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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사회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있었다 (크리스치안 퓌러 지음, 최용준 옮김, 예영 펴냄)

by 서음인 2016. 12. 27.

1.『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있었다』는 독일의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 교회의 평화 기도회를 이끈 크리스치안 퓌러(Christian Führer, 1943〜2014) 목사의 자서전이다. 저자는 동독과 서독에 핵미사일이 배치되는 것에 반대하기 위해 1982년부터 “겨자씨만큼이나 작게” 시작된 정의 ‧ 평화 ‧ 창조질서의 보존을 위한 평화 기도회를, 하나님께서 40년간이나 지속되었던 동독의 공산주의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쓰시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평화혁명은 교회에서 수년간 설교한 산상수훈에 있는 예수님의 비폭력 정신에서 나온 것이며, 교회에서부터 나온 비폭력적 행동 강령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결과 거리에서 행동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단언한다. 저자는 시대의 증인으로 “오직 은혜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이 기적”을 증언할 책임을 느꼈으며, 이 책에 “성공 신화가 아닌 고향, 가족, 그리고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길로 나를 인도하는 데 불가분리적으로 함께 했던 모든 사람들의 신앙 이야기”를 담았다고 말한다.


 2. 이 멋지고 아름다운 고백을 읽어 보면 저자인 퓌러 목사는 독일의 통일을 위한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가는 운동가이기 이전에 자신에게 맡겨진 교회의 성도들을 열심히 돌보고, 상담과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열려 있으며, “가난한 자와 장애인이 조롱받고 모욕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모욕받고 조롱받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는” 신실한 목회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일차적으로 성전이 아닌 길거리와 광장에서 예배의 언어가 아닌 현장의 언어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분이라고 믿으며 非그리스도인들에게도 교회와 기도회를 기꺼이 개방했던 열린 신앙인이자, 나치치하와 사회주의 동독 그리고 통일 독일의 자본주의 체제를 거치는 격동의 시기를 살아가면서 신앙을 위협하는 다양한 형태의 핍박과 유혹을 겪었음에도 타협 없이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며 평화의 사도로 살아간 그리스도의 제자이기도 했다.

 

3. 아직 완결되지는 않았지만 연인원으로 1000만에 가까운 시민들이 참여한 놀라운 평화혁명을 이뤄 낸 우리의 현 상황에서 보자면, 솔직히 이 책에 나오는 평화 기도회의 ‘기적’ 자체가 그렇게 놀랍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고 말해야겠다. (물론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교회가 핍박받던 경직된 사회주의 체제였음을 기억한다면 정말 대단한 일인 것이 맞다) 이 책을 읽으며 정말로 인상적이고 부러웠던 일은 억압적인 당대의 현실 속에서 사람들이 “자유와 희망의 공기”를 마실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가 바로 교회였다는 것과, 첨예한 냉전의 최전선이었던 사회주의 동독에서조차 교회 내에서만큼은 강력한 평화주의(pacifism)의 전통이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1989년 10월의 위대한 평화혁명이 정의와 평화, 창조질서의 보존을 비전으로 삼고 꾸준히 기도하고 행동해왔던 한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촛불보다는 태극기를, 평화보다는 무기를 훨씬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의 보수교회가 과연 그렇게 될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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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말할 때 예배당에서 세상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길거리와 광장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했다. 사람들이 삶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바로 그 현장에서 말씀하셨으며, 예배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셨다. 나는 세상에서 행하기를 원했고 예수님 말씀처럼 세상 한가운데 있기를 원했다. 예수님도 사람들 가운데 있었고 성전 안에만 계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늘 부딪히는 것을 감수했다. 심지어 학생 식당에서 기도하는 것조차도 주목을 받았다 ........ 사람들은 항상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분명한 신학적 대답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모두 나에게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은 좀 더 복잡하게 된다. 대답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살려고 애쓰는 바깥 거리이며 광장이고 집안이다. 또한 억눌린 자와 모욕당하는 자들, 창녀들과 세리들, 구석으로 몰린 자들이 있는 그곳에 교회도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런 방향을 향해 출발하게 되면 우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훨씬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예수가 있었던 곳 또 행했던 곳을 향해 나아오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충분히 교회로 모이고 있다.

 

평화 기도회 나는 옛날부터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으로 무기와 전쟁을 대항할 수 있는 기회를 찾고 있었다. 말 뿐만 아니라 행동도 수반하는 그런 효과적인 방법 말이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표현한 “한 의인의 기도와 행동”대로 말이다. 평화의 애도기간이 이러한 시위를 구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기도 기간은 원래 교회 구성원들에게 평화 문제에 대한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처음으로 네덜란드에서 도입되었고, 동서독에서도 1980년 이러한 아이디어를 수용하게 되었다. 평화 기도회는 매년 가을, 열흘 동안 독특한 방식으로 성찰, 기도, 신호가 될 만한 행동들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평화를 지향하고, 군비 증강을 반대하며, 군사적 행위 및 사고에 반대하는 시위를 한다. 동독에 거주하고 있던 우리는 특히 동독 학교교육에서 사고의 군국화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 평화 기도회는 어떤 콘셉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한 걸을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원칙이라면 개인 또는 사회, 지역 또는 세계적인 어려움들을 하나님 앞에 기도로 가져오고 사람들에게도 알리는 것이다. 당시 정치 상황은 매우 불안했다. ‘사람들이 정신병자같이 앞으로 계속 군비를 확장한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불안을 표현했다. ‘소련은 경우에 따라서는 날아오는 야생 거위 떼를 보고도 붉은 단추를 누를 것’이라고 했다.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의 생명과 직결된 이 문제를 동독에서는 교회가 걱정했다. 누가 이 일을 또 하겠으며 할 수 있겠는가!

 

자유의 장소, 교회 1 (총명하고 신념에 찬 공산주의자였던) 두 학생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을 교회로 모을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 나는 계속 말했다. “청년들을 얻고자 한다면 그들을 참여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통지, 명령 그리고 규정만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떻게 누가 중요한가, 좋고 나쁜 것이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생각을 말하고 청년들도 언제든지 나와 같은 권리를 가집니다. 완전히 상반되는 두 가지 견해가 충돌할 때면 정말 격렬한 토론이 이루어집니다. 물론 녹음을 하는 것도 아니요 카메라로 촬영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토론장을 떠날 때는 이전과 똑같은 사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이봐, 어떻게 그런 토론을 할 수 있지?”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 교회는 바로 자유의 장소였다. 여기서 너는 너라는 한 인간이다. 어느 누구도 너를 중단시킬 수 없다.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너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무도 네가 다른 사람과 같은 의견을 가져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발표한다.

 

자유의 장소, 교회 2 사람들은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어느 날부터 “우리가 국민이다”라고 외쳤으나 동독에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우리는 대체 누구인가 (바로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호모 사피엔스 에렉투스인가? 아니면 당의 통제 하에 있는 어리석은 군중들인가? 경찰은 과연 누구를 위해 있는 것인가? 10월 9일 사람들은 어디에 국민들이 서 있는지, 누가 국민인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자의식을 깨닫게 한 것이었다. 제단과 거리는 짝을 이루고 있었으며 함께 첫 열매를 거둔 것이었다. 이러한 자아의식이 없었다면 요동하는 사람들은 결코 목숨을 걸고 시위를 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변화를 위한 용기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모두 옛날 것에 그대로 안주했을 것이다. 예수에게서 비롯된 비폭력, 교회에서 비롯된 비폭력, 이것이야말로 평화 혁명의 첫 걸음이었다.

 

교회의 갱신 독일 제국 시대에는 서민 교회들의 몰지각한 자동화로 인해 교회의 신도 수가 상당히 높아진 바 있다. 당시 교회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주고 입교시켰으며 가족 중 최소 한 사람이라도 예배에 참석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이런 조치들은 엄청난 통계수치들을 산출해 내었지만, 동시에 사회의 진정된 상황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만들었다 ..... 1950년 동독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개혁이 시작되고 있었다. 교회가 스스로 갱신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이미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길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부로부터 무신론적인 국가를 통해 하나님은 안전을 보장받으며 잠자는 교회를 일깨웠던 것이다. 하나님은 주님의 포도나무 가지를 사정없이 흔들어 썩은 열매들과 죽은 가지들이 떨어져 나가도록 하셨다. 그러자 엄청나게 많던 교회 신도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리하여 진정 예수와 관계있는 사람들만 교회에 남게 되었다 .... 국가가 자신의 세계관 이외의 것을 완전히 거부함으로서 무신론적인 세계관을 가진 국가가 - 일부러 원한 것은 아니었으나 - 오히려 교회를 다시 깨어나게 했다. 교회는 그때부터 교회의 회복을 위해 오직 의지해야 할 한 분, 즉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집중했던 것이다. 동독의 40년 시간은 실제로 40년간의 신앙 훈련 기간이었다.

 

촛불과 비폭력 그들은 손에 초를 들고 있었다. 초를 들기 위해서는 두 손이 필요했다. 한 손은 초를 들고 한 손은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바람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돌을 든다든지 몽둥이를 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초를 든다는 것은 동시에 비폭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서서히 행렬은 시내를 관통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두려움과 희망을 가지고 .....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폭력을 거부한 예수의 영이 대중들의 마음을 붙잡아 주어 평화로운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근처에 있던 제복을 입은 사람들, 즉 군인들, 전투부대, 경찰관들을 모두 대화로 이끌어 들였다 ...... 동독 인민회의 호르트스 진더만 의장은 1989년 10월 9일을 회상하며 “우리는 모든 것을 계획했다. 그리고 모든 상황에 대해 준비되어 있었다, 단지 촛불과 기도에 대해서만 제외하고”라고 말했다. 평화 기도회에서 내가 계속 말한 것은 “비폭력을 거리로, 광장으로 가지고 나가자. 저 바깥세상 그곳이 바로 비폭력이 보존되어야 하는 장소”라는 것이었다.

 

제자의 삶 당원들은 우리들의 전략을 도무지 알 수 없기에 매우 혼란스러워 했다. 여기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 예수는 그들을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가능한 이유들을 찾았으나 내게 가장 중요한 분 그리고 내가 공개적으로 말하는 ‘예수의 뜻대로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 무엇보다도 현 상황에 비추어 숙고해 보아야 하는 것은 어떤 체제도 성스러운 것으로 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체제는 스스로 제거할 수 없는 시스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오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영향을 불어넣어 주어야하는 것이다. 모든 시스템은 예수님의 뜻에 비추어 인간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누가 그렇게 해야 하는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예수는 말하고 있다. “여러분이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 교회의 외관

성 니콜라이 교회의 내부

독일 통일의 도화선이 됐던 1989년 라이프치히의 평화 시위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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