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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사회

그리스도와 폭력 (로널드 사이더 지음, 전남식 옮김, 대장간 펴냄)

by 서음인 2016. 12. 9.

1. 크리스챠니티 투데이가 20세기 종교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100권의 책 중 하나로 선정했고 지난 50년간 복음주의자들에게 가장 영향을 미친 책 7위에 뽑히기도 했던 명저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몇 권의 저서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메노나이트 신학자 로널드 사이더는 이 책에서 2000년 기독교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주제 중 하나였던 기독교와 폭력의 문제를 다룬다. 그는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의 모습을 재조명함으로서 폭력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따라야 할 참된 평화의 길이 무엇인지 탐구한다.

2. 예수는 제국주의자들의 폭력과 압제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유대들인의 무장봉기가 반복되던 격동의 시대를 살았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가 전한 메시지와 행동은 희년이라는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비전이 포함된 메시야 시대,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가 예수의 생애와 사역 가운데 개막되기 시작했다는 선언이었다. 이를 위해 예수가 선택한 길은 메시아가 희년을 시작할 때 기대되는 급진적인 사회 경제적 혁신의 삶을 온 몸으로 살아내는 것이었으며, 폭력적 검(violent sword)이 아닌 고난 받는 종(suffering servanthood)의 모습으로 - 비폭력의 방식으로 - 자신의 메시아 왕국을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에 유행하던 혁명과 폭력으로 이루어지는 메시아 왕국을 ‘급진적으로’ 거부했으며, 이러한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웃사랑의 가르침을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제한된 범주를 넘어 이방인과 원수에게까지, 그리고 사적 영역 뿐 아니라 공적 영역에까지 확장해야 했다!

 

3. 이러한 급진적인 삶은 예수를 십자가 처형으로 이끌었으며, 예수는 이 십자가 사건을 죄인들을 위한 대속적 죽음과 화해로 이해했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라는 선언이자, 예수가 가져온 새 시대가 옛 시대로 침투해 들어왔다는 결정적 증거였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 명령의 확고한 기반이자, 그리스도인들이 비폭력에 헌신해야 하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원수와의 화해를 이루셨다면, 그리스도를 따르기 원하는 사람들이 그와 다른 방식으로 원수들을 대우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는 예수께서 원수 사랑의 길을 실천하신 곳이며, 이 가르침은 개인이든 가족이든 교회든 국가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불의한 권력이나 억압적 현실을 피동적으로 수용하거나 묵인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원수와 친구라는 옛 시대의 범주를 넘어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비폭력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이러한 비폭력과 원수 사랑의 길은 불의한 현실에 대해 물리적 폭력이나 비폭력적 강제력의 사용을 포함한 어떠한 형태의 저항에도 반대하는 정적주의적 무저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시민 불복종이라는 극적인 행동을 통해 악에 저항했던 예수를 따라 적극적 비폭력이라는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는 삶의 길이다. 인간은 창조주에게 반응하는 자율적이고 윤리적인 행위자로서 타자를 사랑하고 존경하게 만드는 형태의 강제력과 그렇지 않은 형태의 강제력을 구분할 수 있으며, “아니오”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고 유지할 수 있는 심리적 · 사회적 · 경제적 강제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불복종이나 평화시위, 불매운동과 같은 강제력을 행사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 책임 있는 자율적 · 도덕적 행위자로서 타자에게 회개하고 변화를 선택해야 한다고 호소할 수 있으며, “사랑”이야말로 이러한 강제력의 목표(goal)이자 목적(end)이 되어야 한다.

 

5. 인간사회에 영향을 주는 사회 정치적 구조와 그 이면에 놓여 있는 영적 세력을 함께 지칭하는 ‘정사’와 ‘권세’는 원래 선한 창조질서의 일부였으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인간에게 숭배를 요구하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요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되었다. 그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세상에서 왕노릇하던 ‘정사’와 권세‘를 폐위하고 무장해제 시켜 다시금 그리스도의 권세에 복종하게 만들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정사‘와 권세’에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하면서 그들 - 정사와 권세 -의 영역에 속한 자비로운 비폭력의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로마서 13장의 통치 아래 있다(to be subject)는 말은 복종하다(obey)와 동의어가 아니며, 정부에 대한 복종은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적극적인 비폭력 저항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정치적 압력단체 · 유권자의 힘 · 경제적 불매운동 · 정치적 시위 · 시민 불복종 · 세금 거부 · 총체적인 비협조와 같은 적극적 저항에 참여하면서도, ① 비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한 ② 압제자를 원수로 여기지 않는 한 ③ 저항으로 말미암아 부과된 형벌을 정중하게 받아들이는 한 여전히 정부의 '통치 아래' 있을 수 있다.

 

6. 자끄 엘륄은 불공평한 경제 체제가 사납게 돌진하는 군대만큼 폭력적이라고 일갈했으며,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풍요는 제3세계를 배고프게 만드는 불공평한 경제구조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성서의 하나님은 구조적인 악을 통해 자행되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합법적인 억압과 그에 편승하여 이익을 얻는 특권층들,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가난한 나라에 불리하도록 국제무역질서를 조작하는 선진국들, 그리고 비재생성 천연자원을 소비하는 행위를 통해 구조적 폭력에 가담하는 선진국의 소비자들을 비난하신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1) 개인들은 누진 십일조와 같은 방식을 통해 단순한 생활양식(simple life)을 영위해야 하고 (2) 교회는 정서적 재정적 영적으로 무조건적인 도움과 무한책임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3) 세속 사회 속에서는 정부에게 가난한 나라와 정의의 편에 서는 외교 정책을 펼치도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

 

7.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들이 비폭력 저항이라는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이유는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세가 우리의 소심하고 두려워하는 성품을 관통하고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 부활의 권세 안에 머물 수 있다면 우리는 담대하게 이 땅의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 서서 고귀하게 억압자들에게 맞설 수 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믿음은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음을 망각하는 순진한 낙관주의가 아니며, 우리 소망의 절정인 부활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뢰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

 

8.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촉발된 한국사회의 거대한 격랑을 견인하고 있는 촛불집회와 관련해 다시금 ‘폭력’의 문제가 논란의 중심에 떠오르고 있다. 촛불집회가 지나치게 “비폭력”이라는 기득권의 프레임에 갇힌 나머지, “저항”과 “변혁”이라는 시위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도에 의거한 철저한 비폭력을 주장하면서도 메노나이트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정적주의와 종파주의의 함정에 갇히지 않고 불의한 권세에 대한 적극적인 비폭력 저항을 강조하는 로널드 사이더의 생각은, 그의 주장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남긴다. 론 사이더의 말이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예수가 비폭력이 항상 그리고 즉각적으로 원수를 친구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사랑의 비폭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십자가는 원수 사랑이 항상 효과가 있다거나, 혹은 적어도 단기간에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냉정할 정도로 상기시켜 준다 ..... 바폭력(저항)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며 따라서 그분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처럼 행동해야 한다.”


P.S. 오늘은 국회의 탄핵표결이 있는 날이다. 지난 6주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집회라는 거대한 비폭력 저항의 물결이 해방 후 70년간 쌓여온 이 땅의 구악과 적폐를 말끔히 일소하는 위대한 시민혁명으로 열매맺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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