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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성서학

예수님은 누구인가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성서유니온 옮김), 십자가 위의 예수 (스탠리 하우어워스 지음, 새물결플러스 펴냄)

by 서음인 2017. 4. 15.

지난 몇 년간 성탄절과 부활절 전후로는 가능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 관한 책들을 읽으려고 노력해 왔고, 그간 BST 시리즈의『십자가』와『부활』알리스터 맥그래스의『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같은 복음적 관점의 책과 호슬리의『크리스마스의 해방』이나 보그와 크로산의『예수의 마지막 일주일』레이몬드 브라운의『메시아의 탄생』과 같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시각을 지닌 책들을 두루 접할 수 있었습니다. 올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책자 두 권과 예수의 ‘평화 영성’에 대한 묵상집 한권, 그리고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서 한 권을 집어들었습니다. 그 중 알리스터 맥그래스와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쓴 소책자는 둘 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성육신과 삼위일체 교리 및 십자가와 부활사건의 역사성을 옹호하는 책들이었습니다만, 접근의 방식과 책의 분위기는 대조적이라고 할 만큼 많이 달랐습니다.

21세기를 대표하는 복음주의 지성으로 손꼽히며 다방면에 걸친 수많은 저술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역사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예수님은 누구인가』의 서문에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추상적인 관념이나 신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이고도 흥미로운 존재로 꼽히는 한 사람이 있으며 ..... 그 핵심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이 지닌 아름다움”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육신이나 속죄, 부활과 같이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전통적으로 견지해 온 몇몇 중요한 신앙고백에 대해 다양한 일상적 예화와 교회사적 ‧ 신학적 통찰의 도움을 받아 친절하고 설득력 있게 설명함으로서, “나사렛 예수의 정체성과 의미에 대한 기독교의 풍성하고도 복합적인 이해”를 보여줍니다. 이 책에서 맥그래스가 그려내는 ‘전통적이고 복음적이며 탈 정치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은 새롭거나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자칫 식상하게 느껴질 수 있는 복음의 이야기도 생생하게 살려내는 탁월한 이야기꾼인 맥그래스의 능력으로 인해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지적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복음의 핵심을 풀어 알기 쉽게 설명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체스터튼에서 C.S. 루이스를 거쳐 존 스토트에게까지 이르는 ‘영국제 복음주의’의 향기가 진하게 풍깁니다.

이와는 달리 2001년 타임지로부터 ‘미국 최고의 신학자’로 선정되기도 한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십자가 위에서의 일곱 말씀(架上七言)을 다룬 작은 묵상집인『십자가 위의 예수』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편안함’이나 ‘세련됨’ 보다는 ‘직설적’ 혹은 ‘불친절함’ 과 같은 단어들로 더 잘 표현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복음을 배신하려는 끝없는 유혹을 관용이라는 이름의 거짓된 겸손을 모방하려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도 거부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하우어워스는 십자가의 일곱 말씀을 어떠한 종류의 ‘인간적’이거나 ‘심리적’이거나 ‘감상적’인 측면도 배제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우리의 필요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구원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2위 하나님인 주 예수 그리스도가 지시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와 심연을 드러나게 하는 방식”으로 읽기를 원합니다. 예를 들자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절규에서 “하나님이 고통을 당할 수 있을 때만 사랑할 수 있다는 주장과는 반대로 하나님이 삼위일체일 때만, 즉 하나님이 완벽하게 자신을 줄 수 있을 때만, 그분은 우리 중의 하나와 같이 고통을 당할 수 있다”라는 결론을 끌어내거나, “내가 목마르다”라는 ‘인간적인’ 것으로 보이는 고통의 호소조차 “아들의 사역, 성령을 통한 아들의 목마름은 다름 아닌 우리를 위한 아버지의 목마름”이라고 규정하는 식입니다. 이 책은 변증도 설명도 아닌 성육신과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묵상과 송영 그리고 선포입니다.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 중 한 분이었던 스탠리 존스『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에서 “성서, 서구문명, 그리고 보편적 교회”를 지키기 위한 전투에서 퇴각해 “그리스도만” 중심에 세우게 되었을 때 선교사역의 임무가 단순화되었을 뿐 아니라 훨씬 역동적으로 변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꼭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위대한 교부들의 목소리로부터 현대의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의 주장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서구의 정통 보수 신학이 가르치는 예수님의 모습으로부터 비서구인들과 여성 그리고 소수자들의 친구인 급진적 예수의 초상에 이르기까지, “구름과 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유명한 찬송가의 가사처럼 “밝히 알아듣게 다시 들려주는” 다양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과 대면하면서 신앙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하는 나그네 여정 가운데 시도할 수 있는 가장 흥미롭고 가치 있는 모험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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