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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사회

로마서 13장 다시 읽기 (권연경 지음, 뉴스앤조이 펴냄)

by 서음인 2017. 11. 6.

1.『로마서 13장 다시 읽기』는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이자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연구위이기도 한 신약학자 권연경 교수가 통치권력에 복종하라고 요구하는 바울의 그 유명한 권면(로마서 13:1-7)에 대해 논의한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이 그리스도인이자 대한민국의 국민인 우리들이 변화된 마음, 즉 복음에 이끌리는 사유(롬 12:2)로 권세에 복종하라는 바울의 권고를 성경적으로 재고하고, 이를 통해 바울의 가르침이 오늘 우리 상황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숙고하도록 도우며, 나아가 주제에 대한 보다 활발할 토론과 반성을 위한 재료가 되기를 소망한다.

2. 저자의 목소리를 빌어 이 책의 주장을 요약해보도록 한다.

(1)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바울의 권면은 사적 응징을 삼가라는 12장의 일반적 행동 원칙을 통치 권력과의 관계라는 특수한 상황에 적용한 것으로, 12장 19절 이하의 논의는 보다 사적인 맥락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태도를 다루고 13장 1-7절은 보다 공적인 관계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태도를 다루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로마서 13:1-7절은 구체적 상황을 염두에 둔 구체적 권고(소위 task theology)로 그리스도인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포괄적이거나 유일한 설명이 아니며, 권력을 포함한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우리 삶에 적용되는 방식은 다양하기에 특정 본문에 나오는 구체적인 적용을 함부로 절대화시켜서는 안된다.

(2) 정치 질서는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의 일부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위임받은 세상 권력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는 신적 대리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을 이용하여 우리가 선을 행하도록 하며, 그로써 세상의 질서 유지라는 하나님의 뜻에 봉사한다. 만약 통치자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자신의 기능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가진 칼 때문이 아니라 신앙적 양심 때문에 자발적으로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따라서 세속권력의 당국자들에게 복종하고, 세금을 내는 시민의 의무를 다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섬김, 혹은 참된 예배다(롬12:1).

(3) 바울은 이 본문에서 로마제국의 본질에 대해 철학적으로 사유하거나 그 권력 자체의 정치적 도덕성 정당성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통치 권력이 시민들에게 실제로 수행하는 순기능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악한 정권이라도 최소한 나라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일상의 기능은 어느 정도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법이다. 바울이 통치 권력을 사역자나 일꾼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통치 권력이 세상의 질서 유지라는 하나님의 목적에 사용된다는 사실을 묘사하는 것일 뿐 이들의 권력 자체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4) 권력과 국민의 관계는 역할과 권한으로 맺어지는 기능적 관계이며, 국민이 정부권력에 대해 보여야 할 태도는 인격적 순종(obedience)이 아니라 기능적 복종(submission)이다. 성경은 통치자의 통치 행위에 대한 구체적 복종을 가르칠 뿐 통치자 개인에 대해 맹종하도록 가르치지 않는다. 특정 통치자 개인이나 특정 정치집단에 대한 맹목적 충성은 우상숭배에 다름 아니며,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인간 권력에 복종하는 신앙적 태도와 인간 권력 자체를 신앙으로 포장하는 위선을 날카롭게 구분해야 한다.

(5) 로마서 13장은 정부 권력에 대한 순종을 말하는 것이지 불의한 정부에 대한 저항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는 않기에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권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권력의 불가침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 권력의 상대성을 부각시키며, 통치 권력이 선을 장려하고 악을 응징하기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는 권고는 권력의 실제 행태가 그 기능을 포기하거나 역행하는 경우 복종과는 다른 대응이 필요해질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통치 권력에 복종해야 할 의무는 오직 그 권력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다는 전제에서만 유효하다.

(6)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바울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더 나아가 통치권력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제대로 정립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선결 작업 중 하나는 ‘공평’과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집요한 관심을 깨닫는 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권력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을 때 얼마든지 버림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사울), 정의롭지 못한 정권의 부당한 요구에 굴복할 수 없었던 신앙 위인들의 거룩한 저항의 사례들(히브리 산파들, 라합, 다니엘과 세 친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하다. 요한계시록이 잘 보여주듯 그리스도인은 짐승, 곧 불의를 자행하며 하나님께 대항하는 악한 통치 권력과, 그 권력과 결탁해 그들을 옹호하며 섬기도록 부추기는 종교 권력에 대해 제대로 된 통치 행위에 복종하는 바로 그 양심으로 저항을 감행해야 한다.

3. 아직도 정치권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만이 유일한 ‘성경적’ 태도라고 굳게 믿고 있는 한국의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그런데 이 분들이 그렇게도 강조하던 '무조건적 순종’은 자신들의 뜻에 맞는 정치 지도자나 정권에만 해당되더라는 사실이 이미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 책은 로마서 13장, 더 나아가 정치권력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최적의 입문서이자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권력의 본질이나 시민 저항의 방법 같은 구체적인 논점들까지 세세히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은 이 작은 책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리라. 이 주제에 흥미를 가지고 좀 더 자세히 탐구하고 싶은 분들에게는 핸드리쿠스 베르코프의 <그리스도와 권세들>, 로널드 사이더의 <그리스도와 폭력>, 월터 윙크의 <예수와 비폭력 저항>와 같이 비교적 얇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책들과, 읽기에 만만치는 않지만 자크 엘륄의 <폭력에 맞서>나 존 하워드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 <국가에 대한 기독교의 증언> 그리고 미야타 미쓰오의 <국가와 종교 - 유럽 정신사에서의 로마서 13장> 과 같은 책들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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