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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과학

쿼크, 카오스 그리고 기독교 (존 폴킹혼 지음, 우종학 옮김, SFC 펴냄)

by 서음인 2020. 8. 30.

물리학자요 성공회 사제인 존 폴킹혼이 지은 『쿼크, 카오스 그리고 기독교』는 과학과 신앙에 관련해 제기된 몇 가지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저자의 통찰력 있는 대답을 담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과학은 사실이고 신앙은 의견이라는 통념에 반대해 과학과 종교는 진리 탐구의 과정에 함께 하면서 서로를 돕는 상보적 동반자라고 강조하며, 그간 뉴턴의 고전적 역학이론과 마찰을 겪던 신의 섭리와 개입 같은 조직신학적 주제들을 양자이론이나 카오스이론과 같은 현대과학의 통찰을 빌어 효과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통찰을 바탕으로 과학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이 악과 자연재해, 기도와 기적, 종말과 부활 같은 주제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특별히 이 과정에서 미래가 열린 과정이며 하나님도 시간과 함께 미래를 알아가게 된다는 주장은 흥미롭게도 과정신학의 주장과도 유사한 지점이 있어 보인다. 작지만 과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한 창조적이고 밀도 있는 통찰로 가득한 책의 내용을 요약해 보기로 한다.



사실 혹은 의견?   근대 과학이 이룬 경이로운 성취는 과학은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참 지식으로 인도하고 종교는 단지 주관적 의견을 바탕으로 한다는 생각을 낳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과학은 우리에게 물리적 세계에 대한 신뢰할 만한 지도를 제공하지만, 과학이 다루는 사실이란 실재로는 해석된 사실들이고 과학에서 실험과 이론/사실과 해석은 항상 서로 섞여 있다. 과학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사물들이 생겨나고 유지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면, 이에 반해 종교는 본질적으로 ‘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뒤에는 의미와 목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한다. 따라서 종교적 탐구도 과학과 마찬가지로 '근거'에 입각해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풍성하고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고 싶다면 두 가지 영역을 모두 탐구해야 한다.


과학의 가능성과 우주의 특별함   우리 내부의 수학적 합리성과 우리 외부의 물리적 세계의 합리성은 서로 일치하며(과학의 언어는 수학이다), 이는 그 둘이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창조주의 합리성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표현하며, 그것이 바로 과학이 가능한 이유다. 우리가 우주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인류 원리(Anthropic principle)에 의해 지배되는 매우 특별한 우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진화 자체만으로는 우리의 기원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으며, 탄소에 기반한 생명체의 진화는 생명체의 탄생을 위한 ‘미세 조절’이 이루어진 매우 특별한 우주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렇게 특별한 우주의 배경에 어떤 우주적 지성이 존재할 것이라는 가정은 타당하다.  


양자역학과 카오스 이론  과거에는 모든 운동과 변화가 고전적인 뉴턴 역학의 역학의 기계적인 시스템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로 접어들면서 개별 양자의 운동의 결과를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큰 양자집단의 패턴은 통계적으로 예측이 가능하다는 ‘양자역학’과, 자연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시스템이 주변 환경과 극도로 섬세하게 연결되어 있어 아주 작은 변화만으로도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된다는 ‘카오스 이론’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렇게 섬세하고 예측 불가능한 혼돈의 시스템은 폐쇄적 인과관계에 의해 지배되는 뉴턴역학과 달리 미래에 대해 열려 있게 된다. 따라서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에 의해 일어나는 ‘아래로부터 위로의’ 인과관계라는 전통적인 개념은 전체가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위로부터 아래로의’ 인과관계라는 새로운 개념에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섭리 - 영원과 시간  세계가 양자역학과 카오스이론이 알려주는 것처럼 미묘하고 유연하며 미래에 대해 열려 있다면, 신은 창조 후에 더 이상 세계에 개입하지 않는 시계공이 아니라 섬세하고 미묘한 개입만으로 세계와 상호작용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신의 섭리와 자연의 자율성이 서로 섞여 있다는 말은 신의 활동을 믿음의 통찰로 감지할 수 있지만 실험으로 입증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신은 사물의 현재 상태를 알고 있지만 앞으로 이루어질 세계에서 사물들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해갈지 알지 못하며, 미래가 실제로 열려 있다면 신 역시 변해가는 시간적 과정을 따라 세계를 알아가야 한다. 


하나님과 창조 - 우연과 필연  우리가 경험하는 우주의 다양성과 풍성함은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우연’과 풍성함을 유지시키는 ‘필연’ 둘 다를 필요로 한다. 인자하면서 성실한 신은 독립성과 안정성이라는 한 쌍의 능력을 창조세계에 주셨으며, 진화하는 우주는 미세하게 조정된 가능성 안에서 많은 부분이 스스로 구현되도록 창조주가 허락한 세계이다. 창조란 완결된 상태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창조물들의 자유가 허락된 연속적인 과정이며, 성취되어야 할 전반적 목표는 존재하지만 세세한 변화의 내용은 우발성의 몫으로 남겨진다. 우연은 눈 먼 무목적성의 상징이 아니라 자유의 상징이다. 


기독교의 인간 이해 - 반환원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전체는 부분을 더한 것 이상이라고 믿는 반 환원주의자이다. 생물학은 큰 스케일의 단순하고 간단한 물리학이 아니며, 생명의 모든 면이 기계적으로 환원되거나 설명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인간의 기본적 경험을 부정하거나 사소하게 만드는 인간 본성에 대한 어떤 빈약한 설명도 거부해야 한다. 환원주의자들은 인간 경험의 비과학적 면모들을 과학으로 환원해 설명하려 하지만, 그들이 설명하는 딱딱하고 차가운 우주에는 예술가와 작가와 종교인들의 인상적인 경험과 증언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실재는 다층구조의 풍성함을 가지며, 종교적 설명이 갖는 장점 중 하나는 다양한 인간 경험의 이면에서 그 경험들을 통합하는 창조주의 의지와 본성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악의 문제   도덕적 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악이 발생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인간의 자유라는 더 큰 선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이기 때문이다(자유의지 방어). 또한 물리적인 악이 없거나 그 악에 신이 일일이 개입하는 교정하는 마술적인 세계는 도덕적 책임이 있는 존재들의 거주지가 될 수 없다(자유과정 방어). 자유과정 방어가 적용되는 우주만이 자유의자 방어가 적용되는 존재들을 탄생시킬 수 있다. 이 세상의 고통과 악은 신의 약함이나 냉담함 때문이 아니라, 엄격한 신의 통제에서 벗어나서 자기 자신이 되도록 허락된 창조세계가 치러야 하는 불가피한 댓가다. 우리는 무감각한 우주에 혼자 던져지지 않았으며, 하나님은 우리가 불행을 겪을 때 그 어둠 속 우리 옆자리에 계신다.  


과학자와 기도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유연하고 열려 있는 물리적 세계에서 미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신이 개입해야 할 섭리의 영역뿐 아니라 우리가 담당해야 할 작은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우리가 활동할 영역을 드려서 신의 섭리적인 뜻에 따라 신의 활동 영역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일치로 인간과 신의 바람이 합력하게 되면 더 위대한 힘이 발휘될 수 있다. 기도할 때 해야 하는 다른 일은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말하는 것이다. 기도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정말로 가치를 두는 것에 헌신하도록 요청받으며, 인자한 신은 우리의 요청을 전부는 아니라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과학자와 기적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엄청난 기적이 있다. 과연 신이 자신의 법칙을 깨고 '기적'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일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가? 기적이 새로운 영역을 경험함으로써 열려지는 새로운 가능성을 대표할 때, 우리는 기적을 신실한 하나님의 행위로 믿을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전례가 없었던 특별하고 집중된 방식으로 그리스도 안에 존재했으며, 따라서 예수는 세상에 새로운 영역이 존재함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새로운 영역이 새로운 현상, 심지어 죽음으로부터 영광스럽고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을 포함한 새로운 현상을 수반한다고 믿는 것은 완전히 통일되고 합리적인 신앙이다.  


과학자와 종말   우주의 무익함을 예측하는 과학은 진화주의적 낙관이 희망에 대한 근거로는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참되고 영속적인 희망은 사랑 많고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영원한 존재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부활이란  신이 영혼이나 물질이 아니라 ‘나라는 패턴’을 기억하고 신이 선택한 새로운 환경에서 재창조하는 행위일 것이며, 천국의 삶은 신적인 삶의 풍요함을 흥미진진하고 무궁무진하게 탐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창조는 고통이라는 현재의 가치들을 통과하지 않고 새창조라는 성례적 운명에 이룰 수 없다. 신뢰할 만한 증언에 의해 지지되는 예수의 부활과 인류가 갖는 보편적 직관인 희망은 우리가 어떤 선한 것도 잃어버리지 않으실 하나님의 성실함에 대한 확신 속에서 우리의 궁극적 운명을 기다릴 수 있게 해준다. 


과학자와 신앙   과학과 종교는 진리를 추구하는 공통된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둘 중 어느 하나도 진리추구 과정에서 절대적 확실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쿼크와 빅뱅과 생물 진화를 믿는 이유가 그것이 직접적인 물리적 현상에 잘 들어맞기 때문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도 물리적 세계의 질서와 풍요로움, 실재의 다층적인 특징들, 예배와 희망이라는 종교적인 경험과 같은 우리의 보편적 경험에 잘 들어맞는다. 우리가 물리적 실재와 만나는 것이 과학인 것처럼 중교는 우리가 실적 실재와 만나는 일이다. 과학자는 신앙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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