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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성서학

구약으로 읽는 부활 신앙 (김근주 지음, SFC 펴냄)

by 서음인 2020. 4. 18.

서울대와 장신대,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현재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전임연구원으로 활발한 저술 및 강연활동을 펼치고 있는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이 구약본문들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부활신앙이 참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라고 밝힌다. 저자는 구약성경은 부활신앙에 대해 그렇게 명료하게 다루고 있지 않으며, 구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도 내세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부활신앙의 요체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 영원히 존재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죽음과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통치, 그 약속을 굳게 믿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강조한다. 복음의 핵심인 부활의 의미를 신구약 전체의 맥락에서 해설하고 있는 이 작지만 멋진 책의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하고 간략한 단상을 덧붙인다.  



1. 죽음은 흔히 죄의 결과요 저주로 여겨지지만, 구약성경은 일관되게 죽음과 스올이 모든 생명이 예외 없이 다다르는 자연스러운 종착점이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라고 가르친다. 구약에서는 이 세상이 단지 내세를 위한 준비의 과정일 뿐이라거나 이 세상에서의 삶이 실재하는 내세에 비해 열등한 어떤 것이라는 생각은 찾아볼 수 없다. 구약의 기자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죽음 후의 부활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신실함을 선포하는 삶이었다. 이렇듯 구약은 부활에 대한 명료한 언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허무와 체념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현세적 삶에 대한 강한 긍정을 보여주고 있다.

 

2. 신약성서에서 뚜렷한 확신과 함께 선포되고 있는 부활 신앙은 구약으로부터 직접 이어진 것이 아니라, 신구약 중간기인 제2 성전기 동안 새롭게 생겨난 변화라 할 수 있다. 나라를 잃고 식민지인으로 살아야 했던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에게 좋은 소식의 핵심은 다윗 나라의 회복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바뀌었으며, 이런 날을 소망하는 그들의 삶의 기본적인 단위는 더 이상 국가나 민족 같은 거시적 실체가 아니라 가족이나 개인이 되었다. 이렇게 고조된 개인의 운명에 대한 관심이 부활에 대한 신앙과 연결되면서, 주전 2세기경부터 유대 문헌들에서 영혼불멸이나 육체부활을 포함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다양한 언급들과 기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3. 부활을 언급하는 중간기 문헌들의 공통점은 그 문헌을 기록한 자들이 당시에 겪고 있었던 참상과 고난이다. 의롭고 신실한 개인들이 고난을 당하고 죽음을 맞는 상황이 계속되었던 포로 후기의 상황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의인의 살해는 정의롭고 신실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일찍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신 것이며, 마지막 날에는 선인과 악인이 모두 부활하는 최후의 재판을 통해 그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 의인이 고난당하는 현실이야말로 죽음 이후에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이나 부활에 대한 신앙이 싹트는 온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죽음을 넘어선 새로운 생명의 기대를 담은 부활신앙은 근본적으로 신정론적인 모색이었으며, 고난과 순교에 직면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인도를 발견하는 방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4. 내세신앙 혹은 부활신앙의 요체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견고한 신뢰라고 할 수 있다. 내세와 부활은 극심한 고난의 상황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자 할 때 논리적이고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이었으며, 따라서 부활의 핵심은 부활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정의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신하고 그 나라와 통치를 기대하는 것이다. 좁은 의미의 부활신앙이 죽음 이후의 육체부활을 믿는 것이라면, 넓은 의미의 부활신앙은 자기 스스로의 가능성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약속을 어떤 어려움 가운데도 굳게 붙잡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된 부활신앙이야말로 구약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5. 이렇게 의인의 고난이라는 문제에 대한 가장 명료한 대답은 죽음 이후의 부활과 내세에서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레미야나 하박국은 그런 내세에 대한 기대 없이, 심지어 전도서는 이름이 기억되리라는 기대도 없이 이 땅에서 야훼를 경외하며 살아가는 삶을 견지하고 있다. 내세의 영광과 영원히 기억됨을 믿을 수 없었지만 이 땅에서의 정의와 공평을 던져버리지도 않았던, 좁은 하나님 경외의 길을 걸어간 전도자야말로 구약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대표적인 야훼 신앙인이다. 환난의 상황을 이겨내는 데 특별한 계시나 체험, 권위 있는 내세 교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신실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과 그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야말로 극한의 환난을 이기는 힘이다.

 

6.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 부활은 새로운 삶에 대한 변혁적 기대가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이 그대로 하늘의 영역으로 옮겨지는 것이었으며, 이는 지배질서에 의해 희생당하고 살해당한 이들 가운데서 찬란하게 빛났던 부활신앙이 체제에 순응하여 누리는 기득권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된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주를 묵상하고 우리가 받은 생명의 축복을 기뻐하지만, 정작 그리스도께서 대신 겪으신 그 고난과 살해의 현장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오늘날의 교회가 현실의 고통과 불의의 문제를 외면하는 주된 근거가 부활신앙이라는 것은 아이러니이자 안타까운 일이다.

 

7.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의 핵심은 육체의 부활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예수께서 성취하신 것은 구약의 단편적인 문자가 아니라 예언자들을 통해 선포된 평화의 왕국과 영광스러운 미래다. 구약의 하나님 나라와 그것을 향한 소망에 대한 이해 없이 신약을 읽는다면 그 말씀들은 현실을 무시한 채 오직 장및빛 미래에만 투자하라고 부추기는 사기 문서가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땅에서 충만하게 거하면서 동시에 그 영광의 나라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 구약 신앙의 요체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며, 우리가 내세를 얻도록 하는 것은 이 땅에서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다. 천국의 본질, 내세의 본질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있다.

 

8. 부활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천년만년 살아가리라는 믿음이 아니라, 도저히 내게 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다. 나그네로서의 삶이야말로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참된 그리스도인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정체성이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 자체로 말미암아 섬겨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신구약 성서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예수의 부활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로 입증될 수 없지만, 주님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연약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다. 세상은 부활을 조롱할 것이나 빈 무덤과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평생 동안 부활의 증인이 되어 그 영광을 사모하며 살아갈 것이다.  


9.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부활신앙은 현실의 불의와 고통을 감내하는 댓가로 내세의 몽롱한 평안을 약속해 주는 인민의 아편이나, 이 세상에서 누리는 행복을 저 세상으로까지 연장하려는 기득권자들의 탐욕을 만족시키는 내세 보험으로 소비되고 있는 것 같다. 공평과 정의가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과 실천이 빠진 부활 신앙과, 박해받는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공감이나 연대가 결여된 영생에의 소망은 얼마나 편안하고 달콤하며 심지어 위로로 가득한가!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타인이 당하는 고통에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살아왔던 내게도 언젠가는 그러한 부활의 소망과 위로가 간절해질 삶의 마지막 날들이 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그런 부활영생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요 존재 이유라고 주장한다면, 적어도 현재의 나는 그런 자들을 인간의 고난과 죽음을 미끼로 종교라는 아편을 팔아치우는 죽음의 장사치나 가짜 면죄부를 남발하는 거짓 선지자로 여기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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