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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과학

창조론 연대기 (김민석 지음, 새물결플러스 펴냄)

by 서음인 2017. 9. 12.

지난 토요일 진료를 마친 후 집에 가는 기차를 타려고 역에 도착해보니 가방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아뿔사, 점심을 먹었던 병원 앞의 식당에 놓고 온 것이었습니다. 가방이야 나중에 찾으면 된다지만 저 같이 문자중독 증상이 있는 사람은 일단 수중에 읽을거리가 없으면 웬지 모를 불안감과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는 법입니다. 하여, 서울에 도착해 집에 들어가기 전 할 수 없이(?) 서점에 들러 먼저 원래 사고 싶었던 야로슬라브 펠리칸의 <성서, 역사와 만나다>를 집어든 후, 죄책감 없는 주말을 보내기 위한 가벼운 읽을거리로 만화책 한 권과 소책자 두 권을 골랐습니다. 저녁식사 후 뭘 읽을까 고민하다가 마침 요즘 모 장관 후보자가 창조과학과 관련해 구설에 오르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만화책인 <창조론 연대기>를 집어들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읽다 보니 ..... 엇!! 만화라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었네요.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어버렸습니다! 사이비 과학인 “창조과학”에 의해 촉발된 논쟁과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 과학적 · 신학적 이슈들이 충실하면서도 알기 쉽게 잘 요약되어 있었습니다. 각 장의 말미에 달려 있는 각주는 이 주제에 대한 탁월한 참고문헌 목록을 방불케 할 정도네요. 성경에 대한 극단적인 문자적 해석과 허접한 세대주의 신학에 기초한 사이비 유사과학인 “창조과학”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신학적 태도까지 잘 알려주는 정말 좋은 책이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분들에게는 최상의 입문서로, 이 분야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진 분들에게도 알고 있는 바를 정리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읽을거리로 적극 추천할만 합니다.

과학시대를 살아가며 과학기술이 주는 혜택을 원없이 누리면서도 허술한 신학에 기초한 유사과학의 잣대로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과학자들을 정죄하기에 바쁜 “창조과학”신봉자들을 보면서, 문득 당대의 공식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자신들만의 독특한 신앙관과 우주관을 끝끝내 견지했던 중세시대의 소종파 이단(들)을 인류학적 방법으로 연구한 흥미진진한 역사서들인 아날 학파의 거장 엠마누엘 드루아 라뒤리의 <몽타이유>와 미시사의 대가 카를로 진즈부르크의 <치즈와 구더기>가 떠올랐습니다. 이 책들을 보니 현대의 ‘소종파 이단’이라 할 이들 “창조과학자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처럼 과학적 ‧ 신학적으로 접근하는 것 보다 오히려 인류학적으로 탐구해 보는 편이 훨씬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누군가 창조과학자들의 그룹에 들어가 그들과 동고동락하며 인류학 보고서를 써 낸다면 마가렛 미드의 <사모아의 청소년>이나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뛰어 넘는 인류학계의 전설적인 베트셀러가 되지 않을까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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