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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성서학

요한복음 연구 - 신학과 주석 (김춘기 지음, 한들출판사 펴냄)

by 서음인 2022. 1. 19.

『요한복음 연구 - 신학과 주석』은 영남신학교 신약학 교수로 재직하다 은퇴한 저자가 1998년에 펴낸 230여 페이지 남짓 되는 요한복음 소개서다. 저자는 흔히 ‘영적인 복음서’로만 알려진 요한복음이 개인의 신비적 체험이나 탈역사적 계시에만 의존해 기록된 책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예수를 선택해야 했던 요한공동체의 신학적 반성과 결단을 통해 탄생한 ‘역사적인 영적 복음서’라고 강조한다. 온건한 역사비평의 관점에서 쓰여졌으며, 1부에는 요한복음의 신학이 2부에는 짤막한 주석이 담겨 있다. 깔끔하고 명쾌한 해설이 돋보이며 개인적으로 과거 요한복음 공부에 큰 도움을 받았던 책이다. 조금 오래된 책이지만 앞으로의 공부를 위해 내용을 요약한다.

 

 

1장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관계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차이점   ① 예수의 기원 - 마가복음이 역사적 인간 예수로보터 시작했고, 마태와 누가가 신비적인 탄생에서 찾으려고 했다면, 요한복음은 예수의 기원을 우주의 시작에 두고 있다. ② 단어 - 요한복음에 자주 나타나는 생명, 빛, 안다, 진리, 세상과 같은 단어는 보다 희랍적이고 영지주의적이며, 공관복음에 자주 나타나는 단어들인 왕국, 의로운, 귀신은 유대적인 용어들이다. ③ 핵심용어 - 공관복음은 유대적인 ‘하나님의 나라’ 개념으로, 요한복음은 좀더 보편적인 표현인 ‘생명’으로 복음을 설명한다. ④ 예수의 말씀 - 공관복음에서는 짧고 단순한 격언체이며, 요한복음에서는 확대된 담론이다. ⑤ 비유 - 공관복음의 비유가 의외성이나 역설을 그 특징으로 하는 반면, 요한복음의 비유는 알레고리에 가까우며 합리성이나 도덕성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차이는 공관복음이 예수를 역사적 관점에서 보려 한 반면에 요한복음은 말씀 안에 있는 예수의 본질에 집중하려 하기 때문이다. ⑥ 연대기 -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공관복음의 생애-지리적 연대기는 신학적 재구성에 가까우며,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연대기와 활동 영역이 더 사실에 근접하다고 볼 수 있다. ⑦ 최후의 만찬과 십자가 - 공관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유월절 당일에 십자가에 달렸으나, 요한복음에 따르면 처형일은 하루 전인 유월절 준비일이었다. 공관복음에서는 최후의 만찬과 유월절 식사를 일치시킴으로서 유월절 해방의 기념이 예수의 성만찬으로 변형되어 완성된다는 제의적 측면을 강조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죽음을 대속적 의미를 가지는 유월절 양의 죽음과 직접 연결시키며, 성만찬을 제도적인 제의로 표현하지 않는다. ⑧ 성전 정화 - 예수를 전통적 메시야로 보는 공관복음에서 성전 정화는 예수의 공생애 마지막에 일어났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공식화하게 만든 핵심적인 사건이다. 예수를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분으로 보는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처형을 유발한 결정적 사건은 죽은 나사로를 살린 일이었으며, 성전정화는 공생애 초기에 일어난 하나의 에피소드로 다뤄진다. ⑨ 사건들 - 공관복음에서는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과 예수가 메시야시라는 사람들의 증언이 중요한 신학적 요소임에 반해, 요한복음은 예수의 본질을 선재한 신성에서 찾았기 때문에 인간들의 증언보다 예수 자신이나 하나님의 증언을 중시한다. 요한복음이 증언하는 예수는 위대한 인간이나 ‘신적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계시다. ⑩ 기적과 표적 - 공관복음 기적의 핵심인 귀신축출은 사탄의 통치가 축출되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함을 상징한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기적을 예수의 정체성, 즉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빛이요 부활이요 생명임을 보이는 ‘표적’으로 이해한다.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공통점과 관계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은 세례 요한과의 관계에서 시작해 수난과 죽음 빈 무덤과 부활로 끝맺는 연대기적 골격을 공유하며, 특히 예수의 수난사화는 서로 놀랄 만큼 유사하다. 상이성과 유사성의 관계에 대해서는 ① 요한복음이 하나 이상의 공관복음을 자료로 기술되었다는 견해(C.K. 바레트), ② 요한복음은 문서화된 공관복음을 몰랐다는 견해, ③ 두 형태의 복음서 모두 예수사건에서 발생된 전승에 기초해 있지만, 이 전승이 각 공동체 내에서 초기부터 상황에 맞게 달리 해석되면서 발전되어 왔다는 견해(카이저, 브라운)가 있다. 

 

 

2장. 요한복음의 역사적 배경

 

 

자료   불트만에 따르면 요한복음은 ‘표적자료’와 ‘계시 담화 자료’ 그리고 ‘고난과 부활 설화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베커는 ‘표적 자료’와 ‘고난과 부활 설화집’에 단편적인 구전 전승들을 사용해 복음서가 구성되었다고 보았다. 노크는 요한복음이 자료보다는 구전이나 기억에 근거해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전승   요한 공동체는 오랜 세월동안 여러 계층이 혼입되면서 발전되어 온 복합적인 공동체이며, 요한복음은 예수시대의 사건과 요한 공동체 시대의 사건이 혼재된 복합적 구조로 되어 있다. 레이몬드 브라운에 따르면 ① 세례 요한의 추종자에서 예수에게로 개종한 무리들이 주축이 되어 예수를 다윗 계열의 메시야로 추종하기 시작했고, ② 모세 계열의 메시야를 대망했던 개종한 사마리아인들이 유입되어 예수를 선재한 로고스의 화육으로 인식함으로서 유대교와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되었으며, ③ 예수를 거부한 유대인들 대신 개종한 이방인들이 요한 공동체에 유입됨으로서 헬라 사상의 여러 개념이 예수를 설명하는데 과감하게 차용되어 요한복음이 기록되었다. (AD 90년경)

 

저자   요한복음은 한 사람이 아닌 요한 공동체(혹은 요한 학파)에 의해 완성되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애제자는 요한 공동체(혹은 요한 학파)의 지도자 내지는 창설자로 세례 요한 계열일 가능성이 많으며, 요한복음은 이 애제자가 받은 독특한 전승에 근거하여 처음 쓰여진 후 요한 공동체의 경험이 확대되고 보충되면서 완성되었다. 요한복음의 저술과정을 요약하면 ① 요한복음의 근거는 애제자에 의해 구성된 전승으로 전통적인 사도 계열과는 다른 독특한 전승이다. ② 애제자의 전승에 근거해 요한복음이 기록되었다. 저자는 요한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 팔레스타인에 친숙하며 유대교에도 친숙한 인물이다. 회당에서 축출되어 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던 요한공동체는 요한복음을 통해 애제자의 정통성과 자신들의 정통성을 새롭게 정립했다. ③ 유대교와 분리되어 정체성의 안정을 찾은 요한 공동체는 다시 베드로 계열의 정통 유대교와 연합하여 안정된 공동체가 되기 위해 요한복음에 몇 가지의 신학적 편집을 가했다.

 

목적   요한복음의 목적은 선교보다 이미 믿고 있는 공동체의 새로운 정체성 확립이라고 볼 수 있다. ① 요한복음 저자가 사용한 ‘표적 자료’와 ‘애제자 전승’은 원래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게 하려는 선교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② 그러나 요한복음의 저자는 자신들의 독특한 상황 때문에 이 자료를 요한 공동체 구성원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사용한다. ③ 이러한 정체성 확립은 단순히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을 넘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선교적 차원을 가진다. 요한복음은 선교적 차원에서 시작해 믿는 자의 정체성 확립으로 나아가며 다시 모든 세상을 생명화하는 새로운 선교적 차원으로까지 이어진다.

 

영향을 끼친 사상들   ① 2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요한복음이 헬라적 영향 - 철학, 신비주의, 영지주의 -을 받았다는 견해가 압도적이었다. (불트만, 케제만) ②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낙 함마다 문서나 쿰란 문서가 발견되면서 당시에 광범위하게 발전된 유대적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경향으로 기울고 있다.

 

요한복음의 구조   ① 1:1-18의 서문 ② 표적의 책 (1:19-12장) - 표적을 중심으로 예수의 정체성을 증언한다. ③ 영광의 책(13-17장) - 기적이 아닌 긴 담화가 중심이며, 예수의 죽음을 로고스의 세계로 돌아가는 '영광'으로 이해한다. ③ 수난 사화(18-20장) - 주도권은 예수에게 있으며, 책임은 유대 지도층에 있다. 21장 - 후대의 편집자에 의해 다시의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첨가됨.

 

 

제 3장. 요한복음의 기독론 - 아버지와 아들

 

 

예수는 구약과 유대교에서 말하는 긍극적 메시야이고, 헬라 세계에서 말하는 우주의 주관자(로고스)의 현현이며, 하나님과는 '아버지-아들'의 관계다.

 

(1) 유대적 배경에서 본 예수

 

하나님의 어린 양     어린 양은 전통적인 메시야 명칭은 아니지만 구약성서에 기초한 개념이다. 여기에는 ① 유월절 양 ② 대속물인 속죄양 ③ 묵시사상의 심판자로 오시는 양 ④ 제 2 이사야의 고난의 종이 포함된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렇게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양이라는 명칭을 예수에게 적용시킴으로서 예수가 누구인지 설명한다. 예수는 생명의 주인인 동시에 모든 인간의 죄를 단번에 도말한 대속자이며, 죄인을 위해 목숨을 버림으로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고난의 종이자, 마지막 때에 우리를 심판하는 심판자이다.

 

여러 가지 유대 전통에 따른 명칭들    요한복음 기자는 “하나님이 선택한 자”, “메시야”,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고 다른 예언자들이 기록한 바 있는 그분”, “이스라엘의 왕” 같이 그 당시 사람들이 기대하던 다양한 메시야 명칭을 모두 예수에게 적용시킨다. 이는 일단 초점을 예수에게 맞춘 후 더 깊은 차원의 메시야관으로 이끌기 위해서이다.

 

세례 요한보다 큰 자    이는 전통적 메시야 명칭이 아니라 예수 운동과 세례 요한 운동의 관계가 문제가 된 상황에서 사용된 용어이다. 요한복음은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받은 사실을 의도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으며, 이 명칭을 통해 세례 요한의 정체성을 메시야인 예수의 길을 예배하는 자로 자리매김함으로서 두 공동체간의 관계를 확립한다.

 

인자    공관복음의 인자 개념이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인 심판자라면, 요한복음의 인자 개념은 ‘선재함’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인자는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분으로 하나님과 하늘에 계시다 내려 오셨으며 자신의 일을 완성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분이다.

 

(2) 유대 영지주의와 헬라적 배경에서 본 예수

 

요한복음 저자는 유대의 전통적 메시야 명칭을 넘어 유대 영지주의/신비주의 혹은 헬라의 철학적 사상을 매체로 예수의 정체성을 설명한다. 약간은 위험해 보이는 이 방식을 채택한 이유는 기존 개념만으로는 예수의 본질을 충실히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로고스 기독론    로고스 사상은 ① 헬라 스토아 학파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절대 정신), ② 히브리 사상 (하나님의 말씀), ③ 유대교의 지혜 전승(하나님의 속성, 심지어 하나님의 다른 모습)으로부터 기인했으며, 요한복음은 이렇게 당시에 헬라와 유대 세계에서 보편적이던 로고스 개념들을 광범위하게 받아들여 역사적 예수에게 적용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로고스는 ① 선재하고, ② 하나님과 같은 사역(창조와 구원)을 하며, ② 예수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로 나타났을 뿐 아니라, ④ 화육한 로고스인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이러한 요한복음의 기독론은 선재적이고 우주론적인 차원으로까지 발전된 ‘선재적 로고스 기독론’이라 할 수 있다.

 

“나는 ~~ 이다” 기독론    예수는 필요할 때 “나는 ~~ 이다”(에고 에이미)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이는 구약의 하나님이 야훼이듯이 신약의 하나님은 예수 자신임을 보여주는 강하고 충격적인 선언이다. 또한 이 용어는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언은 전통이나 다른 사람의 증언이나 구약성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표현인 예수의 담화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3) 요한복음이 본 예수 - 보내심을 받은 자/아버지의 기능은 아들의 기능

 

요한복음의 독특하고 궁극적인 기독론은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보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이 개념을 외부적인 적대자들과의 논쟁 상황에서 주로 사용했으며, 이는 이 개념이 유대교와의 갈등이라는 현실적 상황 속에서 탄생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적대자들이 하나님(유대교)와 예수(요한 공동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요한 공동체는 ‘아버지-아들’의 관계성을 통하여 둘 다를 선택한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보내는 자인 아버지와 보냄을 받는 자인 아들의 관계는 절대적인 관계이며 하나되는 관계이다. 파송된 아들인 예수는 ‘지금 여기서’ 기능적으로 아버지의 모든 권한을 대신하며, 따라서 ‘지금 여기서’ 아들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아버지를 어떻게 대하느냐를 결정한다. ‘지금 여기서’ 예수를 받아들기로 결단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예수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제 4장, 요한복음의 신앙관 : 표적을 통한 믿음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기 때문에 그보다 더 큰 권위는 없다. 따라서 예수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의 자기 증언이다. 예수에 대한 바른 깨달음은 기존의 지식이나 전통이나 다른 사람의 증언과 체험이 아닌, 직접 예수의 말을 ‘듣고’ 그의 행위를 ‘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곧 믿음에 달려 있다. 기독론의 유일한 열쇠는 예수의 증언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결단하는 ‘믿음’이다.

 

요한복음의 ‘믿음’    진정한 믿음이란 스스로 예수를 판단하고 결단할 뿐 아니라, 이를 넘어 헌신의 행위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① 요한복음에 나오는 ‘믿음’이라는 말은 모두 동사형이다. 이는 공관복음의 ‘믿음’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힘에 대한 수동적 응답과 복종의 결과인 반면, 요한복음의 ‘믿음’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예수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독자의 능동적 결단이라는 의미다. ② 요한복음은 믿는다는 동사형에 ‘eis' 전치사를 사용하며 그 대상은 예수 자신이나 그의 말씀에 국한되어 있다.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believe)이 추상적이고 교리적인 반면, 보이는 하나님인 예수를 향한 믿음(believe in)은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헌신의 행위라는 의미다.

 

‘표적’과 ‘믿음’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기적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신적 자기계시인 ‘표적’이다. 예수의 삶은 모두 하나님의 자기 표현이기에 기적뿐 아니라 예수의 말과 행동 모두가 표적이며, 그중 가장 중요한 표적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표적마다 그 의미를 자세히 해설하며, 이는 독자들을 표적을 통해 예수께로 결단하는 믿음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였다. 표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신앙의 단계에 따라 ① 표적을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경우 ② 표적을 단순히 기적으로 보는 경우 ③ 예수의 기적을 표적으로 보는 경우 ④ 어떠한 표적도 없이 예수를 믿고 헌신하는 경우로 나뉜다. 요한복음은 예수를 직접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믿음을 결단해야 했던 요한공동체에게 표적 없이 믿는 궁극적 신앙의 단계로 나아가도록 격려한다.

 

믿음의 결과     이러한 믿음은 예수와의 인격적 관계를 통한 상호 거함을 그 본질로 하는 ‘하나됨’으로 이어지며, 이는 존재론적인 합일이 아니라 아버지-아들의 관계처럼 기능적인 하나됨이다. 이러한 하나됨은 믿는 사람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키며, 이는 외적으로는 예수께 헌신하는 의지적 응답인 사랑의 실천으로, 내적으로는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변화로 나타나게 된다.

 

 

제 5장. 요한복음의 이원론

 

 

선택과 거부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원론적인 용어는 예수에 대한 인간의 관계성을 설명하는 상징어이다. 긍정적인 관점의 용어 - 선, 하나님, 진리, 빛 생명 - 는 예수를 선택하는 것을 상징하고 부정적인 관점의 용어 - 악, 사탄, 거짓, 어둠, 육, 죽음, 유대인 - 는 예수를 거부하는 것을 상징한다.  요한복음의 이원론은 두 세계가 있다는 이원론이 아니라 한 개의 세계(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다. 존재하는 세계는 오직 하나님의 세계 뿐이다. 이 세계를 선택하는 것은 생명의 길이며 거부하는 것은 사탄의 세계인 죽음의 길이다.

 

결단과 결정론    하나님에 대한 선택은 단순히 관념적이고 초시간적인 존재의 세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의 구체적이고 현실적 결단 및 실천과 연결되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선택은 예수라는 구체적 인물과 그 계명대로 사는 삶이며,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은 예수와 그 계명을 거부하는 것이다. 선택과 거부가 인간의 선택이라면 ‘결단의 이원론’이 되며, 하나님의 허락이라면 ‘결정론적 이원론’이 된다. 요한복음은 이 두 견해를 혼합시키지 않고 그대로 병치하며, 이는 이 결정이 논리적 해석을 넘어서는 신비 그 자체임을 인식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제 6장, 요한복음의 종말론 : 모든 것은 지금 여기에

 

 

요한복음의 종말론     요한복음에는 종말이 미래에 있다는 초기 기독교의 미래적 종말론과 예수 안에서 이미 종말이 이루어졌기에 ‘현재가 궁극이요 완성’이라는 현재적 종말론이 혼재되어 있다. 예수는 선재한 로고스이자 하나님의 현현이기 때문에 예수를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자 '지금 여기서' 영원한 진리와 생명을 만나는 것이다. 예수와의 만나는 그 순간이야말로 종말의 때이다. 이는 미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앞에서 현재는 미래를 포함하고 있는 ‘영원한 현재’라는 뜻이자, 예수 안에 있는 미래를 현재화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서의 결단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요한복음의 성령론      예수가 떠난 후에는 역사적으로 만날 수 없는 예수가 파라크레토스로 '지금 여기에서' 나타난다. 파라크레토스는 과거의 예수와 미래의 예수를 현재에 동시에 경험할 수 있게 해주며, 이를 통해 요한 공동체는 역사적 예수를 듣고 만난 사람보다 더 바르게 예수를 깨닫게 된다. (내면화 작업) 이러한 파라크레토의 임재는 역사적 예수의 사역과 요한 공동체의 사역이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시키고, 당시 기독교 공동체의 가장 큰 문제였던 재림의 지연을 극복하게 해주었다.

 

요한복음의 교회론      요한복음은 사도적 체제와 같은 위계적이고 제도적인 교회상이 아닌, 관계를 통해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인격적 교회관을 강조한다. 교회의 하나됨은 하나님-아들의 관계성에 기인하고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사랑에 근거한다. 파라크레토스를 통해 예수와 하나 된 교회는 하나님의 자기 현현의 장소가 되며, 이 교회의 선교를 통해 세상도 예수와 하나됨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장소로 변화된다. 이는 하나님-예수-세상-교회의 도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요한복음의 예전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직접 성만찬을 제정하셨다는 기록이 없으며 요한복음 저자는 예전의 제도적 측면보다 예전이 지닌 현실적인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 세례와 성찬같은 예전의 목적은 제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전의 주인공인 예수와 ‘지금 여기서’ 새로 만나는 것이며 이 만남을 통해 현실의 위기를 극복하는 새로운 힘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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