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 기독교/사회

예수의 평화 영성 (존 디어 지음, 김준우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펴냄)

by 서음인 2017. 6. 16.

『예수의 평화영성』은 예수회 소속 사제로 2008년 데스몬드 투투 주교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한 평화운동가인 존 디어(John Dear, 1959~ ) 신부가 1992년 반전 · 반핵시위로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함께 수감됐던 동료들과 복음서를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써낸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치열한 실천의 경험과 깊이 있는 묵상에 성서신학적 통찰을 더해 세례에서부터 부활 후 엠마오에서의 현현에 이르기까지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의 주요 장면들을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풀어낸다.

이 책에서 그가 反제국 - 非폭력이라는 화두를 집요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철저하고 일관되게 복음서에 적용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예수는, 폭력과 죽임의 문화로 물든 제국의 세력에 맞서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며, 철저한 비폭력의 길을 고수하면서 당대의 정치 · 종교적 기득권 체제에 저항하다 제국의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 그의 제자들을 폭력과 전쟁의 세력에 맞서는 적극적인 비폭력 저항이라는 하나님의 특명을 받은 대사들로 세상에 보내시는 분이다. 평생 평화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고난과 핍박의 가시밭길을 걸으며 그분과 깊이 교제해 온 사람만이 이렇게 생생하고 구체적이며 설득력 있는 예수의 초상을 그려 낼 수 있으리라. 우리가 저자의 생각에 100% 동의해야 할 이유는 없겠지만, 복음서를 진지하게 읽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존 디어 신부가 만났고 증언하는 “평화의 메시야로 오신” 이 예수를 무시하거나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혹시 이 책에서 존 디어 신부가 그려 낸 예수의 모습이 불편한 분이 계시다면(사실은 나이가 들면서 지킬 것이 꽤 생겨버린 나도 그 예수가 매우 불편하다),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그렇다면 당신의 예수는 누구인가? 당신이 진짜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 예수는 혹시 존 디어가 이 책에서 그렇게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서구의 예수, 제국의 예수, 백인의 예수, 남성의 예수, 주류의 예수, 맘몬의 예수, 폭력과 착취를 옹호하는 예수는 아닌가? 그래서 당신의 예수가 이명박과 트럼프가 믿는 예수, 이명박과 트럼프를 닮아 있는 예수인 것은 아닌가? 그런 예수를 섬기는 당신은 혹시 “황색 피부에 하얀 가면을 쓰고 하얀 마음”을 지닌 채 큰 바다 너머에 있는 정신적 고향을 평생 흠모하며 이 땅에서는 단지 ‘나그네와 거류민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본문 엿보기


세례 예수는 세례를 받은 후 모든 순간을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으로서 살아갔다. 그의 이런 자기이해는 마음을 모아 고요하고 친밀하게 기도를 드리는 일,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정의와 평화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일. 한결같이 비폭력의 길을 고수하는 일, 하느님의 비폭력적인 사랑을 부인하거나 거부하는 모든 것에 대해 저항하는 일, 죽는 순간까지 하느님을 신뢰하는 일과 연관되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 中)

제자도 처음 3세기 동안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죽음을 보증하는 것이었으며, 이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고백한 것 때문에 살해당하곤 했다. 세례 자체가 제국의 권위에 대한 비폭력 시민불복종 행동이었다. 실제로, 새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곧바로 로마 군인들에 의해 처형되곤 했다 ...... 본회퍼는 우리 시대를 위한 그리스도교인의 소명을 “값비싼 제자직”(costly discipleship)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서 지불해야 하는 비용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 참된 제자가 되지 못한 것이라고, 그는 처형되기 직전에 썼다 ..... 복음서에 따르면, (오늘날)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정의를 요구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을 추구하며, 병든 사람들과 옥에 갇힌 사람들을 찾아보고, 죽음의 우상을 타파하며, 군사주의에 저항하고, 소비주의를 배격하며, 공동체를 건설하며, 칼을 녹여 보습으로 바꾸며, 평화의 하느님을 예배할 것을 요구한다. 만일 우리가 이런 사회적 실천을 감당하기 위해 애쓴다면, 우리는 제자직의 날카로운 가시를 느끼게 될 것이며 복음이 생생하게 살아나게 될 것이다. (제자들을 부르다 中)

오병이어 오병이어의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자기중심적인 정신상태에서 벗어나,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심지어 우리 먹을 것을 나눌 정도까지 서로를 배려하라고 초청한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우리의 식량을 정의롭게 재분배하라고 명령한 것으로서, 이 명령은 교회로 하여금 세상의 굶주림을 없애라고 강력하게 요청하는 명령이다. 예수는 또한 인간적인 유대를 맺을 수 있는 작은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우리가 서로 인간답게 되기를 요청한다 ..... 문자주의적 해석 때문에 우리는 이 기적 이야기를 오랜 옛날 예수가 이 세상을 걸어다녔을 적에 단 한번 일어났었던 사건으로 쉽게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작은 신앙 공동체에 참여하여 우리의 음식과 자원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때, 상당히 많은 음식이 마련될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군중들의 적대적인 표정도 바뀌게 되어, 갑자가 우리의 신앙과 생활을 나눌 새로운 친구들이 생기게 되는 것을 경험함으로써 그 기적 이야기를 오늘도 경험할 수 있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中)

착한 사마리아 사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그 율법학자는 예수에게 물었다. 예수가 비유로 대답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섬뜩한 무관심의 모습과 빛나는 연민의 모습을 대조시키고 있다. ...... (사마리아 사람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과는 달리,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고 길 건너편으로 지나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통당하는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았고, 이런 인간적인 만남을 통해 그는 그 희생자의 인간성과 존엄성을 깨달았다. 아마도 사마리아 사람이 그 고통 중에 있는 희생자와 자기를 동일시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도 역시 폭력의 희생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예수는 우리들이 폭력의 희생자들에게 한 사람씩 손을 뻗치기를 원한다. 그런 사랑은 성 프란체스코와 마더 테레사와 같은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사랑이라고 미리 꽁무니 빼지 말고, 우리 모두 그런 친절함을 살아내기를 예수는 원한다. 예수는 이 비유에서 그 미움 받던 원수 사마리아 사람을 자비로운 이웃으로 묘사함으로써, 예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은 흔히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우리의 원수들이라는 사실을 암시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中)

돌을 치워라 예수는 가슴에 메어 울었다. 이 놀라운 이야기에 대해 우리가 배운 것과는 전혀 반대로, 예수가 운 것은 라자로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운 것은 그 장면에 등장하는 모두, 곧 제자들, 종교인들, 심지어 그가 사랑하는 친구들인 마르타와 마리아까지,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들도 생명의 하느님(the God of Life)를 믿지 않고 죽음의 문화(the culture of death)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그의 친구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신앙과 희망의 마지막 방울까지 사라졌기 때문에 울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때때로, “주님, 죄송합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힘을 쓰셨지만, 그러나 결국 죽음이 이겼습니다” 하고 말한다 ..... 그러나 예수의 음성은 그 세 가지 새로운 계명이 되어 역사 속을 관통해서 들려오고 있다. 돌을 치워라. 너의 무덤에서 나오너라,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어 자유롭게 가도록 하라. 다시 말해서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죽임의 문화에 맞설 수 있도록 불러낸 다음 이렇게 말하도록 만든다. “더 이상 절망은 없다. 더 이상 불의는 없다. 더 이상 폭력은 없다. 더 이상 사형판결은 없다. 더 이상 성차별은 없다. 더 이상 인종차별은 없다. 더 이상 동성애자에 대한 증오는 없다. 더 이상 노숙자는 없다. 더 이상 소비주의는 없다. 더 이상 탐욕은 없다. 더 이상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계약은 없다. 더 이상 펜타곤은 없다. 더 이상 CIA는 없다. 더 이상 히로시마는 없다. 더 이상 전쟁은 없다. 더 이상 핵무기는 없다. 더 이상 조직적인 학살체계를 통해 법적으로 이윤을 뽑아먹는 대기업은 없다“라고. (돌을 치워라 中)

성만찬 예수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줄 때 그는 계약의 갱신을 말하면서 그것을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라고 불렀다. 로메로 대주교처럼 우리도 주님의 식탁에 초대받았으며, 그의 몸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며 그의 삶에 동참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에 속하도록 초대받는다. 그리스도의 피로 맺는 계약을 지키는 사람들로서 우리도 서로를 위해 그리고 인류를 위해 우리의 몸과 피와 가슴과 삶 전체를 드려야 한다. 예수와 로메로 대주교와 수많은 순교자들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우리 자신의 피를 흘리게 되기를 원한다. 다른 사람을 십자가에 매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십자가를 지기를 원한다,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죽기를 원한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이 땅 위에 지금 여기에 오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우리 자신을 헌신하고, 더 이상 사람들의 육체가 찢어지지 않고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게 될 날이 오도록 우리를 바치려 한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비폭력의 계약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빵과 포도주 中)

게쎄마네 “여기 앉아 있어라, 떠나지 말고 여기에 머물러 있어라. 깨어 있어라.” 비록 예수는 그 친구들이 자기를 버리고 도망칠 것임을 미리 예상했지만, 여전히 그는 자신의 영혼의 깊은 밤을 지나가도록 도와줄 친구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과연 누가 그처럼 엄청난 고통과 슬픔 곁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는가? 분명히 제자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잠들어버렸기 때문이다. ..... 우리가 그 제자들을 나무랄 수 없는 이유는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의 곤경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대부분은 안락하게 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누군가 현실의 고통으로 인해 극심한 심적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으며 그 곁에 머물러 마음을 다해 함께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이 제국의 공포에 몸을 떨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깊이 잠들어 있다. (게쎄마네 中)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꽃아라 내가 예수의 제자들에 대해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나 자신이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부들, 주교들, 신학자들, 추기경들과 교황들, 그리고 모든 수도자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주님, 저희가 칼로 쳐버릴까요?”하고 묻고 있다. 전쟁이 벌어지거나 혁명이 시작되거나 폭력의 위협을 받게 될 때, 우리는 “주님, 우리가 칼로 쳐버릴까요?”라고 외치면서, 그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늘날 미국인들에게는 단 하나의 대답일 있을 따름이다. “그래라!(yes!)."우리는 칼로 쳐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훨씬 더 잔혹한 짓을 벌인다. 단 한 번의 번쩍이는 섬광으로 나라 전체를 파멸시키고 수십만 명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다 ........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이 말씀은 제자들이 도망치기 전에 예수로부터 들었던 마지막 말씀이며 분명한 책망이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 있었다면, 바로 이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분명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예수의 제자들은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은 죽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위협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폭력을 사용하여 폭력적 범죄를 ”억제“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왜 그런가?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기 때문이다. 폭력은 폭력을 낳기 때문이다. 학살은 학살을 낳고, 핵무기는 더 많은 핵무기를 낳고, 죽임은 죽임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가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에 폭력적인 보복을 금지시켰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中)

십자가에서의 절규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의 마지막 숨을 마지막 저항행동으로 사용했다. 그는 마지막 안간힘을 써서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조용히 마지막 숨을 내쉬고 죽는 대신에, 그는 “큰 소리”를 터뜨렸다. 그 몸의 모든 기운이 그 마지막 부르짖음과 함께 터져 나왔다 ........ 예수의 절규에서 나는 인류 역사상 가난하고 짓밟힌 사람들의 절규를 듣는다. 그의 절규 속에서 나는 불의와 전쟁과 제국의 모든 희생자들의 절규를 듣는다. 예수의 절규 속에서 나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런 현실에 대해 눈을 뜨도록 애원하시며, 그 미친 폭력을 거절하고, 그 비인간성을 회개하라고,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애원하시는 소리를 듣는다. 누가 그 절규를 들을 것인가? ...... 큰 부르짖음은 계속된다. 이제부터 우리는 크게 부르짖는 사람들, 비폭력의 사람들, 죽임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살육은 끝나야만 한다. 폭력은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그의 몸에서, 그리고 지금 우리의 몸에서 모든 폭력은 멈추어야만 한다. (크게 부르짖는 소리 中)

부활 나는 예수가 부활해서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올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좀체 믿기지 않는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했으며, 모른다고 부인했고, 내버리고 도망쳤다. 그리고 예수는 처형당했다. 모든 친구들은 그가 혼자 죽임을 당하도록 내버려두고 도망쳤는데, 만일 우리가 친구들로부터 그런 버림을 받았다면 그 친구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상처받고 분노하며 원망할 것이다. 두 번 아시 그런 친구들은 꼴도 보기 싫어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다시 찾아와서 우리를 용서하며 그의 공동체를 이루라고 요청하며, 자신의 상처를 만져보라고 친밀히 초대하며, 하느님 자신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예수는 계속해서 되돌아오며, 사람들과 평화를 만들어나가는 일을 계속한다 .....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고 싶다면, 제자들처럼 우리들 역시 갈릴래아로 돌아가서 그 이야기를 우리 자신이 살아내야 한다. 이제는 우리가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차례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처럼 오늘날의 가난에 찌든 갈릴래아로 가서, 제국의 당국자들과 예루살렘의 제도화된 불의와 대결한 후, 비폭력의 길을 따라 십자가로 나아갈 차례인 것이다. 그 길을 가는 동안 우리는 부활한 예수를 만나게 되며 그 부활 이야기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부활한 예수를 우리의 주님이며 구원자로 예배하게 된다. (부활 中)

엠마오로 가는 길 오늘날과 같은 도덕적 혼란과 영적인 암흑시기에, 누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겠는가? 우리는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보지 않는다. 우리는 정부의 군사주의에 압도당하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억압, 다국적 기업들에 대한 보호, 이 세상에서 굶어죽는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 폭군들에게 무기를 판매하는 짓, 독재자들에게 뒷돈을 대주는 짓, 계속되는 환경파괴, 교육비와 의료보장 그리고 직업훈련과 주거비를 계속 삭감하는 짓에 신물이 난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원하지만,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했다. 우리는 절망의 문화에 세뇌되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며, 비폭력은 아무런 효과도 없으며,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은 우리가 몸 바칠 가치가 없다고 믿는다 ..... 그러나 부활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고 촉구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구원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비폭력을 통한 사회변화의 역사, 즉 노예제 폐지론자들, 민권 운동가들, 반전 운동의 역사를 기억하도록 도와주신다. 그분은 십자가의 지혜에 호소하며 우리가 그분을 따라 부활의 영광에 이르도록 초대하신다. 우리가 희망의 새로운 소식을 듣고, 그 비전을 지닌 낯선 사람을 우리의 식탁에 환영하고 함께 식사를 나눌 때, 우리의 가슴은 흥분으로 타오르게 되며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비폭력 저항의 공동체로 되돌아가 그의 평화운동을 이어가게 된다. (엠마오로 가는 길 中)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