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 인문/문학

그리스 비극 - 아이스킬로스 편, 소포클레스 편, 에우리피데스 편 (이근삼 외 옮김, 현암사 펴냄), 그리스 비극의 이해 (천병희 지음, 문예출판사 펴냄)

by 서음인 2017. 3. 30.

“인간이 신이 되지 않는 한 인간에게 고통과 절망은 그치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임철규, 『그리스 비극 - 인간과 역사에 바치는 애도의 노래』中)


그리스 정신의 정수이자 인류문명사의 찬란한 금자탑 중 하나로 손꼽히는 그리스 비극은, 아리스토텔레스『시학』에 따르면 의하면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합창 서정시인 디튀람보스(dithyrambos) 혹은 사튀로스 극으로부터 생겨났으며, 매년 3월에 아테네에서 열렸던 디오니소스 축제 때 예심을 통해 선정된 세 명의 작가가 세 편의 비극과 한 편의 사튀로스 극을 각각 하루에 한 편씩 무대에 올리는 형태로 총 나흘에 걸쳐 공연되었다. 

호메로스의 영웅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신화의 세계와 가치가 해체되던 전환기인 기원전 5 세기 아테네의 시민이었던 이들 비극작가들은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특히『일리아스』)를 소재로 삼아 “운명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신이라는 절대추상체에 의해 인간이 어떻게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며 영웅적 인간이 어떻게 이러한 자신의 운명에 당당하게 맞서는가”라는 주제를 깊이 파고들었으며, 이 과정에서 神 혹은 운명보다는 인간 자신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시대정신의 변화에 발맞춰 기존의 이야기들을 창조적으로 변용하고 재해석했다. 이러한 그리스 비극은 기원전 5세기의 융성기인 펜테콘타에티아(pentekontaetia) 시대의 아테네를 특징짓는 ‘민주주의 폴리스’ 체제를 지지하고 선전하는 정치적이고 교육적인 장치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본성 혹은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오만(hubris)에 대한 처절한 복수(nemesis)로 신들이 내린 가혹한 운명(파멸 ate)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오히려 그 운명과 책임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후 두려움 없이 위험을 향해 돌진하며, 한순간에 영웅에서 인간 존재의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비참한 상황에서도 타협이나 자기포기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끝끝내 자신의 원칙과 정체성을 지킴으로서 인간이 신의 노리개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거부한다. 따라서 그리스 비극은 궁극적으로 압도적 운명과 용감히 대면하는 영웅적 인간을 주인공으로 하는 ‘인간의 이야기’이며, 이러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전형적 인물들은 오이디푸스아이아스, 안티고네, 엘렉트라 같은 소포클레스 비극의 주인공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 비극은 신과 같은 최고의 인간에서 한순간 최하의 인간으로 전락한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인생의 허망함과 인간존재의 불안정성, 삶의 표면적 아름다움 아래 도사린 잠재적 공포 등 인간실존의 근본적 불확실성”을 드러내며, “전쟁과 폭력으로 인해 삶이 산산이 부서진 채 죽어간 희생자들과 삶이라는 허무의 바다에서 허망한 몸부림을 치다 한갓 포말처럼 사라져 간 숱한 존재들”을 망각의 바다에서 끌어올려 그들을 기억하고 그 상처를 어루만짊으로서 그들의 고통과 죽음을 애도한다.

아이스킬로스  세 명의 위대한 비극작가 중 가장 연장자로 살리마스 해전과 아테네 전투에 참전해 기적적인 승리를 맛봄으로서 오만(hubris)를 응징하는 신들의 섭리를 직접 체험했던 ‘비극의 창조자’ 아이스킬로스(B.C 525∼455)는 평생 동안 그의 작품을 통해 신의 위대함을 찬미하고 그 섭리를 명상한 종교적 작가이자, 아테네의 폴리스 민주주의 체제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국가주의자였으며, 비 헬라인과 여성을 타자로 여기는 당대의 제국주의적 가부장적 질서를 옹호하는 보수주의자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사고는 “인간이 일단 교만(hubris)으로 인해 죄를 지으면 제우스 神이 당대가 아니면 후대에라도 반드시 고통스러운 벌로 응징하고(신의 질시, phthonos theon),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은 좋든 싫든 지혜에 도달하게 되며(고난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 pathei mathos), 이것이 바로 제우스의 은총이다”라고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신은 오만으로 인해 인간 내부의 파괴적인 힘이 발동하여 죄의 유혹에 빠질 때 그에게 광기를 보내 죄를 충동하는 ‘협조자로서의 신’(daimon sylleptor)으로 행동하며(“신이 악을 보낼 때 이를 피할 길은 없다”,『테바이를 공격하는 7인』中), 비극의 주인공은 자신의 행동이 파멸을 부르는 끔찍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자원하여 그 행위를 자신의 의지 속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비극에서 주인공의 파멸은 가문의 저주 혹은 신의 뜻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외적인 운명과 인간의 자발적인 의지라는 내적 힘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이중적 동기부여). 아이스킬로스에게 제우스는 자신의 한계를 망각하고 신이 부여한 질서에 도전하는 인간을 철저히 응징함으로서 자신의 정의(dike)를 세우는 정의와 질서의 수호자이며, 다른 두 명의 비극작가와는 달리 그의 작품에서는 신이 드라마의 주역이고 인간은 신의 의지가 실현되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 시인 스윈번은 『아가멤논』『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그리고 『자비로운 여신들』로 구성된 그의 오레스테아 삼부작에 대해 “인간 정신 최대의 성취”라고 극찬했으며, 괴테『아가멤논』에 “예술품 중의 예술품”이라는 최상의 찬사를 바쳤다.

소포클레스 아테네를 사랑하는 사람(philathenaiotatos)으로 아테니의 흥망성쇠를 친히 겪였던 ‘그리스 비극의 완성자’ 소포클레스 (BC 496∼406)는 신들의 힘과 위대함을 인식하고 공경했지만, 제우스를 정의의 수호자로 승격시켰던 아이스킬로스와 달리 모든 신적 활동의 궁극적 의미를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의 수수께끼로 여긴 불가지론자였다. 소포클레의 주인공들은 신들에 의해 강제된,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가혹한 운명 앞에서도(“인간의 숱한 고통들 가운데 제우스가 관여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트라키아의 여인들』中) 동요하거나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 앞에 놓인 비극적 운명과 정면으로 대결하며, 그 결과 마침내 파국에 이를지라도 결단코 자신의 원칙이나 정체성을 포기하지도, 패배를 인정하지도 않는다. 

바로 이러한 “절대의지, 비타협성, 운명愛”야말로 소포클레스적 영웅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며, 따라서 그의 작품의 주인공은 아이스킬로스에서처럼 ‘우주의 질서와 정의를 세우는 위대한 신’이 아닌 ‘비극적 운명에 맞서는 영웅적 인간’이다. 또한 그는 운명에 의해 희생되는 인간의 비극이나 귀환을 향한 원초적 열망이 좌절됨으로서 겪게 되는 인간의 고통과 절망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죽음을 인간의 궁극적인 안식처요 궁극의 고향으로 인식하는 등 인간의 조건과 운명을 가장 절망적으로 조망한 비극작가였으며,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가끔 추락한 적대자에게서 자신의 운명이나 인간 전체의 운명을 보면서 그들을 깊이 동정하기도 한다. 그의 대표작인『오이디푸스 왕』『안티고네』『엘렉트라』와 같은 작품들은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그리스 비극의 최고봉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헤겔『정신현상학』에서 소포클레스『안티고네』를 “예술작품 가운데 가장 찬란하고 만족스러운 작품”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에우리피데스 아테네의 제국주의 정책으로 폴리스의 질서가 위기를 맞았고 프로타고라스를 비롯한 소피스트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에 주로 작품을 썼던 ‘가장 현대적인 작가’ 에우리피데스(BC 480∼406)는 무뚝뚝하고 비사교적인 성격과 모든 전통적 가치를 의심하고 비판하는 회의주의적 태도 때문에 당대 보수파들의 분노를 사 생전에는 다른 두 작가에 비해 인색한 평가를 받았지만 사후에 많은 인기를 얻어 명구나 격언집에 어떤 극작가보다 많은 구절이 수록되었다고 한다. 그는 ‘신의 존재와 정의(dike)’에 대해 깊은 회의를 드러냈으며, 그의 작품에서는 신의 명령이나 운명보다 고난과 절망과 분노라는 인간의 내면적 모티프들이 사건 진행의 주요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인간을 움직이는 두 힘들은 격정과 숙고이며 격정이 숙고보다 우세해지면 인간에게 재앙의 원인이 된다”,『메디아』中).

 그의 작품에서 신들의 세계는 드라마의 먼 배경을 이룰 뿐 실제로 그가 묘사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들 사이의 갈등과 내면 세계의 변화”이며, 그의 주인공들은 더 이상 압도적 운명의 힘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영웅이 아니라 “운명의 유희에 맡겨진 채 내적 분열에 시달리며 수시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는 비영웅적 인간들”일 뿐이다. 또한 그는 여성 · 외국인 · 전쟁포로와 같은 타자나 약자 혹은 운명의 피해자를 깊이 동정했고, 그들을 타자로 규정하고 폄하하는 ‘차별’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아테네의 무자비한 제국주의 정책에 대해 우려를 표시한 진보적인 작가이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비극의 인물을 신과 영웅의 수준에서 일상적인 평범함의 세계로” 끌어내린 것이었으며, 그 사실성과 진보성으로 인해 오늘날 가장 현대적인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지금쯤 이런 훈수를 두고 싶어할지도 모르겠다. 심술궂은 그리스의 신들이 서 있던 곳에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 좌정하셨고, 위대한 비극의 영웅들이 실패했던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뚝 섰으며, 죽음과 절망의 기운만이 가득하던 인류에게 부활과 생명의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노라고. 맞다. 나 역시 그렇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본회퍼의 목소리를 빌어 이렇게 질문해보고 싶다. 우리는 그리스 비극을 통과했는가? 혹시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은 인간 없는 하나님, 절망 없는 희망, 죽음 없는 생명, 십자가 없는 부활, 행함 없는 믿음만을 가르치는 공허하고 천박한 싸구려로 전락해버리지 않았는가? 오랫 동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오고 있는 우리는 요람을 박차고 ‘成人’이 된 후,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책임적 존재로 세상 한가운데 서 있는가?

그리스 비극을 다 읽고 난 후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우리가 그리스인이 되지 않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우리는 다시 그리스인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절망하지 않고 은혜의 길로 접어들 수 없으며, 은혜의 길로 접어들었다면 책임적 존재(成人)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