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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인문/문학

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세계사 刊)

by 서음인 2016. 6. 1.

비전케어 미주팀 김진아 집사님의 소개를 받고 지난 주 월요일부터 펴들기 시작했던 이 소설은, 하루 이틀내로 읽을 수 있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완독에 1주일 가까이 걸렸다. 처음에는 아이를 잃는 부모의 이야기라는 것 때문에 심리적 저항감에 책장을 열기가 쉽지 않았고, 중반 이후로는 내용에 대한 당혹감이, 거기에 한번에 몇 권씩 책을 읽는 못된(?) 습관까지 곁들여져 생각보다 많이 힘들고 오랜 여정이 되었다.

 

소설의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납치 살해범에게 사랑하는 딸을 잃은 주인공이 딸이 살해된 바로 그 오두막으로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 삼위 하나님을 만나고 그들과의 동거와 대화를 통해 치유를 경험한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의 모티프는 사실 우리에게 낮설지 않다. 오두막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랑,  치유를 거부하는 나의 자아, 성경의 용어로는 옛사람을 상징한다. 그의 오두막으로의 여행과 그곳에서의 경험, 그리고 돌아오는 중에 그가 겪는 사고는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욥이 그의 고난 가운데 체험해야만 했던,  그리고 14세기 스페인의 위대한 영성가 십자가의 성 요한 이 영혼의 어둔 밤, 혹은 밤의 항해라고 명명한 바로 그 경험,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옛 자아가 죽고 새사람이 탄생하는 위대한 변용(metamorphosis) 혹은 회심의 경험이다. 그 자신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을 체험했던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 경험을 "이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삼위 하나님과의 만남과 화해의 경험은 자녀의 피살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겪은 주인공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 우리의 오두막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과연 우리는  내 오두막, 가장 내놓기 싫은 나의 상처와 아픔과 교만이 아집이 자리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났는가? 그 만남을 위해 두려움과 자아의 죽음을 무릅쓰고 어둔 밤으로의 항해를 떠날 용기를 가졌는가? 이 책은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다.

 

어둔 밤으로의 항해를 떠난 주인공은 오두막에서 삼위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만남은 우리를 끊임없이 당혹하게 만든다. 뚱뚱한 흑인 여자로 표현된 성부 하나님, 아시아계 여인인 성령님이라니!! 게다가 그 삼위 하나님(?)은 끊임없이 대화하고 깔깔거리고, 심지어는 음식을 만들어서 주인공에게 먹이기까지 한다. 이 하나님이 과연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모세에게 나타난 그 하나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수염 난 할아버지로 묘사된 그 능력의 하나님이 맞단 말인가?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묘사들에 대해 우리는 혹시 2000년전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참람하다" 고 외쳐야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우리가 저자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할 질문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우리가 뚱뚱한 흑인 여성으로 묘사된 이 책의 하나님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혹시 우리 가운데 알게 모르게 베어 있는, 하나님은 백인 남성이어야 한다는 선입견에 영향받은 것은 아닌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선언하시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친근하게 불렀던 예수님 대해,  하나님을 경외한 나머지 그 이름조차도 입에 올리지 않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느꼈던 불쾌함과 당혹감이 바로 오늘 이 소설의  '인간적 '인  하나님들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니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폭풍이나 불 가운데가 아닌 세미한 음성 가운데 나타나셨으며,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문 밖에 서서 기다리시며, 우리와 함께 먹기를 원하시는 분(계3:16) 이시라는 것에 생각이 미친다.

 

이와 같은 귀한 통찰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에 대해 몇 가지의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과연 하나님과의 화해와 우리 내면의 치유는 어떤 관계인가? 이 책을 읽으면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해란 개인의 심리적 상처가 치료될 때에만  일어난다고 암시하는 듯 보인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과연 하나님과의 참된 화해를  위해서는  개인의 상처에 대한 내적치유의 과정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인가?  혹시 이러한 개념은 예수님의 복음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존 멕아더 목사님이나 옥성호 형제가 지적하는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의 모습은 아닐까? 

 

2)  만약 하나님이 사랑과 관계의 하나님이시기만 하다면 불의한 세상 가운데서 그분의 정의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개인의 상처와 아픔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구상에 만연한 사회적 구조적 부정의와 폭력, 전쟁과 가난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압제에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압제하는 애굽의 통치자들을 정의로 심판하시는 분이시기도 하지 않았는가?  라인홀트 니버의 말대로 죄악이 관영한 이 땅 가운데 우리의 사랑은 결국 정의의 실현 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3) 하나님과의 만남의 자리는 과연 주인공의 경우처럼 오두막에 한정된 것일까? 혹시 우리가 이웃을 향하여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는 자리야말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는 아닐까? 전통적인 만남의 자리인 우리의 마음(오두막 shack) 이나 정통 교리와 신학 (orthodoxy) 의 자리 뿐 아니라 올바른 실천 (orthopraxis )의 자리에서도  참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물 한그릇을 대접하는 바로 그 자리가 예수님을 만나며 우리의 상처가 치유되는 자리는 아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거스틴의 말대로 우리의 마음은 결코 안식에 도달할 수 없다.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이신 그분을 만나는 것 만이 우리에게 참된 안식과 화해와 치유에 도달하게 해 준다. 이 책은 그 점을 우리에게 감동적이고 생생하게, 때로는 우리의 기존 관념에 도전하면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겠는가. 단 자식가진 부모라면 맘아플 각오는 하시고 읽으시길. 나도 책을 읽는 내내 맘이 아팠다.

 



<오두막>의 삼위일체? 



안드레이 류블로프 <삼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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