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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교의 .변증

포스트휴먼 신학 (장윤재 지음, 신앙과지성사 펴냄)

by 서음인 2018. 7. 21.

『포스트휴먼 신학』은 이대 기독교학과 교수인 저자가 모든 자연과 생명이 고통당하는 인류세(Anthropocene)의 삶의 현장에서 '발로 쓴' 글들을 모은 책이다. 저자는 4대강 · 핵발전소 · 동물학대 · 기후변화에 대해 살피면서, 교회가 지독한 인간중심주의와 종(種)차별주의에서 벗어나 '비인간 동물'을 포함한 모든 자연과 '동료 피조물'로 함께 공생하는, 여성적이고 생태적인 제 2의 종교개혁을 일으켜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인간신격화'를 낳은 근대 휴머니즘의 과오를 극복하고 神중심주의로 돌아가기 위해, 켈트 영성과 포스트휴먼 신학으로의 '회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자연과학과 인문학, 그리고 다양한 신학전통들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생산해 낸 풍성한 담론들로 가득한 책의 내용을 조금 자세히 살핀 후 개인적인 단상을 덧붙이기로 한다.


강물아 흘러 바다로 가거라 - 전능하신 인간과 끙끙 앓는 하나님

흐르고 순환하는 물은 생명을 불러일으키고 각각의 생명과 땅을 하나로 엮는다. 강은 단순히 물이 지나가는 통로가 아니라, 강 바닥과 주변을 포함한 모든 영역이 하나의 신비한 생명 활동을 수행하는 복잡한 생태시스템이다. 또한 강에는 홍수기와 갈수기가 모두 필요하며(자연적인 유황 flow regime), 홍수는 강에서 가장 풍성한 ‘생명의 잔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크고 작은 댐들이 하천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차단한 결과, 수많은 생물종들에게 풍성한 생명활동의 장을 제공하던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강들이 균일하고 획일적인 배수로로 바뀌고 말았다. 그리고 유수에 의해 운반되던 퇴적물 총량의 1/4 가량이 저수지에 갇혀 하류와 바다에 영양분을 공급하지 못하면서 바다는 영양실조에 걸리고 강에 쌓인 유기물은 강을 썩게 만들고 있다.

하나님은 강물의 섬세한 움직임과 높낮이를 통해 복잡한 생명의 과정을 지휘하는 부지런하고 알뜰한 신이다. 신의 사랑은 세계 안에 철저히 육화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몸으로서의 세계는 신의 성례전(sacrament)이고 성육신(incarnation)이다. 이 신은 ‘말씀 한마디로 존재하도록 불러낸 존재들이 계속 번영하는지 극진히 보살피는 하나님이며, ‘오이코스’ 즉 지구라는 집안 살림 전체를 염려하면서 이 땅의 생명 모두가 각자의 정당한 삶의 권리를 누리고 지구라는 집이 미래의 거주자들을 위해 최적의 상태로 유지되도록 애쓰는 신이다. 이처럼 모든 피조물의 번성과 또한 공정하고 지속가능한 지구의 살림에 관심을 쏟는 생태적이고 여성적인 이 신을 기독교에서는 창조자, 해방자, 그리고 양육자로 고백한다. 셀리 맥페이그는 “신의 영광은 모든 피조물이 충만하게 생동하는 것이며, 우리는 세계와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함으로서 신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말한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인간이 자연의 지배자로 군림하기 시작하면서 대부분의 하천은 이제 자연에 의한 통제보다 인간에 의한 통제를 더 많이 받고 있으며, 이렇게 자연을 뜻대로 개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인류세에 사는 우리가 깊이 천착해야 할 기독교 신학의 핵심적 화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전능하신(?) 인간’의 문제가 되고 있다. 4대강 사업은 오만해진 인간이 신이 자연 안에서 일하는 방식을 신뢰하는 대신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신의 영역을 침범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맥페이그의 말마따나 21세기의 인류에게 ‘죄와 악’이란 만물이 서로 그리고 신과 상호 관계를 형성하면서 상호 의존하는 이 실재의 바깥에서 홀로 살 수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우리는 망치고 죽이지만 하나님은 살리시기에,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강이 다시 흐르게 하는 것이다.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신학’을 향하여 - '핵시대의 신학'을 넘어 

20세기 중반 이후의 인류가 살아가는 ‘핵시대’란 핵에 대한 무지와 탐욕 그리고 무서운 자기기만 속에 핵무기와 핵발전이라는 ‘죽음의 놀이’를 가지고 생명과 평화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시대다. 고든 카우프만은 『핵시대의 신학』에서 우리 시대는 더 이상 아무 구속적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핵 대학살에 의한 종말’의 가능성이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손’에 달려 있게 되었다고 개탄했다. 샐리 맥페이그는 핵으로 인해 인간이 “죽음, 즉 세계의 파괴자”가 된 상황에서 서구신학의 전통적인 신 이해인 ‘지배로서의 힘’과 ‘섭리로서의 힘’은 “세계와 연합하고 상호의존하는 당신 하나님”인 ‘어머니 하나님’, ‘연인 하나님’ 그리고 ‘친구 하나님'이라는 은유로 바뀌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카우프만과 맥페이그는 핵무기뿐 아니라 핵발전도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기 못했으며, 우리의 목표는 '핵시대의 신학'이 아니라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신학'이 되어야 한다.

핵은 잘못된 지식과 거짓 신화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핵 없는 세상으로 가기 위한 여정에는 철저한 탈신화화와 비신화화 작업에 필요하다. ① 핵무기는 군사용이고 핵발전은 평화용이다 - 결코 깨끗하지도 싸지도 않은 핵발전을 고집하는 이유는 핵발전이 핵무기의 원료를 생산해주기 때문이다. 핵은 발전이든 무기든 평화와 양립할 수 없다. ② 핵에너지가 온실가스를 방출하지 않는 저탄소 청정에너지이다 - 우리늄의 채굴과 가공 및 농축과정에서 많은 양의 온실가스가 발생하며, 아직까지 핵발전소에서 나오는 핵 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리하는 방법은 없다. ③ 핵발전은 안전하다 - 핵발전은 실수 없는 인간을 요구하나 그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와 국가 그리고 지구 전체의 생명안보를 위협한다. ④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기가 필요하다 - 핵에 대한 물음은 곧 우리 문명의 근본을 묻는 물음이며,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기가 필요하다는 현대문명의 신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의 질문이다.

일본의 시민과학자 다카키 진자부로는 원자력이 오만해진 인간이 훔친 ‘하늘의 불‘이며, 원자핵의 안정성을 토대로 이루어진 생명의 세계에서 별과 하늘의 이치인 원자력은 결국 재앙의 불이 되고 만다고 일갈한다. 핵은 기독교 신앙 뿐 아니라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어떤 종교와도 양립할 수 없다.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새로운 종교적 상상과 구상은 피폭자의 자리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피폭자의 얼굴이 곧 우리의 얼굴이자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과학기술의 관점이 아닌 생명의 관점에서, 우리 세대만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수많은 세대들의 눈으로,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을 포괄하는 전 우주 생명공동체의 입장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생명과 평화의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핵 없는 시대로의 출애굽의 길은 “죽음, 곧 세계의 파괴자”가 된 인간을 다시 겸손히 “땅을 지키고 경작하는” 생명의 청지기로 부르는 영적 정신적 회심의 여정이 될 것이다.


노아와 방주와 무지개의 하나님 - 동물신학의 탐구

동물학대는 문명화된 사회에 존재하는 합법화되고 제도화된 폭력으로 피터 싱어는 이를 “동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한 모든 인간은 나치다”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동물학대의 뿌리는 서구의 이성 중심적이고 이분법적인 세계관이며, 유대교와 기독교는 인간이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고대 그리스 사상가들은 인간이 이성적 사고의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동물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가르쳤다. 이런 이성중심적이고 이분법적인 세계관은 기독교 신학사상 안에 동물을 하등동물과 고등동물로 분류하고 이 위계적 질서의 맨 꼭대기에 인간이 자리잡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인간중심주의’, 더 정확하게는 ‘종우월주의’ 혹은 ‘종차별주의’를 낳았다. 따라서 동물에 대한 폭력과 학대는 2천년 이상 지속되어 온 서구의 주류 사상과 신학을 타파하지 않고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을 것이다.

여러 실험으로 통해 동물에게도 초보적인 자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있으며, 이제 우리는 동물을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만이 가졌다고 알려진 인격성을 일부 지닌 '비인간 인격체'(nonhuman person)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자크 데리다는 우리가 정작 물었어야 하는 질문은 ‘동물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동물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가 되어야 한다고 여기며, 제인 구달은 우리 인간이 경이로운 동물계의 일원이며 또한 자연의 일부임을 기쁘게 인정하자고 말한다. 셀리 맥페이그는 인간이 가진 수학적 이성이 동물이 가진 실천적 이성보다 우월하다고 할 필연적인 근거는 없다고 주장하며, 프란시스 베이컨의 회화는 인간을 동물 위에 올려놓던 근대 인간중심주의를 무너뜨리고, 이성을 해체시켜 짐승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핵심교리의 하나인 성육신은 신이 ‘인간’이 된 사건이 아니라, 신이 ‘육신/고기’가 되신 사건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앤드류 린지는 모든 피조물은 신과의 관계에 있어 나름의 본유적 가치를 지니며 동물에 대한 학대는 이러한 신적 권리에 대한 침해요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한다. 성서가 인간만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책으로 읽힐 필요는 없으며 성서가 노예제도와 성차별을 철폐하는 데 큰 영감을 준 것처럼 우리는 거기에서 동물의 해방과 구원에 대해 새로운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휘터만은 노아의 방주 이야기의 핵심이 모든 동물도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성 프란체스코는 「형제 태양과 자매 달의 찬양시」에서 우리의 형제자매인 다른 모든 동료 피조물들과 함께 손을 잡고 온 우주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선창한다. 프란체스코 찬양시에 나타난 철저한 신중심주의야말로 성서의 세계관이며, 동물신학은 인간학이 되어버린 현재의 신학을 진정 신에 대한 학문으로 바꾸는 데 기여할 것이다.


켈트 영성 - 창조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과의 친교

미국의 과학사가 린 화이트가 「생태적 위기의 역사적 뿌리」에서 기독교의 ‘지독한 인간중심주의’를 생태계 파괴의 주범으로 지목한 이래, 기독교가 전 지구적 생태 위기에 응답할 수 있는 소중한 신학적 자산으로 켈트 영성이 새로이 주목받고 있다. 기원전 5~6세기에 출현하여 서유럽 전체를 지배하다가 역사의 무대에서 퇴조한 켈트인들은 자연의 모든 요소에 초자연적이고 신성한 의미가 숨어 있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모든 생명체와 자연을 존중하려 했다. 켈트 지역 선교는 성 패트릭이나 성 브리기드 같은 선교사들에 의해 강압이나 무력이 아닌 온건한 설득과 적극적 포용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켈트 토착 문화와 영성을 배척하기보다 오히려 신성하게 만들어 포용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이러한 켈트 신앙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나 토머스 머튼 등에 의해 주류 기독교 내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기독교 역사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켈트영성의 가장 눈에 띠는 특징은 그것이 자연을 찬양하고 존중하며 사랑한다는 점이다. 창조세계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 안에 신이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이며, 신은 인간 옆이 아니라 인간 안에 현존하신다. 피조세계는 신의 숭고함이 가득한 은총 입은 세계이며, 그리스도는 창조에 맞서서 오신 분이 아니라 창조의 중심으로부터 오신 분이다. 따라서 우주의 다른 부분은 다 망가져도 혼자서 완전할 수 있다는 개인 구원의 교리는 설 자리가 없으며, 켈트 영성에서 그리스도는 개인 영혼의 구원자라기보다는 창조세계의 치유자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앞으로 도래하는 시간의 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발견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실한 사람들에 의해 지금 여기서 향유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켈트 영성은 교회의 네 벽으로부터 자유로이 서서 하나님이 거하는 성소인 창조세계 전체를 향하는 요한의 영성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상상력이 풍부한 켈트 영성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교리를 율법주의적으로, 그리고 신학을 도덕주의적으로 이해하는 많은 현대인들에게 신앙의 새로운 가능성과 길을 열어준다. 켈트 영성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신의 열정적인 임재를 느끼며,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에서 즉 사랑하고 일하고 먹고 노는 일상사 가운데에서 거룩한 하니님을 뵙고 그분과 사귀는 것이다. 켈트 영성은 하나님은 물질적 영역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도리어 물질로 이루어진 창조세계 안에서 찾아질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 뵈려면 세상의 삶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켈트 영성의 회복이야말로 오늘의 기독교 신학이 지독한 인간중심주의가 생태게 파괴의 주범이라는 린 화이트의 테제를 적극 반박할 수 있는 강력한 자원이 될 것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 기후변화와 신학적 응답

산업혁명 이래 물질적 풍요와 편리를 지고의 가치로 추구해 온 경제성장 전략은 에너지 소비, 특히 화석연료의 소비와 긴밀히 연동되어 주요 온실기체인 이산화탄소를 대량 배출했고 이것이 지금의 기후변화의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환경문제는 산업의 문제고 구조의 문제며, 우리의 싸움은 결국 성장 지상주의, 시장 만능주의와의 싸움이다. 우리에게는 신자유주의의 경제 세계화를 종결시키기 위해 케인스주의로의 회귀보다 좀 더 근원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① 지금의 팽창지향적인 단일 지구촌 경제모델을 버리고 세계경제를 작은 규모의 지역경제로 다원화하여 평등하고 호혜적인 상호협력관계를 창출해야 한다. ② 화석연료에 기초한 현재의 에너지 문명에서 탈피해 재생가능한 에너지 문명으로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③ 가난의 문제를 양적성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분배정의의 실현과 인구증가의 억제와 같은 질적 발전에 의해 해결하려는 생태경제로 전환해야 한다.

기독교의 ‘지독한 인간중심주의’가 생태 파괴의 주범이라는 린 화이트의 테제에 대한 반성으로 기독교 신학에서 다양한 생태학적 논의가 시작되었다. 예수회 사제였던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우주를 살아 있는 유기체로 봄으로서 기독교 생태신학 발전에 많은 통찰력을 제공했으며, 도미니크회 수사였던 매튜 폭스는 원죄가 아닌 원복을 강조하면서 우주에 대한 경외심을 고양시키는 ‘창조영성’을 제안했다. 존 캅과 데이비드 그리핀 같은 과정신학자들은 모든 존재 사이의 상호 연관성을 강조하면서 전통적인 남성 신 개념을 거부하고 신의 응답적이고 교감적이며 고통을 나누는 사랑을 강조하는 과정신학을 발전시켰다. 또한 로즈마리 류터로부터 시작된 생태여성신학은 생태계 위기의 뿌리가 남성중심주의에 있다고 주장했으며, 북미 생태여성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샐리 맥페이그는 하나님의 창조를 ‘출산’으로 비유하며 하나님의 몸으로서의 세계/자연이라는 은유를 제안했다. 신은 나사렛 예수 한 몸으로 성육신했다기보다 온 세계로, 온 세상의 물질로, 온 우주로 성육신했다는 것이다.

갈릴레이 지동설과 다윈 진화론의 가장 중요한 정신사적 의미는 ‘지구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로 부터의 탈피였다.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체 위에 군림하는 ‘창조의 면류관’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 얽혀 살아온 우주의 한 작은 생명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구 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탈피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인간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온 우주의 창조주이심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연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자가 아닌 그의 피조물을 경작하고 지키는 자로, 생태계의 주인이 아니라 겸손한 참여자요 관리자로 부르셨으며,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질문하는 하나님의 음성은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나 신의 자리에 이르려고 했던 오만하고 탐욕스런 인간을 다시금 본래의 자리로 부르는 것이다.


에필로그 - 포스트휴먼 신학을 향하여

인간의 존엄성은 지금도 포기하지 말아야 할 휴머니즘 최고의 가치이지만, 실제로는 유럽의 백인 남성인 ‘인간’을 세계 역사와 우주의 중심에 놓기를 고집하는 것이 근대 휴머니즘의 민낯이었다. 포스트휴머니즘이란 이렇게 인간이 아닌 모든 존재를 범주적으로 타자화해 온 근대 휴머니즘의 인간중심주의와 종차별주의를 버리고 땅과 지구와 자연이 함께 공생하는 생태계 일원으로서의 새로운 인간을 지향하는 것이며, 초월적인 지위로 격상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어떤 명백한 운명을 가진 자율적 주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관계적인 주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여성학자 로지 브라이도티는 인문학이 인간에 대한 배타적 관심을 넘어 좀 더 지구행성적인 지적 도전을 받아들이며 ‘비인간 인문학’으로 발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기술결정론적 관점에서 인간이 새로운 종으로 변화 혹은 진화할 것이라 예언하면서 인간과 기계 및 인간과 정보의 융합을 통해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소위 인간향상을 꾀하는 트랜스휴머니즘의 흐름이 등장하고 있다. 기술적 매개를 통해 인간의 초월성을 주장하는 이러한 트랜스휴머니즘은 서구의 합리적 개인주의가 극단적 모습으로 변형된 것이며, 휴머니즘의 이원론을 전용하여 인간이 슈퍼휴먼 단계에 이를 때까지 휴머니즘적 특성을 확대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필요 이상 많이 가진 사람들을 향상시키는 데 중점을 둘 것이 아니라, 기초적인 필요조차 충족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존엄성을 향상시키는 것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캐롤린 머천트는 『자연의 죽음』에서 1500~1770년 사이 과학혁명으로 일컫는 시기에 서양에서는 살아있는 여성적 지구라는 유기적 이미지가 자연은 죽어 있고 수동적이며 인간에 의해 지배되고 통제되어야 할 어떤 기계와 같다는 이미지로 대체되었고 말한다. 우주에 대한 유기적 이미지의 제거는 바로 자연의 죽음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하는 근대 휴머니즘은 바로 이 ‘자연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다. 미래학자인 제러미 리프킨은 지구의 에너지는 유한하며 언젠가는 고갈되기 때문에 우리의 고에너지 경제체제를 시급히 ‘저에너지 사회’로 이행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이제 우리는 자연을 기계적인 것에서 유기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도모해야 한다. 우리는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을 곱씹으며, 휴먼의 문제를 넘어 생명의 문제를 사유하고, 휴먼의 권리를 넘어 생명의 권리를 옹호하며, 근대적 휴머니즘이 가지고 있는 인간중심주의의 오만함을 넘어 신과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근원적으로 다시 성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휴먼 신학의 과제다.


개인적 단상 - ‘인간중심주의’와 ‘도그마중심주의’를 넘어!

아마도 보수적 개혁주의의 스탠스에 서 있는 분들이라면 이 책의 내용과 저자의 신학적 스탠스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 생명이 고통당하는 ‘인류세’의 삶의 현장에 서서 현대과학과 인문학, 그리고 다양한 기독교 전통과 치열하게 대화하며 발과 가슴과 머리로 써낸 이 멋진 책을 읽으며 나는 그분들에게 질문하고 싶다. 만약 저자의 대답이 신학적 실천적으로 불만족스럽다면 과연 보수 정통 개혁주의라 불리는 신학의 체계는 상투적이고 자충족적인 도그마의 언어 말고 심각한 위기에 처한 이 세상에 대해 이 책보다 더 나은 ‘구체적’ 인식과 ‘실천적’ 대답을 가지고 있는가? 혹시 저자가 말하는 ‘인간중심주의’보다 더 중증인 ‘도그마 중심주의’에 빠져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을 자신이 믿고 있는 '개혁-보수-정통 교리체계'의 언어로 환원하고 그 질서 안에서 위계를 부여한 후에야 마음이 놓이는 강박증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이 책에 나오는 참고문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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