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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인문/문학

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현대문학 펴냄)

by 서음인 2016. 5. 29.

* 모로코의 팅히르에서 열렸던 이번 156차 비전케어 캠프의 여정 중에 두 권의 책을 읽었다. 한 권은 미주 비전케어 김진아 집사님께 소개받은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미국 소설가 할레드 호세이니의 베스트셀러 <연을 쫒는 아이> 이고, 다른 한 권은 영국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쓴 C.S. 루이스의 두툼한 전기인 <C. S. Lewis> 다. 오가는 비행시간에 해당하는 36시간이 독서를 위한 황금 같은 선물로 주어진 셈이지만, 아무래도 비행 중에 하는 책읽기는 지속적으로 집중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기에 좀 읽기에 편안할 만한 책들을 골랐고,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성공한 전략이었다고 자평한다.

 1. 아프가니스탄의 지배계급인 파쉬툰족에 속하는 주인공 아미르는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고 그의 아버지인 바바와 충실한 하자라족 하인인 알리, 그리고 그의 아들인 하산과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아미르와 하산은 어렸을 때부터 같은 유모의 젖을 먹고 함께 자라며 친형제나 다름없이 친밀하게 지낸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소설가가 되고 싶어하는 아미르는 아들이 강인한 파쉬툰족 남성으로 자라주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며, 아버지가 비록 자신의 단짝이긴 하지만 하인의 아들에 불과한 하산을 유난히 아끼는 것에 대해 질투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 그러던 중 아미르는 아프가니스탄의 전통이자 큰 축제 중의 하나인 연싸움 대회에서 우승하여 모처럼 아버지를 기쁘게 하지만, 자신을 위해 떨어지는 연을 찾아나섰던 하산이 과거에 악연이 있던 아세프 일당에게 붙들려 강간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하산을 위해 나서지 못했다는 비겁함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주인공 아미르는 하산을 도둑으로 몰아 집에서 몰아내고 만다.

 그 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 아버지와 함께 탈출하여 미국에 자리잡은 아미르는 대학을 졸업한 후 그의 꿈대로 소설가가 되고 전 아프간 장군의 딸 소라야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이렇듯 미국에 정착하여 행복한 일상을 이어가던 아미르는 어느 날 아버지의 옛 친구인 라힘 칸으로부터 파키스탄으로 와달라는 연락을 받는다.  파키스탄에 도착한 아미르는 라힘 칸으로부터 하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그의 옛 집을 지키다가 탈레반에게 살해당했으며, 하산의 아들인 소랍이 아프가니스탄의 고아원에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하산이 사실은 자신의 이복동생이며, 라힘 칸이 그들 사이에 있었던 옛 일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한다. 소랍을 구해달라는 라힘 칸의 부탁에 고민하던 아미르는 결국 아프가니스탄으로 잠입해서, 탈레반의 장교가 된 아세프의 성적 유린의 대상이 되어 있던 소랍을 생명을 건 격투 끝에 구출하여 함께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고,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데려 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입은 상처로 마음의 문을 닫은 채 외부와의 소통을 거부하던 소랍은 어느 날 우연히 참가한 연싸움 대회를 계기로 아미르와 다시 소통을 시작한다.

 2. 이 소설은 미국에서 왜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두었을까? 카불에서 태어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시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망명한 후 미국에서 의사가 된 (그리고 결국은 소설가로도 큰 성공을 거둔), 어찌 보면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저자의 드라마틱한 인생 여정 자체가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소설의 배경이 많은 미국인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점, 아프가니스탄과 미국에서 겪어야 했던 저자의 생생하고 드라마틱한 삶의 경험이 소설에 잘 녹아들어 있다는 점, 저자가 과거와 현재 미국의 가장 큰 적이라 할 수 있는 소련과 탈레반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도 이 책의 흥행에 한 몫씩을 담당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탁월한 이야기꾼인 저자가 창조해 낸 “이야기의 힘” 자체에 있다. 인종간의 갈등과 외세의 침략으로 얼룩진 격동의 아프가니스탄 현대사를 배경으로 두 소년의 우정과 배신 그리고 속죄의 이야기를 할리우드 영화를 연상시키는 탄탄한 구성을 지닌 흥미롭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엮어 낸 저자의 솜씨야말로 이 소설의 가장 큰 힘이자 성공의 결정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 내러티브가 잘 보여 주듯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결국 논리가 아닌 이야기의 힘이 아니던가?

3. 이 소설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1) 평온한 일상을 구가하던 주인공이 죄의식이라는 내적 문제와 하산의 아들을 구출해야 한다는 외적 문제에 직면하여 문제해결을 위해 안락한 삶을 떠나는 일상으로부터의 분리 (2) 하산의 아들인 소랍을 구출하기 위해 탈레반이 지배하는 아프가니스탄으로 잠입하여 그의 숙적이라 할 수 있는 아세프와의 격투를 벌이는 고난과 모험의 여정인 지하 세계의 모험 (3) 소랍을 무사히 구출함으로서 그의 임무를 완수한 후 삶으로 복귀한다는 일상으로의 회귀라는 성장소설 혹은 영웅설화의 원형(原型 prototype) 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에서 대개 주인공의 영혼은 영웅적 모험의 결과 정화나 신적 고양 혹은 구원을 경험하게 되며, 이 소설에서는 아세프가 가지고 있던 하산에 대한 죄의식이 아내에게 그의 부끄러운 과거를 용기 있게 털어놓는 고백의 행위와 하산의 아들을 구하기 위한 영웅적 모험이라는 속죄의 행위로 인해 일정 부분 해소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 소설이 특히 미국 혹은 서구에서 설득력을 가졌던 이유 중 하나는 주인공의 영웅적 모험이 수치명예라는 전형적인 동양적 이분법의 도식에 의해 지배되기보다는, 내면적 혹은 죄의식과 그 해결로서의 속죄 혹은 구원이라는 지극히 서구적인, 혹은 기독교적인 프레임에 따라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구체적인 기독교적 언급이 나오지는 않지만 죄와 구원의 문제라는 지극히 ‘기독교적인’ 주제를 다루는 이 소설은 충분히 ‘기독교적인’ 소설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지 않을까?

 4. 강력한 “이야기의 힘”을 가진 감동적이고 좋은 소설이긴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느꼈던 아쉬웠던 점을 한 가지만 지적한다. (1) 주인공을 아프간으로 밀입국시키는 타지크인 운전수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주인공 혹은 저자의 경험은 전형적인 ‘진짜 아프가니스탄’, 즉 아프간 민중들의 삶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아프가니스탄의 부유한 지배계층이었던 그들은 그 운전수의 말대로 그 땅에서 늘 관광객이었을 뿐이다. 물론 진짜 관광객에 불과했던, 그래서 그들이 아프간 땅에 가지고 있던 재산을 외국으로 빼돌리는 데만 관심이 있었던 다른 아프간 밀입국자들과는 달리, 주인공인 아미르는 결국 그 운전수의 가족들로부터 가족과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진짜’ 아프간인으로 인정받기는 하지만. (2) 그러다보니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이 소설은 아프가니스탄과 그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들의 이야기가 많이 다루어지고 있기도 하지만, 실상은 (주인공의 시각이 대표하고 있는) 상당히 미국적이고 서구적인 심지어는 ‘기독교적인’ 주제와 관점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그런 점 때문에 나를 포함하여 서구문명의 세례를 받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공감과 감동을 선사할 수 있었을 것이고, 저자가 아프간 출신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미국인을 상대로 글을 쓰는 미국 작가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편향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조연들이 아닌, 저자의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주인공 자신이 아프간적인 것, 아프간인들의 ‘심장’ 을 좀 더 많이 보여주었다면 더욱 좋지 않았을까?  그의 다음 작품인 <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 기대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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