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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과학

신학자의 과학 산책 (김기석 지음, 새물결플러스 펴냄)

by 서음인 2019. 12. 7.

신학자의 과학 산책은 영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성공회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저자가 지난 10여 년간 과학과 종교라는 강의로 학생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묶어 펴낸 책이다. 저자는 근대 이후 눈부시게 발전한 현대 과학이 기독교의 독점물이던 진리의 왕좌’, '진리의 교도권'을 를 차지하게 되면서, 기독교인들은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과 과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고, 과학과 신앙의 다양한 관계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넒히며, 우주와 생명 그리고 정신에 대한 현대과학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소개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힌. 종교와 과학에 관한 풍성한 담론과 논쟁으로 가득한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 개인적인 단상을 덧붙인다.

 


1. 신앙에 대한 과학의 도전


 

과학과 신앙, 적인가 동지인가    과학과 종교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하는 가장 뚜렷한 두 가지 특징이다. 우주와 자연과 생명 및 정신 현상 속에서 근본적인 원리를 찾는 과학과, 신-절대자-궁극적 존재를 찾는 종교는 서로 다르지만 진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오늘날 갈릴레이 재판과 진화론 논쟁을 포함한 여러 이야기들의 영향으로 과학과 종교는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관계로 여겨지고 있지만, 화이트헤드는 종교의 진리는 영원하지만 그 표현방식은 과학의 발전에 따라 수정되어야 한다고 말했으며, 아이슈타인은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며,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라고 말하며 종교와 과학이 상호보완적 관계임을 주장하였다. 신학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당대의 지배적인 사상으로부터의 도전과 이에 대한 응전을 통해 발전해왔으나, 최근의 대표적인 신학자들은 오늘날의 과학과의 교섭 및 대화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있다.

 

신학과 과학의 네 가지 관계유형   과학과 신학 간의 학제적 연구에 앞장서는 학자인 이안 바버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 유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갈등은 말 그대로 종교와 과학은 양립할 수 없는 갈등관계라는 입장이며, 과학 진영의 물질적 환원주의 또는 과학만능주의와 종교 진영의 성서문자주의나 종교근본주의가 충돌할때 발생된다.


(2) 분리는 과학과 종교의 영역이 서로 다르다고 보는 입장으로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를 겹치지 않는 교도권이라고 표현했으며,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들도 대체로 이 견해를 취했다. 이는 양자의 직접적 충돌을 막을 수 있지만 양자 모두를 부분적인 진리로 만든다는 문제가 남는다.


(3) 대화는 과학과 종교는 상호 분리된 것이 아니고 서로 대화함으로서 궁극적인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안 바버는 과학의 진리 탐구를 위한 질문이 과학으로 답할 수 있는 경계를 넘어서게 될 때 종교와 대화하게 된다는 경계질문'과학과 종교는 대중들의 선입견과는 달리 방법론적으로 매우 유사하다는 방법론적 평형을 들어 대화의 필요성을 설명한다.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에 따르면 과학은 순수하게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 의존적이며, 이는 '믿음'을 전제하는 종교적 방법론과 유사하다


(4) 통합의 방식에는 세 가지가 있다 자연 신학은 자연과 생명 현상에서 창조의 증거를 찾아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며,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과학적 설명을 신학 안에 수용하여 새로운 체계적 형이상학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자연의 신학 떼이야르 드 샤르뎅처럼 역사적 계시에 근거한 종교를 그 출발점으로 설정하지만 전통적 종교의 교리를 현대의 과학적 지식에 비추어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체계적 종합은 과학과 종교를 하나의 종합적인 형이상학적 구도 하에 체계적으로 결합시켜 일관된 단일 세계관을 구성하는 것으로,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이 대표적이다.  

 

우주론과 기독교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바벨로니아의 창조 신화와 달리 이 세계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결과이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엄한 존재라고 선언한다. 성서가 그리는 세계상은 현대과학의 우주론에 의해 수정되어야 하지만 창조 이야기에 담긴 이러한 통찰은 오늘날에도 구현되어야 할 영원한 진리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은 르네상스 시대까지 1400여년간 서구를 지배했지만, 15세기에 접어들면서 코페르니쿠스의 보다 정합성이 우수한 이론인 지동설의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아직 천동설을 완전히 누를 만큼 완전하지 못했으며, 진정한 태양중심설로의 전환은 케플러나 뉴턴의 이론과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 갈릴레이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의 관측 결과를 통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근대과학과 기계론적 우주론   갈릴레이를 근대과학의 아버지로 만든 것은 불굴의 탐구정신과 실험과 측정을 통해 가설을 확립하는 방식이었. 그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기 위해 '성서'와 '자연'이라는 두 종류의 책을 주셨다고 믿었으며우주도 2의 성서로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경륜을 나타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뉴턴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절대시간의 지배를 받는 3차원의 무한한 절대 공간에서 벌어지는 모든 운동을 '중력'이라는 단 하나의 법칙으로 설명하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함으로서 근대과학에 기초한 기계론적 우주론의 시대를 열었으며, 이는 20세기 초반까지 300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의 기계론적 우주관과 쌍을 이루는 이신론과 결정론적 세계관은 기독교 신앙이 고백하는 인격적 존재인 하나님과 갈등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빛을 둘러싼 과학과 기독교의 사색     뉴턴은 무지개가 빛의 굴절에 의해 생기는 현상이며 흰색은 순수한 빛이 아니라 굴절률이 다른 다양한 색깔의 빛이 혼합된 결과임을 밝혀 내었으며, 이는 신학적으로 보자면 하늘나라의 찬란한 광채도 단색의 신앙이 아닌 무지개처럼 다양한 색깔의 신앙들이 함께 섞여 만들어낸 빛이라는 통찰을 준다. 빛은 전기장과 자기장이 변할 때 공간으로 퍼져나가는 파동인 전자기파의 일종으로, 패러데이와 맥스웰에 의해 중력과는 무관한 힘으로 밝혀졌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본다는 것은 광대한 전자기파 가운데 매우 좁은 영역에 불과한 가시광선에 의존해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 눈에 비춰진 사물은 궁극적 실재 가운데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물리학의 장 개념으로부터 우주에 편재한 성령을 은유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제안했으나과학 신학자인 폴킹혼은 그러한 판단이 범주 오류라고 비판했다


 

2부. 현대과학과 기독교


 

상대성 원리와 신학적 성찰    아인슈타인은 어떤 사건의 시간은 관찰자의 운동 상태에 따라 달라지며 우주의 모든 관찰자는 모두 저마다의 고유한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특수 상대성 이론'과, 우주는 평탄하지 않으며 중력에 의해 시공간이 휘어지면 그 휘어진 시공간을 따라 빛이나 물체가 운동한다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 이는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을 기초로 하는 뉴턴의 근대적 우주관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시간도 창조의 부산물이라고 말하며 상대화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렇게 물리적 우주가 우리의 사고와 수학을 통해 설명 가능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인 인간에게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도 심어주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으로 설명되는 미시세계와 상대성이론으로 설명되는 거시세계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통합하는 대통일이론을 찾는 데 매달렸지만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양자역학과 신학적 성찰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에 의해 발전한 양자역학은 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특정할 수 없다는 불확정성의 원리’와, 관찰자가 세계의 모습을 관측하는 순간 세계에 개입해 그 모습을 바꾸어 놓는다는 '관측자 개입'이 미시세계의 고유한 특성임을 밝혀 냈다. 이는 인과율이 적용되는 결정론적 세계관에 근본적인 도전을 제기했으며, '고전적 실재주의상대주의대신 우리가 실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는 없지만 신뢰할 만한 방정식과 인식론적 모델을 통해 근사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비판적 실재주의’라는 새로운 진리모델을 요구한다. 또한 미시세계에서 '입자'와 '파동'처럼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념이 혼재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본질이라는 상호보완성 원리는 지나치게 이분법적 대립구조에 의존하는 전통적 기독교 신학을 보완하는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빅뱅우주론과 하나님의 창조   적색 편이우주배경복사로 확증된 빅뱅우주론은 절대시간 절대공간 개념에 기초한 정적인 뉴턴-데카르트 우주론을 붕괴시킨 역동적인 우주론으로, 기독교의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와 깊은 상관성을 지니며 우주 내의 모든 지점은 중심이자 동시에 가장자리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준다. 드넓은 우주에서 생명 현상이 보편적인지 지구에서만 일어난 일회적 사건인지는 결론 내기는 쉽지 않지만, 우주에 존재하는 외계 문명과 교신할 가능성을 계산한 드레이크 방정식과 보이저 1호에서 찍은 지구의 사진인 창백한 푸른 점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힘들어 이룩한 문명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존 폴킹혼은 생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별이 폭발해 우주 공간에 생명의 재료를 흩뿌려 주어야 하며, 이것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십자가의 원리 - 자시희생을 통해 생명을 주는 - 라고 강조한다.

 


3. 진화론과 창조 신앙


 

진화론   다윈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발생하는 개체 혹은 집단 간의 변이와 외부의 환경적 요소인 자연선택을 통해 궁극적으로 새로운 종이 만들어질 수 있으며, 이러한 방식을 통해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단일 조상으로부터 진화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진화론의 핵심적 개념은 생명이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변화하는 존재이며 자연 선택이라는 하나의 원리가 생명 현상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오늘날 진화론의 계보는 리처드 도킨스를 중심으로 유전자가 진화의 단위라고 주장하며 모든 것을 자연선택의 결과로 설명하는 극단적 다윈주의자들과 단속평형설을 제창한 스티븐 제이 굴드를 축으로 하는 자연주의자들로 나뉠 수 있으며전자가 과학만능주의 내지는 과학 제국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반면 후자는 과학과 종교가 완전히 다른 영역에 속한다는 겹치지 않는 교도권이라는 개념을 주장하고 있다.


창조과학과 지적설계   구약성서의 내용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진화론적 관점은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성서의 문자적 해석을 고집하는 근본주의 기독교 신앙을 배경으로 전개된 창조 과학과 끊임없는 충돌을 불러 일으켜 왔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의 문자를 과학에 강요하는 '창조 과학'이 아닌, 창조기사가 기록된 역사적 배경과 맥락을 고려하여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신앙고백의 메시지를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재해석해 내는데 노력하는 창조신앙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윌리엄 페일리를 그 효시로 하는 지적설계론은 자연 속에는 절대자에 의한 설계의 증거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라는 논증을 내세운다그러나 진화론의 입장에서 보면 지적설계론과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란 근대과학의 방법론에 충실하지 못해 생겨난 불명료한 개념으로 진화론에 의해 충분히 반박이 가능하다.

 

유신론적 진화론   유신론적 진화론은 종교의 원리는 영원하지만 그 원리를 표현하는 방식은 과학의 새로운 빛에 비추에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화이트헤드의 교훈의 전형적 사례이자, 고전적 기독교 신학의 ‘계속되는 창조의 교리와 상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떼이야르 드 샤르뎅과 CS 루이스, 알리스터 맥그래스 프란시스 콜린스 등 과학과 종교의 대화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진화론의 입장을 지지하면서도 동시에 종교적 성찰을 존중한다. 진화론은 어떻게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하나의 과학 이론이지만 창조론은 창조에 대한 신앙고백이기에, 성경에 대한 극단적인 문자적 해석을 고집하지 않는 한 둘이 조화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창조 신앙의 현대적 해석    오늘날 신학자들은 창조 신앙과 현대과학을 충돌 없이 조화시켜야 할 뿐 아니라 생태계 파괴로 인한 위기와 관련해서도 책임 있는 응답을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천지창조 이야기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요약하면 (1) 세계는 본질적으로 선하고 질서정연하며 지성으로 이해 가능한 대상이라는 것 (2) 세계는 하나님께 의존적이라는 것 (3) 하나님은 전능하고 자유로우시며 초월적인 분으로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세계를 이끌어가신다는 것 (4) 인류는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엄한 존재로 '피조된 공동 창조자'이자 창조 세계를 지키고 관리하는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창조 신앙에 도전이 되는 것은 진화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동산과 거기 사는 많은 생명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인간의 과도한 탐욕이며, 창조신앙의 가치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존엄성과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 및 모든 창조세계의 보존을 옹호하는 데 있다.

   


4. 인공지능과 한국 교회


 

인공지능의 약속과 위험    인공지능이란 "인간의 지적 능력을 모방한 지성을 지닌 존재, 혹은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지는 지능을 뜻하며, 인간이 명령한 특정한 범위 내에서만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는 약한 인공지능 인간처럼 사고력을 지닌 강한 인공지능으로 나뉜다인공지능은 인간을 노동의 고통과 재난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서 존엄성을 증진시킬 수 있으나, '기술적 특이점'을 넘어 인간의 지능을 월등히 뛰어넘고 자신보다 뛰어난 인공지능까지 설계할 수 있는 '초인공지능'의 출현으로 인류의 멸종을 초래할 수도 있다.  또한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안락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의 생존력을 상실하는 나약한 존재로 쇠락할 수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노동의 소명을 받은 인간에게 심각한 인간성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미래학자들은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를 막을 내리고 생명과학과 첨단과학의 파워를 이용해 영생에 도전하는 신인류인 트랜스휴먼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신학자들은 의존성을 벗어버린 신인류의 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직면해 있다.


인공지능 시대의 신학     신학은 언제나 시대의 도전과 질문에 대한 응답 내지는 수용을 통해 발전해 왔으며, 과학기술 시대의 목회와 신학은 과학과의 학제적 대화를 외면할 수 없다인공지능은 인간의 요구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만능기계가 아니고인간의 궁극적 질문인 존재의 이유와 의미에 대한 답을 줄 수 없을 뿐 아니라영적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인공지능으로 인해 달라질 미래상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지만, 구약성서의 창조신학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절망적인 바벨론 포로시기에 주어졌듯 하나님이 시대의 상황보다 더욱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를 주실 것이라고 소망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생명의 길은 인공지능의 시대가 도래한다 해도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 고유한 영적 사명이다.

 


5. 과학과 영성 사이에서

 

 

동물, 외계생명, 기후변화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은 동물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면 살아왔다. 동물은 인간에게 고기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웃 생명이자, 때로는 가족이고, 친구이며, 스승이 되기도 하는 의미 있는존재로 여겨져야 한다. 만약 외계 생명체나 지적 존재가 발견된다면 그것은 이 우주가 탄생할 때부터 생명을 환영하는 장소로 설계되어 있었다는 강력한 증거다. 지구의 기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격변을 겪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 인류는 잠깐의 간빙기 사이에 놀라운 문명을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엄청난 화석연료의 사용으로 인한 막대한 온실가스 발생으로 기후위기를 불러왔다. 이러한 위기의 극복을 위해서는 방법을 제공할 과학과 윤리적 동기를 제시해야 종교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가이아로서의 지구    제임스 러브록은 지구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보아야 한다는 가이아 가설'을 주장했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과 대기 바다 땅을 포함한 환경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서로 협동하여 지구를 생명이 거주하기에 친화적인 장소로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이 생각에 따르면 인간들 뿐 아니라 지구의 뭇 생명들이 창조사역의 주역인 피조된 공동창조자가 되며, 이는 자연을 대상화 비주체화시켜 왔던 서구의 유일신론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며, 자연을 신성시해 온 범재신론적 세계관과 대화할 여지를 넓혀 준다.

 

우주와 인간   스티븐 호킹은 과학의 역사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 온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브란든 카터는 우리 우주의 특성과 구조를 결정하는 물리량들이 인간의 출현을 위한 조건에 놀라울 정도로 부합된다는 우주론적 인류원리를 주창했으며, 과학자들은 우주의 존속을 위해서는 극단적으로 까다로운 물리적 조건에 부합되어야만 한다는 사실(미세 조종)을 밝혀 냈다. 하나님은 사랑에 겨워 세계와 생명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으나, 이에 더하여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사랑을 찬양하는 존재가 필요했으며, 그 결과 마침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모두 별에서 와서 별로 돌아갈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다.

 


몇 가지 단상

 


1. 현대는 과학의 시대다. 과학은 모든 학문 분야를 제치고 지식의 "최종 심급"의 자리를 차지한지 오래며, 기독교는 그 중심지였던 서구에서조차 공적 영역은 물론이고 근대 학문의 장에서도 퇴각을 거듭해 자신들만의 게토에 유폐되는 중이다. 그런데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과학의 열매를 어떤 거리낌도 없이 마음껏 누리면서도, 현대 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인 빅뱅이나 진화를 부정할 뿐 아니라 심지어 과학 자체를 적대시하는 것을 훌륭한 신앙으로 여기는 분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아직도 과학을 신학의 시녀 쯤으로 알고 있는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세상 속에서 '당신들의 기독교'가 차지하는 위치와 평판을 정확히 깨닫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창조 과학'과 관련된 단체에 속했던 이력이 과학과 관련된 공직을 맡는 데 심각한 결격사유가 되는 나라다. 


2. 과학은 호기심에 사로잡힌 인류를 진리로 인도하는 믿을 만한 구도자로 우주의 기원을 밝히고 생명의 진화 과정을 설명했으며 기술의 발전과 그로 인한 무수한 혜택을 인간에게 선사했으나, 한편으로는 환경오염과 자원고갈, 인공지능과 핵무기로 인한 인류 절멸의 위협을 가져오기도 했다저자는 우리 인류가 미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과학의 파괴력을 통제하고 타자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려는 도덕 능력이 필요하며, 바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미움이 아닌 사랑을, 탐욕이 아닌 희생의 삶을 보여주신 예수의 길을 따르는 제자들이야말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의 보수 기독교는 사랑과 희생은 커녕 과학을 포함해 자신이 아닌 모든 것과 불화하고 투쟁하는 것을 신앙의 첫째가는 덕목으로 여기는 터툴리안의 후예들인 것 같다. 


3. 그런데 혹시 터툴리안이 "예루살렘이 아테네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일갈과 함께 그리스 철학과의 결별을 선언했지만, 그 역시 자신의 신학을 진공상태가 아닌 당대의 라틴 문화권에 익숙했던 로마법 체계와 사상의 도움을 빌어 전개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신학이 과거의 특정 시점에 완결된 학문이며 그 이후의 신학이란 '그 신학'에 대한 훈고에 불과하다고 굳게 믿지 않는 한,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형태로든 과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신학을 세우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신학에 종사하는 분들은 명심해야 할 것 같다. 21세기의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책을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길잡이가 되어 줄 기본적인 안내서로 적극 추천한다. 




"창백한 푸른 점"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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