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 기독교/사회

종교의 두 얼굴 - 평화와 폭력 (박충구 지음, 홍성사 펴냄)

by 서음인 2019. 10. 24.

종교의 두 얼굴 - 평화와 폭력은 감신대 기독교윤리학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는 생명과 평화 연구소 소장으로 일하는 저자가, ‘기독교 평화사상에 관한 종합적 연구라는 주제 아래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로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서구 역사를 평화폭력이라는 관점에서 살핀 책이다. 저자는 평화와 폭력이라는 두 얼굴을 가진 종교의 역사는 실상 평화보다 평화라는 이름의 폭력이 지배한 역사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평화주의의 전통에 굳게 서 있었던 기독교 역시 콘스탄틴 황제의 공인 이후로는 정의로운 전쟁을 지지하면서 강자의 종교가 되기를 자처해 왔지만, 핵시대의 도래로 한순간에 인류가 멸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로는 '정의로운 전쟁'이 아닌 '정의로운 평화'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고 강조한다. 책의 내용을 요약한 후 간략한 단상을 덧붙인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패배가 곧 개인과 공동체의 처절한 몰락을 의미했던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는 전쟁과 폭력을 통해 상대방을 초토화시키고 피정복민에게 잔인한 보복을 가하는 것만이 평화를 얻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다가 전쟁으로 얻은 평화가 잠정적이고 불안한 것임을 깨달은 그들은 점차 합의에 의해 성립된 동맹 관계에 토대를 둔 협약적 평화인 에이레네를 추구했지만, 상대적으로 강한 도시국가들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드러내면서 결국 승자도 패자도 없는 동반 몰락의 운명을 맞고 말았다. 이후 지중해를 석권한 로마제국은 스토아주의의 이상에 따라 범세계적 문명국가 아래 모든 야만민족이 복속됨으로서 얻어지는 평화인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내세웠다이러한 '로마의 평화'는 제국에 상대적 자유와 안전을 가져다 주기도 했지만,  피정복민들의 철저한 패배와 굴종의 바탕위에 세워진 제국주의 정복자들만의 평화였을 뿐이다.

 

구약성서와 예수   구약성서에 담긴 샬롬 사상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에서 악업과 착취와 속임수가 없는 정직하고 공평하며 정의로운 상태를 의미하며, 인간의 수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계약의 정신에 따라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고 인애와 자비를 나눌 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자 축복이었다. 계약법전에 담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이사야서와 미가서에 나오는 메시아적 평화의 비전이야말로 이러한 구약성서 평화윤리의 핵심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윤리는 영광의 신학이 아닌 십자가의 신학에 기초하고지배윤리가 아닌 섬김의 윤리이며,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 서서 실천하는 사랑과 평화의 길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정치적으로는 철저한 비폭력 평화주의, 경제적으로는 비탐욕과 청빈의 윤리, 성적으로는 애욕에 메이지 않고 상대에 대한 깊은 존중에서 우러난 정결의 윤리,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 바탕을 둔 거룩의 윤리로 나타난다.

 

초대 교부들과 아우구스티누스   터툴리안이나 클레멘스 같은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산상수훈의 가르침에 따라 예수의 평화사상을 신실하게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오직 내적 평화만을 갈구했기에 부에 대한 탐욕이나 육체의 소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콘스탄틴 황제의 공인으로 로마제국의 국교로 변신한 기독교는 국가 안보를 위한 수단으로 제국의 군사주의를 수용했고 하나님의 평화를 국가의 평화와 동일시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완전한 평화는 하늘의 도성에 속할 뿐 불완전한 지상의 도성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악이 관영한 현실 속에서 정치권력과 군사적 힘에 의지하는 불완전한 평화를 선택했다. 그가 지상의 상대적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제시한 정당한 전쟁론은 전쟁에 윤리적 판단 범주를 부여함으로서 폭력성과 야만성을 줄이려는 시도였지만, 중세 시대 내내 성전론이나 종교재판 마녀사냥 같은 종교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거로 오용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종교개혁자들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독교 세계의 질서 안에서 조화와 일치를 통해 공동선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기독교적 평화(Pax Christi)의 핵심이며, 정부는 이러한 기독교적 평화에 역행하는 행동에 대해 법률과 전쟁을 포함하는 공적인 수단으로 징벌해 정의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당한 권위에 의해 수행되고, 불의한 집단이 원인을 제공하며, 평화를 지향하는 경우에만 '정당한 전쟁'으로 인정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그의 평화론은 기독교적 정의와 폭력에 의해 유지되는 '기독교 세계의 평화론'이라 할 수 있다. 루터는 신자의 내면생활은 교회가 이끌어 가지만 외적 평화는 칼을 가진 세속 정부의 자율성에 맡겨졌다는 두 왕국론을 주창했으며, 이는 불의한 권력에 대해서도 저항하지 말고 순종해야 한다는 수동적 정치윤리를 낳았다. 인간의 전적 부패를 강조한 칼뱅은 정부의 자율성을 영적 권한을 가진 교회 아래 복속시켰고, 하나님이 제정한 세속정부는 죄인인 인간을 다스려 사회적 평화를 지키려는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을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평화사상 역시 하나님의 평화가 아닌 세속 정부(루터)나 칼뱅주의(칼뱅)가 만든 사람의 평화였다.


역사적 평화교회    역사적 평화교회(historical peace church) 전통은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예수의 평화적 가르침을 폐기하거나 망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한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전개된 재세례파 신앙운동은 성직 계급을 부정하고 유아세례를 거부했으며초기의 종말론적 기대에서 발생한 폭력성을 극복한 후로는 무저항주의까지 수용하는 절대 평화주의의 원칙을 견지했다. 메노나이트 신학자인 요더에 따르면 예수는 비폭력 평화주의라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의식적으로 선택해 고난을 수용하고 십자가를 짊어졌으며,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비폭력 평화주의적인 삶으로 회심해야 한다. 18세기 영국의 교권적 형식주의에 반하여 형성된 퀘이커 신앙은 내면의 빛에 따라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인간은 권위나 제도의 예속으로 해방된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이며, 죄를 극복하고 일상 속에서 어린 양의 전쟁으로 불리는 비폭력 평화주의를 온전히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핵시대와 정의로운 평화    주류 교회의 전통적인 정당전쟁론은 일순간에 지구를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핵무기로 가득한 오늘날 이미 적실성을 상실했다. 전후에 나온 독일 교회의 평화문서는 핵무기와 전쟁을 통한 평화 모색은 기독교적인 방식이 될 수 없으며, 폭력과 억압을 동반한 모든 지배 세력을 극복하는 길에 섬으로서 평화운동의 과제를 실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가톨릭교회의 평화백서는 정당전쟁론과 핵 억지력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실제 핵을 이용한 군사적인 해결 방안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세계교회협의회는 민족, 국가, 이념, 진영 논리에 빠져버린 정의로운 전쟁이론을 폐기하고, 평화는 정의 없이 실현될 수 없다는 정의로운 평화를 기독교 평화운동의 새로운 방향으로 제시했다. 이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평화 사역이 단순한 정치적 평화만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 집단과 국가, 그리고 동료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폭력을 비폭력적 방식으로 제거하는 평화운동으로까지 그 지평이 확장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평화주의와 정당한 전쟁론은 오래고 치열한 논쟁의 역사를 가진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며, 기독교 세계에 속했던 서방의 주류교회는 오랫 동안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와 라인홀트 니버로 이어지는 '정당한 전쟁론' 또는 '기독교 현실주의'의 입장에 서 왔다. 그러나 핵시대를 맞아 핵전쟁으로 인한 공멸의 위협에 대해 책임 있는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정당전쟁론이 설득력을 잃으면서, 서구에서는 교회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온전한 비폭력 평화주의의 길에 서는 것뿐이라는 견해가 소종파뿐 아니라 주류교회까지 점차 확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생명을 파괴할 수 있는 핵무기라는 '절대악'의 존재가 아이러니하게도 주류교회로 하여금 2000년의 긴 방황 끝에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가르침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간 독재정권의 '병역척결의지'와 보수 기독교의 '이단척결의지'가 절묘하게 결합해 기독교 평화주의와 이에 따른 양심에 의한 병역거부권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탄압해 왔던 우리나라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한 사회적 신학적 토론이 활발하게 일어나기를 소망해 본다. 개인적으로는 평화주의자들의 신념과 고난을 존중하지만, 아직까지 어떤 편에 서야 할지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