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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사회

기도와 정치 - 주기도문 강해 (얀 밀리치 로호만 지음, 대한기독교서회 펴냄)

by 서음인 2016. 6. 2.

이 책은 바젤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였고 WCC 중앙위원과 세계개혁교회연맹의 신학위원장을 역임했던 체코 출신의 개혁신학자 얀 밀리치 로호만의 주기도문 강해서이다. “철저하게 전통적이고 철저하게 현대적이며, 철저하게 복음적이면서 철저하게 사회적이며, 철저하게 신학적이면서도 철저하게 윤리적인” 저자 로호만의 진면목을 잘 엿볼 수 있는 책이다. 과거의 신학적 전통과 진지하게 대화하면서 당대의 현실과도 치열하게 대결하는 신학, 과연 우리에게는 불가능한가?

 

서론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의 곤경이라는 삶의 자리(Sitz im Leben) 에 처한 인간의 심령의 운동이자 정의를 위한 행동이다. 행위 없는 기도는 무관심과 무책임을 가리기 위한 변명이며, 기도의 지평이 없는 행동주의는 신앙을 하나님과의 거래로 격하시킨다. 성경의 실천과 기도는 경건을 실천하는 인간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으며 기도하도록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다. 영적 자유의 이정표이자 전체 복음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주님의 기도는 개인적, 영적 차원을 넘어 우리를 더 넓고 개방된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으로 인도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 기도의 대상인 ‘아버지’ 하나님은 신화적 사건이 아닌 역사 내에서의 능력있는 구원행동을 통해서 자신의 백성에게 알려지신 하나님이자, ‘하늘’로 표상되는 절대적인 우월성에도 불구하고 친히 인간이 되신 비가부장적-비권위적인 사랑과 신뢰의 하나님이시다. 또한 그분은 기도를 사적 용도로만 제한하는 것을 거부하시고 도움이 필요한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우리의 이웃이자 동료로 세우시는 ‘우리’ 하나님이시다. 주기도문은 모든 사회정의 운동의 가장 심오한 토대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간구는 흙으로 돌아갈 필연성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유 사이의 딜레마에 갇혀있는 인간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지배적 세계관이 요구하는 필연성의 신을 거부하고, 인간에게 자유를 주고 보전하시는 성서의 하나님을 요청하는 기도다. 하나님이 이름을 가지시고 우리에게 알리시며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 허용되는 한, 우리의 이름도 익명성 속에서 구출되어 고유한 존엄과 타당성을 갖게 되며, 자신의 이름을 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된 자유 아래서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끊임없이 모독당하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간구는 우리를 공허에 저항하는 투쟁에 나서게 한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

 

나라이 임하옵시며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성육화되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역사 내에서 선취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는 영적인 축복을 바라는 불안한 심령의 구걸이 아니고 이 세상 가운데서 정의, 평화, 기쁨의 그 나라를 위해 고난받고 투쟁하는 공동체의 간구다.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장 적절한 응답은 회개에로의 돌이킴과 믿음에의 소명이며 이는 나의 왕국, 인간의 나라가 사라지기를 간구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전망을 붙들고 현재의 상황을 하나님의 약속과 끈질기게 대결시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며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이는 기도와 행동으로 세상과 하나님을 다 같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우리의 소망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기를 바라는 이 간구는 숙명론에의 굴복이나 종교적 굴종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실행하도록 격려한다. 또한 이 기도는 하늘과 땅을 포괄하는 피조물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종교’의 영역에만 국한시키려는 시도에 저항하여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종말론적 구원의 능력이 오늘 우리 삶의 모든 영역과 피조계 전체에게까지 나타나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예수님의 결단인 십자가는 수동적 복종인 동시에 적극적 저항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모든 의지를 철저히 폐기하고 오직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고통스러운 ‘저항과 복종’을 요구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인간이 처한 곤경의 상징인 빵에 대한 간구는 죄, 유혹, 악과 같은 종교적 주제들보다 앞쪽 주기도문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따라서 교회의 행동과 기도의 중심에 속한다. 우리가 구해야 할 일용할 양식은 탐욕과 축적을 위해서가 아닌 오직 우리에게 위임된 ‘오늘’의 시점만을 위한 양식이며, 내것이 아닌 이웃과 함께 나눠야 하는 ‘우리’ 의 양식이기에, 빵을 나누는 분배정의의 문제야말로 이 기도의 핵심에 위치한다. 또한 이 빵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현재적 은혜의 선물이자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시야에서 놓친 채 빵만을 위한 투쟁에 함몰되려는 유혹에 빠져서는 안된다. 굶주린 이에게는 빵을, 빵을 가진 우리에게는 정의에 대한 굶주림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성경은 죄가 아닌 구원에 집중하며, 그 중심에는 죄를 고발하는 자가 아닌 죄짐을 극복하시는 분, 곧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따라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존재 자체가 죄임을 고백하고 인간이 이 과오를 해결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인정하는 죄사함의 간구는 금치산을 선고받은 죄인의 구걸이 아니고, 자유롭고 책임성을 지닌 인간의 정직한 자기고백이자 삶에 대한 긍정의 표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죄사함을 간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이웃을 용서함으로 보복으로 물든 세상에서 죄의 용서를 확산시켜야 하며, 이웃 인류와 연대하여 함께 세계의 죄악을 기억하며 기도해야 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시험은  성경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 중 하나로 어떤 인간도 벗어날 수 없는 필연적 곤경이다.  성경이 말하는  다양한 시험 중 가장 궁극적인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겪으신 종말론적 시험으로, 악마와 타협하여 고난없는 영광을 취하라는 유혹이 그 핵심이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통해  완전히 극복되었다. 그 결과 이제 우리가 겪는 시험의 순간마다 그리스도가 친히 우리와 연대하여 고난의 현장에 임해주시며, 따라서 우리가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는 대신 십자가와 부활의 빛 아래서 깨어 기도하면서 예수님이 가신 좁은 길을 따른다면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우리의 기도는 응답을 얻게 될 것이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한 사탄과 그 나라는 아직 현실 속에서 마지막 저항을 계속하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아직 삶의 모든 영역에 편재한 사탄의 세력과 그로 인한 죄의 파괴적 결과에 대해 타협 없이 저항하면서 그로부터의 해방과 구출을 위해 종말론적 긴박성을 가지고 간구해야 한다. 이 구원의 소망은 모든 인류를 넘어 피조물 전체에 미치기에 우리는 악으로 인해 고난당하는 자들과 구원을 열망하며 절규하는 모든 피조물의 회복을 위해 간구할 수 있다. 또한 이 기도는 세상을 향한 교회의 선교적 개입을 요구하며, 따라서 교회는 말과 행동으로 이 기도가 드러낸 소망의 내용을 증거해야 한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드러난 그의 나라와, 하나님의 무력하심을 통해 확증된 그 권세와, 십자가에 달린 자의  영광을 찬양하는 이 마지막 송영은 곤경 가운데 의심하며 기도하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 소망을 품도록 격려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즉 그분의 권세와 그분의 영광은 자유케 하는 은혜의 계명이요 궁극적 기쁨의 근원이며, 따라서 이 영광송은 의심하며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은혜를 증거하는 증인의 직분을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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