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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교의 .변증

한나의 아이 (스탠리 하우어워스 지음, 홍종락 옮김, IVP 펴냄), 스탠리 하우어워스 (마크 코피 지음, 한문덕 옮김, 비아 펴냄)

by 서음인 2017. 6. 21.

1.『한나의 아이』는 2001년 <타임>지로부터 미국 최고의 신학자로 선정된 바 있는 기독교 윤리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 1940~ )가, 정신질환을 앓는 아내와의 고통스러웠던 결혼생활을 포함한 굴곡진 개인사와 텍사스의 조적공에서 당대 최고의 신학자로 우뚝 서기까지의 활발한 지적 탐색의 여정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직조해 낸 자전적 회고록, 혹은 “한 그리스도인의 영혼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 주는 신학적 인류학 서적”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나 토머스 머튼의 『칠층산』의 전통에 서 있는 이 책에서 저자가 보여주는 삶과 신앙의 여정은, 오래 전에 세워진 ‘확고한 진리’라는 견고한 성채를 어떠한 의심도 없이 굳건히 지키는 용맹한 기사의 무용담이라기보다는, ‘정답 없는 삶 속에서 신학하기’라는 부제가 잘 보여주듯 ‘정통’이라는 항구에서 미지의 대해를 향해 용감하게 출항했으나 결국 “복음, 성서, 제자도, 공동체”라는 자신의 집 마당 어딘가에 도달하게 된 모험가의 여행기에 가까워 보인다. 개인적으로 이 신학자의 생각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는 데 비아에서 나온 소책자인『스탠리 하우어워스』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2. ① 교회의 사명은 ‘자유주의적 근대성’의 소산인 관용과 다원주의,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의 수호가 아니라 “그리스도교 고유의 이야기를 좀 더 진지하게 대하고 그들의 삶과 더불어 그 이야기를 충실하게 말하는 것”이고, ② 교회를 위한 신학자들의 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근대 세계에 맞게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예수에 맞게 변형하는 것”이며, ③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다는 “우리가 어떤 사람, 공동체, 국가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집중해아 한다는(덕 윤리 virtue ethics) 하우어워스의 주장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불 수 있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목소리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보수”와 “정통”을 자랑으로 삼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 하우어워스가 ④ “칼 바르트는 나치를 상대했다. 그런데 우리가 한 일이란 고작 윌로우크릭 교회다”라고 말하면서 경영학을 활용한 교회 성장 전략들을 강력하게 비판했고, ⑤ 교회는 현대를 지배하는 소비주의 세계에 강하게 저항하면서 자본주의의 희생자들과 함께 하는 낮선 거류민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⑥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라인홀트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로 대표되는 콘스탄틴주의의 유혹에 맞서 존 요더를 따라 평화주의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급진성을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감리교인이지만 가톨릭 대학인 노터데임 대학에 오래 재직했고, 한때 루터교 · 성공회 · 가톨릭교회의 회중이었을 뿐 아니라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했으며, 그의 재혼한 아내는 한국의 보수교회가 극단적으로 금기시하는 여성 목사다. 

3. 후기 기독교 사회로 접어들었지만 기독교 문화의 잔영이 아직 강력하게 남아 있는 미국에서라면 그의 급진적 윤리뿐 아니라 그 기초가 되는 보수적인 주장마저도 참신한 예언자적 목소리로 들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상 단 한번도 기독교 국가였던 적이 없었고 따라서 기독교가 대중들의 집단 무의식 깊숙이 각인될 기회가 없었던 종교적 다원주의 사회인 한국에서 그가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근대 세계에 맞게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예수에 맞게 변형시켜야 한다”는 식의 접근방식은 그냥 무례하고 독선적인 종교 근본주의자의 주장이거나, 비그리스인들과의 소통을 포기한 공허한 독백으로 여겨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하우어워스가 보여준 솔직함과 진실함, 제자도와 평화주의의 좁고 험한 길을 기꺼이 선택한 치열함에는 깊이 감명받았지만, 근대성과 기독교를 대척점에 놓거나, 타자와의 대화보다는 동일집단 공동체로의 퇴각을 선택하는 이 텍사스의 조적공 출신 신학자의 견해는 내게 그다지 편안하지 않다.

본문 엿보기

바르트와 조적공 당시 많은 학자들은 신앙의 임무가 신앙의 언어를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에 맞추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작업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내게 정말 중요한 질문은 기독교를 세상에 맞출 수 있느냐가 아니라 세상을 그리스도인이 믿는 바에 맞출 수 있느냐였다. 나에게 신학 공부는 놀이가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 것은 아마 내가 조적공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대충 넘어가기’를 믿지 않는다. 내가 바르트에게 끌린 이유는 그가 어떤 부분에서도 대충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언어가 어떻게 쓰이는지 보임으로서 언어의 작동 방식을 드러내려 했다. 바르트의 사고에서 볼 수 있는 ‘허튼소리 없는’ 특성은 텍사스 출신의 조적공에게 호소력을 발휘했고, 내가 볼 때는 그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주장에 있어야 할 솔직함이었다 (3장 공부 中)

라인홀트 니버 지금 세상의 모습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내가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영향을 주시 시작했다. 기독교는 우리가 운명이 정해진 존재가 아님을 깨닫기 위한 지속적인 훈련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전쟁이 없는 세상도 상상할 수 있다. 나중에 하게 된 생각이지만, 베트남에 대해서도 다르게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베트남 전쟁이 제기하는 난점에 대해 생각할수록, 라인홀드 니버가 가르쳐 준 내용에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깊어졌다. 나는 늘 니버에게 경외심을 느꼈다. 니버 저작의 힘은 참된 말을 하려는 니버의 열정에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대인관계와 정치적 관계의 본질에 자리잡은 폭력의 필연성에 대한 니버의 신학적 이해를 그렇게 설득력 있게 여긴 이유가 진실을 향한 니버의 그런 열정을 제대로 감지한 데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하지만 베트남 전쟁과 민권 운동, ‘정상 상태’에 맞서는 반체제 운동 시위를 겪으면서 나는 니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니버가 나를 유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혹’이라는 말은 적절한 단어다. 그는 지금 세상의 모습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나를 유혹했다. (4장 교직 중)

독특한 기독교 나는 신학자가 일부 철학자들처럼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입장’이라고 하면 신학자가 뭔가 ‘새로운’ 것을 주장해야 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데, 나는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가 새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신학자들에게는 입장이라는 것이 없다고 믿는다. 신학자의 과제는 입장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받은 것이 무엇인지 알도록 돕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교회가 ‘받은 것’에 대한 상당히 독특한 견해가 나에게 있다는 것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 내가 제시하는 “독특한 기독교”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에서 발견되는 과거와 현재의 기독교와 근원적으로 연속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독교를 새로 만들어 낼 수 없고, 독창적이 될 마음도 없다. 내가 제시하는 기독교가 전혀 다르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하는 고백들이 얼마나 비범한 것들인지 알아보게 하는 길을 내가 찾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창의적이 될 마음이 없다. 나는 다양한 기독교 전통을 활용해 기독교를 설명했고, 그렇게 제시된 기독교가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는 설득력을 발화하고 나를 포함한 어떤 이들에게는 무섭게 느껴지는 것이다. (6장 살아남기 中)

‘통제를 벗어난’ 상태에서 살아가기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어하거나 특이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근본적인 기독교 신념들을 깊숙이 받아들이면서도 사회적으로 급진적인 윤리를 내세운다는 점이다. 그 신념들의 바탕에는 예수님이 온전한 하나님이자 온전한 사람이라는 주장이 깔려 있다. 그분이 온전한 하나님이자 온전한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숭배자가 분명하다. 사회적으로 급진적인 윤리는 이 신학적 확신에서 나온다.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는 것 자체가 정치이며,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셨기에 비로소 존재하는 세상이 그 정치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세상을 책임 있게 설명하기 위해 폭력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 우리의 삶이 ‘통제를 벗어난’ 상태라는 이미지는 내 저작의 상당 부분을 관통하는 중심 이미지다. 사실 그 이미지가 내게 다가온 것은 요더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후 나는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결과를 예상하거나 보장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 절박한 안전 욕구 때문에 우연성을 버리거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 대안을 발견하는 방법이다. 그 외의 방법으로는 대안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는 니버식 현실주의의 대안이 된다. ‘현실주의’의 문제는 상상력을 닫아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요더에게 배운 신학적 교훈이었다. (6장 살아남기 中)

정답 없이 살아가기 나는 기독교 신학자다. 사람들은 내가 그런 질문(정신질환을 앓다 죽은 저자의 아내의 인생에 대한)에 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른다. 오히려, 내가 기독교 신학자로서 살아온 지난 세월 동안 배운 것이 있다면 누구도 그런 질문에 대답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나는 내 경험을 염두에 두고 침묵에 이름 붙이기를 썼다. 신정론에 반대하는 그 책의 주장은 어렵게 배운 것이었다. 기독교가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해답’이라고 만들어 주는 발상은 지금 세상의 모습이 불가피한 것이라는 생각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입하는 현실 순응적 교회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런 ‘해답’은 기독교를 하나의 설명으로 바꾸어 놓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가 볼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렇게 사는 법을 배울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에 된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이긴 하지만, 적어도 이런 주장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내게 지독히도 흥미진진하게 다가오는 이유를 이해하게 해 준다. (9장 폴라 中)

이야기로서의 신학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종종 그들이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그 의미를 상대편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이라 부르는 그분을 예배하고 그분께 기도함을 통해서만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는 법을 배운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을 알려 주는 이야기를 배우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경우에 따라서는 평생이 걸리기도 한다. 신학은 이 이야기를 배우고 하나님에 대한 발언을 의미 있게 만드는 맥락을 찾아내기 위한 지속적이고 끊임 없는 시도다. 신학의 핵심이 어떻게 하나님인 동시에 인생의 복잡성이 될 수 있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일부 근대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발언’과 ‘인생의 복잡성’을 분리하려 시도했고, 그 결과 그들 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되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하나님’ 이라는 단어가 정말 필요한지 불분명하진다. 나의 강연이나 저작이 ‘면전에 대고’하는 말처럼 느껴진다면, 내가 ‘하나님’이 필요한 단어임을 보여 주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10장 좋은 사람들 中)

 911이후의 ‘평화주의적’ 기도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크신 하나, 우리 삶은 여전히 2001년 9월 11일의 유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우리는 계속 나아갑니다. 신학대학원 전체 모임으로도 다시 만납니다. 이것이 1933년에 바르트가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전진해야 하다고 말했을 때 의미했던 것입니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진한다는 말은, 체념, 무력함, 절망에 빠진 조언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행동하고 싶고, 이전 모습을 되찾기 위해 뭔가를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9/11에 그토록 충격을 받고 모욕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로 인해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했던 우리의 오만함이 흔들리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전진하려면 주께서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우리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제자로, 주의 새 시대의 시민이자 놀라운 왕국의 시민들로 만들기 위해서임을 기억하기 힘이 듭니다. 우리가 말세를 살아간다는 사실은 주께서 우리에게 “아름답고 친절한 작은 행동”으로 9/11에 대응하는 데 필요한 모든 시간을 주셨다고 확신할 근거가 됩니다. 장 바니에는 겸손하고 확신 있게 이루어지는 그런 작은 행동들이 “세상에 일치를 가져다주고 폭력의 사슬을 끊어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오니 우리에게 겸손을 허락하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오늘 하는 일, 우리가 매일 하는 일이 날마다 아름답고 친절한 주님의 작은 몸짓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되지 못할 경우 거짓과 가식에 불과함을 알게 하소서. (11장 인내와 기도 中)

 

20199월 신학이란 무엇인가(알리스타 맥그리스)에 나오는 하우어워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후기자유주의 윤리학을 탐구한 가장 뛰어난 신학자로 널리 인정받는다. 도덕적 이념이나 가치들의 보편적 체계라는 계몽주의 사고를거부하는 하우어워스는, 기독교 윤리란 역사적 공동체의 윤리적 비전을 밝히고 그러한 비전을 교회 구성원들의 삶에 실현하는 일을 다루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윤리는 공동체 내부의 도덕 가치들을 연구한다는 점에서 체제 내적인 성격을 지닌다. 도덕적이라는 것은 특정한 역사적 공동체의 도덕적 비전을밝히고 그 도덕적 가치들을 수용하며, 그것들을 그 공동체 내에서 실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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