 고향으로 귀향하기까지 10년간의 여정을 그린다. 문학적 소양이 특히 부족한 내가 이 위대한 고전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몇몇 관련서적의 도움을 받아 간략한 단상이나마 남겨 보기로 한다.

 

1.『일리아스』는 BC 12~13세기경 일어났을 것으로 추측되는 트로이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이 배경이며 트로이 앞의 좁은 싸움터와 그 공간에서 싸우는 영웅들에 국한된 이야기지만, 『오디세이아』는 왕에서부터 하인까지를 포괄하는 모든 사회계층 뿐 아니라 괴물 요정 거인까지 등장하는 환상적인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또한『일리아스』가 “무소불위의 추진력을 발휘하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그 죽음을 위해 돌진하는” 고대적이고 비극적인 영웅 아킬레우스의 존엄과 용기 그리고 두려움 없는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면,『오디세이아』는 “귀향의 모험 중 겪는 위험을 육체적 힘이 아니라 특유의 노련함과 기지, 성찰을 통해 극복하는” 현대적 영웅 오디세우스의 자기 정체성 회복을 위한 기나긴 투쟁의 이야기이다.

 

2. 이렇듯 이 두 작품은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의 이야기이자, 트로이 전쟁과 오디세우스의 귀향에 끊임없이 개입해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는 그리스의 신들과 여신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호메로스는 두 작품에서 선대했던 손님에게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와 그녀를 여신이 준 당연한 선물로 생각하는 파리스, 원정군 대장의 지위를 이용하여 부하에게 전리품으로 주어진 여성을 빼앗은 아가멤논과 그로 인해 격노해 전투 참가를 거부하는 영웅 아킬레우스, 파리스에 의해 선택된 아프로디테 여신과 그로 인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헤라와 아테나 여신, 그리고 외눈박이 아들 폴리페모스의 눈을 멀게 한 오디세우스에 대한 깊은 분노로 끈질기게 귀향을 방해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 등 실타래처럼 얼키고설킨 여러 인간과 신들의 갈등과 욕망을 잘 그려내고 있다.

 

3. 이 과정에서 인간들은 - 심지어 영웅일지라도 - 신들의 의지나 정해진 운명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꼭두각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작품 속의 영웅들은 죽어서 없어질 허무한 존재라는 스스로의 운명을 잘 알면서도,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표를 위해 (수치를 피하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 혹은 정체성에 도달하기 위해) 용감하고 당당하게 돌진한다. 아킬레우스는 죽음의 신탁을 알면서도 평안한 삶의 길을 뿌리치고 자신의 명예와 친구의 복수를 위해 끝까지 용감히 싸우며, 오디세우스는 불사의 유혹을 뿌리치고 “인간 오디세우스로 죽기 위해” 고향을 향한 험한 모험의 길로 나선다. 그들은 죽을 운명에 처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매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단과 책임 있는 행동을 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시간을 용감하게 살아가며, 따라서 그들에게 죽음이란 "인간 존재의 의미나 존엄성에 대한 부정이 아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조건"이 된다. 힘과 아름다움을 가진 영생의 존재이지만 변덕스럽고 천박해 보이는 그리스도의 신들과 달리, "신을 우러르되 신이고자 하지 않고, 인간적인 조건 하에서 신을 재향하며 영원을 지향하는" 이 영웅들의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단어는 바로 "숭고" 가 아닐까? 

 

4. 역사적으로 보자면『오디세이아』는 해양민족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그리스인들이 예측할 수 없는 자연과의 싸움에서 겪어야 했던 위험과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일리아스』의 배경인 트로이 전쟁은 사실 강력한 식민주의를 추구했던 당대의 그리스인들이 의도적으로 벌인 침략전쟁이었으며, 전쟁의 원인으로 기술된 파리스의 헬레네 납치는 여성에게 전쟁의 책임을 돌리기 위한 언급이자 침략을 위한 명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의 예에서 보듯 여성의 목소리가 상당히 존중받던 사회인 트로이가 여성을 철저하게 소외시키고 재산이나 전리품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는 그리스에 멸망당했다는 것은, 여성의 권리가 비교적 인정받던 모권제 사회가 제우스를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가부장제 사회에 흡수되었음을 의미한다.

 

5. 오늘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애타게 찾아 부르짖는 신은 과연 어떤 분일까? 혹시 우리는 돈 혹은 정성만 바치면 언제 어디서나 뜬금없이 나타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고 부와 명예와 여자(혹은 남자)를 전리품(?)으로 하사하는 “기계 장치의 신 (deus ex machina)” 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삼고 싶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일리아스』와『오디세이아』에 나오는 그 허접한 그리스의 신들보다 더 낫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변덕스럽고 잔인하며 인간을 노리개처럼 대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패자인 트로이 인들에게 결코 “사려깊지도 정의롭지도 않았던” 그리스인들의 잔학한 살육을 간과하지 않고 엄중히 죄과를 묻기도 하고, 인간사에 개입할 때에도 결코 우주의 ‘질서’와 ‘원칙’을 거스르지 않을 줄도 알던 그 신들보다?

 

6. 마지막으로, ‘죽음’과 ‘운명’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용감히 싸우는 그리스의 영웅들을 보면서 문득 “성인이 된 세계” 에서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용감하게 살아가라던 순교자 본회퍼의 외침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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